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피플 & 스토리] ‘하정우’라는 충무로의 보석
[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그나저나 저한테 언제 시집오실 거예요?” 멀뚱한 표정의 허삼관(하정우 분)이 결혼 상대로 점찍은 허옥란(하지원 분)에게 묻는다. 만두 한 접시에 고기 한 근 사주고는 청혼하는 남자라니…. 옥란은 기가 찬다. 훗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일락’이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삼관은 사사건건 심통을 부린다. 옥란이 무거운 장독을 옮겨도 바닥에 드러누워 꼼짝할 줄 모른다. 어린 일락에게 “둘이 있을 때는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타박하고, 툭하면 “네 아버지 하소용에게 가라”고 밉살을 떤다.

영화 중반부터 펼쳐지는 허삼관의 ‘매혈기’(피를 파는 이야기)는 처절하다. 삼관을 향한 조소는 이내 연민으로 바뀐다. 무리하게 피를 뽑아 창백해진 얼굴을 보노라면 측은하다. 거리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던 삼관의 충혈된 눈에 덩달아 눈물이 솟는다. 평범한 듯 보이는 외모에서 묻어나는 페이소스는 하정우를 따라올 배우가 없다. 게다가 이번엔 단순히 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허삼관을 스크린에 옮겨왔다는 점에서 몰입도는 배가 된다.

‘허삼관’은 코미디 영화 ‘롤러코스터’(2013)에 이어 하정우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사실 ‘허삼관’ 연출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원작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위화의 대표 소설(‘허삼관 매혈기’)인데다, 전작의 14배에 달하는 제작비가 투입됐다는 점에서도 부담스러운 작업이었다. 하정우는 현장에서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본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물어보라’는 선배 감독들의 조언대로 막내 스태프의 의견까지 두루 들어가며 영화를 완성했다. 이제 겸허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사진설명> ‘감독’ 하정우는 찰리 채플린과 우디 앨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각박하기 때문에, 영화는 판타지였으면 좋겠어요.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사람들에게 위로와 웃음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죠. ‘허삼관’도 그런 부분을 부각시키려고 했어요.”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김성훈, 대세 하정우로 거듭나다=2002년 영화 ‘마들렌’에서 신민아의 옛 연인으로 등장한 하정우는, ‘슈퍼스타 감사용’과 ‘잠복근무’, 드라마 ‘무인시대’와 ‘프라하의 연인’ 등에서 조·단역을 두루 거쳤다.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 것은 윤종빈 감독의 ‘용서 받지 못한 자’(2005). 군 생활의 참혹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화제작이다. 당시 시작된 윤종빈 감독과의 인연은 ‘비스티 보이즈’,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군도: 민란의 시대’까지 이어진다.

하정우를 ‘대세’ 배우로 자리잡게 한 작품은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2008)다. 극 중 소름끼치는 사이코패스 연기를 선보인 하정우는 충무로의 주목받는 스타가 됐다. 그가 배우 김용건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이 무렵. 이미 ‘배우 하정우’로 얼굴을 알린 뒤였기 때문에, 그는 2세 배우들이 애증을 느끼는 ‘누구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자연스럽게 뗄 수 있었다.

‘추격자’의 흥행은 하정우에게 기회인 동시에 위기였다. 살인자 캐릭터의 여운 탓에 ‘하정우의 얼굴만 봐도 무섭다’는 대중들의 반응이 한동안 이어졌다. 일각에선 ‘추격자’ 속 이미지에 발목을 잡혀 다른 역할을 못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그는 보란 듯이 ‘비스티 보이즈’(2008)의 허세 가득한 호스트, ‘멋진하루’(2009)의 넉살좋은 남자, ‘국가대표’(2009)의 입양아 스키점프 선수, ‘황해’(2010)의 조선족 청년 등을 연기하며 매번 다른 얼굴로 관객 앞에 나타났다.

아울러 ‘추격자’(510만), ‘범죄와의 전쟁’(460만), ‘베를린’(716만), ‘더 테러 라이브’(558만) 등의 흥행으로, 하정우는 연기력에 티켓 파워까지 갖춘 배우로 성장했다. 이제 박찬욱, 최동훈, 윤종빈, 나홍진 등 충무로의 내로라 하는 감독들이 앞다퉈 그를 찾는다. 



▶‘롤러코스터’ 감독의 심기일전作 ‘허삼관’=하정우는 연기 활동 틈틈이 그림 작업도 하며 다재다능함을 뽐냈다. 그러던 중 2013년 ‘롤러코스터’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변신했다. 디렉션(지시)을 받기만 하던 입장에서 주는 입장이 된 것이다. 피부 트러블이 극심해질 만큼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그의 첫 연출작은 관객 27만 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돌이켜보니 ‘롤러코스터’는 나 혼자 웃을 수 있는 영화였어요. 공감과 소통을 못했던 것 같아서 이번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죠. ‘허삼관’은 첫 상업영화다보니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죠. 시나리오 모니터와 촬영 등 모든 과정을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만드는 느낌으로 임했어요.”

