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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모습과 너무나 닮은…80년전 조선의 삶·욕망의 풍경들쓴소리를
서구화 물결에 남녀 양장 유행
신문은 하이힐 스타일까지 조언

증권시장 같은 미두취인소 개설
투자하다 가산 탕진·자살 속출

얼굴 허옇게 하는 화장품 인기
수은·납 등 독성 물질 부작용도


조선의 풍경, 근대를 만나다/김태환 외 지음/채륜서


80여년전의 세밑 풍경은 어땠을까? 1933년 12월 잡지 ‘신여성’은 ‘크리스마스 푸레센트-BOYS’, ‘크리스마스 푸레센트-GIRLS’라는 제하의 기사로 연인 남녀가 서로에게 해줄만한 당시 돈 10원 안팎의 선물 목록을 소개했다. 기사는 ‘BOYS’에겐 ‘씨카렛-라이터’(시거렛 라이터)나 ‘오-버 스웨-터’ ‘마푸라’(머플러), 넥타이, ‘화장품 셋트’, ‘헷트’(모자) 등을 추천하며 “이만큼한 정도로 푸레센트를 한다고 하면 상당하다”고 했다. 돈을 더 쓸 요량이면 ‘축음긔’(축음기)나 ‘양복’도 좋다고 했다. 여성용으로는 모자, 목도리, 반지, 가죽장갑, 여행용 화장가방 등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꼽았다. 그러면서 “녀자 또는 부인에 푸레센트할 때에는 속옷, 양말, 버선 이런 것은 실례”라고 조언했고, “더 고가한 것을 구하신다면 그야 한이 업겠지요”라고도 덧붙였다.

예나 지금이나 각종 축일이나 기념일에 더 고달픈 이는 남성이었다. 잡지 ‘신동아’의 1933년 신년호엔 여우목도리를 우아하게 걸친 여성이 앞서 걷고 그 뒤를 어깨에 선물 상자를 잔뜩 짊어진 남자가 휘청대며 따르는 삽화가 실렸다. 그 옆에는 “엄처시하! 충실한 그이! 연말연시가 가장 그에겐 곡경(曲境)이란 말도 당연!”이라고 썼다. 고종 때의 정치가 윤치호는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기록한 ‘윤치호 일기’를 남겼는데, 1933년 12월 24일자에서 “크리스마스가 서울 중산층에게 또 하나의 석가탄신일”이라며 “여성들은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여성들이 관심을 갖는 건 크리스마스가 쇼핑을 위한 또 하나의 핑계거리”라고 개탄했다. 중산층과는 대비되는 서민들의 팍팍한 세밑 풍경도 당시 일간지에 기록됐다. 1936년 12월 25일자 신문에 실린 기사에선 ”증세니 대중과세니 해서 조선에서도 곧 술값이 오른다”며 크리스마스 이브니 하는 것은 “보너스에 월급이 겹치고 호주머니에 돈푼들이나 있으니 장사치들이 돈벌이나 좀 해볼까 하는 흉계”라고 쓴소리를 하고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 “동짓날 남은 팥죽이나 먹자”고 자조하던 서민의 이야기가 묘사됐다. “회비 1원 50전 요리 두 가지 술 한 병 증정, 오십 명의 미녀가 서비스”라고 광고 문구를 바깥에 떡하니 써붙인 술집이 있을 정도로 이미 1930년대 경성의 연말은 ‘불금’이 계속되는 향락의 시절이었다. 
80년전 조선의 연말연시에도 쇼핑객들과 술자리를 가지려는 사람들로 거리가 흥청거렸다. 사진은 1930년 명동

근 백년이 지난 지금과 어쩌면 그리 닮아 있을까? 사람살이가, 욕망이 빚어내는 풍경이 말이다. 최근 출간된 ‘조선의 풍경, 근대를 만나다’는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10명의 학자가 1920년대 개화기에서 1940년대 일제 강점기까지의 조선 사회의 풍속도를 알기 쉽게 담아낸 책이다. 각종 문헌과 자료에서 추려내 패션, 미용, 성병, 놀이, 장난감, ‘미두’(米豆), 혼인, 사쿠라(벚꽃), 크리스마스, 어린이 등의 10가지 소재로 옛 시절의 이야기를 전한다.