사실 하정우는 ‘허삼관’의 주연 배우를 먼저 제의받았다. 그는 원작 소설을 읽으며 ‘어떻게 이런 인물이 다 있을까’ 감탄했고, 꼭 영화화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어적 말투와 입체적 캐릭터, 말 장난 등 모든 게 그의 취향과 맞았다. 운명처럼 2년 뒤에 감독 자리를 제안받았고, 주인공까지 겸하게 됐다.

“처음엔 원작 소설을 두 시간 안에 담아야 한다는 고민이 컸어요. 어느 순간 과감하게 ‘영화로만 보자’고 생각하니 일이 풀렸어요. ‘영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만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배우들이 대사 주고받는데 ‘컷’ 하는 게 실례같고, 선배들에게 연기 지적하는 것도 민망했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탄탄하게 다듬는 데 공을 들였어요. 디렉션을 주지 않아도 될 만큼 가이드를 잘 만들어놓자고 생각한 거죠.”



▶‘국가대표’급 연출 열정=‘허삼관’에선 특히 아역 배우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삼관이 울고 웃는 것도 아이들 때문이고, 크고 작은 사건의 중심에 늘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아역 캐스팅은 그만큼 중요했다. 하정우는 ‘우리나라에 있는 아역 배우들은 다 보자’고 생각했다. 대사 전달 능력이 있는 아역배우가 국내에 1600명 가량. 아역업체 실장들을 다 불러서 일주일에 200명 씩을 아이들을 만났고, 심사숙고 끝에 세 형제를 뽑았다. 그 노력은 언론배급 시사회 때 빛을 발했다. 영화를 본 기자들과 업계 관계자들은 ‘일락을 연기한 아역이 누구냐’, ‘아역 배우들 활약이 대단하더라’고 입을 모았다.

보편적인 드라마이기 때문에 음악과 미술의 역할도 중요했다.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음악이면 좋겠다 싶었고, ‘토이 스토리’나 ‘몬스터 주식회사’와 같은 애니메이션 삽입곡을 떠올렸다.

“예전에 촬영 차 연변에 갔었는데 휑 하더라고요. 이렇게 우울한 곳에서 어떻게 살까 싶었는데, 다음 날 함박눈이 내린 광경을 보고 감탄했어요. 너무 아름답게 달라져 있었죠. ‘여기 사람들은 이 낭만으로 살아가는구나’ 그랬죠. ‘허삼관’의 배경인 50년 대 빈곤했던 시절에도 낭만은 있었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음악과 미술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허삼관이 일락을 데리고 얘기하는 장면은 ‘남자 대 남자’의 분위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대부’의 삽입곡 느낌을 떠올렸다. ‘대부’ 주제가는 체코 필하모닉의 솜씨로 탄생했는데, 음악감독이 ‘우리도 거기서 작업해보자’고 했다. 하정우는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했는데 실제로 성사됐다. 또 재즈와 탱고 느낌의 삽입곡은 이탈리아에서, 하와이안 음악은 프랑스 파리에서 완성됐다. 음악감독의 글로벌한 인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50~60년 대를 다룬 영화가 많지 않아 미술적 상상력을 펼칠 여지도 무궁무진했다. 하정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바나 뒷골목’ 같은 독특한 허삼관네 마을이 탄생했다.

▶하정우가 그리는 ‘멋진하루’=하정우에게 ‘감독’으로 보낸 지난 몇 개월은 더없이 좋은 인생 경험이었다. 10여 년 간 배우로서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롤러코스터’와 ‘허삼관’이 전환점이 됐다. 한 마디로 ‘초심’을 떠올리게 했던 시간이었다.

“촬영을 준비할 때부터 영화가 잘 되길 간절히 바랐어요. 매일 기도하고 자기 전엔 맑은 정신을 가지려고 했죠. 문득 ‘내가 평소에도 삶을 이렇게 절실하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은 정말 재미 있었으면’, ‘오늘 하루도 잘 지나갔으면’ 촬영 내내 그렇게 절실한 마음을 가졌던 것처럼, 내 일상도 의미있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올해 서른여덟의 그는 “마흔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푸념했다. 얼마 전 친구와 모바일 메신저를 주고받으면서 ‘진짜 재미있게 놀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놨다고도 했다. 다행히 박찬욱 감독의 신작 촬영이 시작되는 5월까진 4개월 가량 여유가 있다. 그 기간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세 번째 작품이 뭐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할 거예요. 다음 작품에선 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어요. 앞으로 뭔가 ‘내 것’을 꺼낼 수 있다면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은 그 과정에 있는 거겠죠. 계속 담금질을 해가면 좋아질 거라 생각해요.”

ham@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