가장 먼저 패션분야에선 전통의 ‘흰옷’에서 점차 양장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당시 언론과 지식인들의 ‘설왕설래’로 유추했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는 고종이 1895년 새해부터 신하들과 관리, 백성에게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으라고 명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1920년대까지도 여전히 일반인들은 흰옷을 즐겨 입어 1921년 일간지엔 “금년 봄에도 흰 옷이 유행”이라는 전망 기사까지 담길 정도였다. 이에 대해 당시 식자층들은 한복을 개량하네 마네 하며 한마디씩 보탰다. 
와이셔츠 광고

그 한편에선 거센 서구화의 물결이 일었다. 1920년~1930년대 신문에선 양장 남성복과 여성복의 유행경향을 시즌마다 실었다. 남성복의 경우 재킷에 넥타이, 와이셔츠는 물론이고 모자에서 안경, 시계, 커프스까지 갖춘 고급 정장을 제안하고, 여성의 경우 정장은 물론이고 핸드백과 하이힐에 이르기까지 소재, 색상, 스타일을 세세하게 조언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미소녀들을 하루에도 4, 5명씩 만날 때 웬만한 청춘은 뇌살당하고 말리라” “가뜩이나 얼빠진 조선청년들이 미인들의 모습에 더욱 정신 못차린다”며 돈많은 멋쟁이들을 비난하는 표현까지 기사에 등장했다. 한편에선 살림살이 빠듯한 샐러리맨들이 봄엔 겨울옷을 전당포에 저당잡히고 춘추복을 찾아 입고, 겨울엔 춘추복을 잡히고 겨울옷을 찾아 입었다.

당시 기생은 오늘날의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고, 평양의 장연홍이나 김영월, 오산월 등 최고의 기생들은 비누나 화장품 광고의 인기 모델이었다. 백분이나 크림을 ‘찹쌀떡’이나 ‘밤도깨비’처럼 허옇게 바르는 화장법이 대대적으로 유행했는데, 점차 납, 수은, 붕산 등 화장품 속에 든 독성물질로 인한 부작용도 속출한다. 1920년대에는 국내에서 생산된 최초의 화장품이라 할 수 있는 ‘박가분’이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이것이 두산그룹 창업자 박두병의 아버지인 거상 박승직의 부인 정정숙이 만든 것이다. 한때 하루에 약 5만갑이나 팔렸다고 한다.

매독, 임질 등 성병은 결핵, 기생충과 함께 일제에 의해 조선의 ‘국민질병’으로 꼽혔는데, 실제로는 남성들에 의해 전염되곤 했지만 일제는 여성들의 병, 성적 방종으로 인한 병, 즉 ‘화류병’으로 치부했다. 그러니 부인들은 남편에게 성병이 옮아도 내놓고 치료하지도 못했다. 1922년엔 매독에 걸려 고통에 못이긴 한 부인이 인육을 먹으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공동묘지의 시신을 파내 다리의 살을 먹었다가 발각된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조선 최초의 증권거래 시장이라 할만한 ‘미두’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를 끈다. 미두는 현물 거래 없이 미래의 쌀값을 예측해 투자하는 일종의 선물 거래다. 조선의 쌀 시장 진출을 위해 일본이 1896년 도입한 것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수많은 이들이 인천의 ‘미두취인소’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투기와 도박성이 짙은 이 미두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회문제가 됐다. 그 중에 ‘반복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미두로 오늘날 400억원이 넘는 돈을 벌어 거부가 됐다. 수십억원을 들여 조선최고의 미녀 김후동과 결혼식을 올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돈을 모두 잃고 중풍에 정신병까지 겹쳐 폐인이 됐다. 마지막까지 미두장을 배회하다 마흔에 죽었다.

밝은 이야기도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던 아이들이 ‘어린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으면서어떻게 놀이와 교육의 주체이자 민족의 미래를 짊어진 존재로서 ‘재발견’됐는지도 상세히 담겼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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