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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제의 책]80살 초보작가의 수묵화같은 들꽃 인생, ‘잊히지 않는 선물’
-이영희 수필집ㆍ도서출판맑은샘 출간…사소한 일상의 터덕거림

-‘숨길 것도 꾸밀것도 없는 나이이기에 부끄럽지만 내놓은’ 수필



[헤럴드경제=김영상 사회부장]“나 그대만을 위해서 피어난/저 바위틈에 한송이 들꽃이여/돌틈사이 이름도 없는 들꽃처럼 핀다 해도/내 진정 그대를 위해서 살아 가리라/언제나 잔잔한 호수처럼/그대는 내 가슴에 항상 머물고/그 많은 꽃중에 들꽃이 되어도 행복하리/~~~/돌틈사이 이름도 없는 들꽃처럼 산다 해도/내 진정 그대를 위해서 살아 가리라/오색이 영롱한 무지개여/그대는 내 가슴에 항상 머물고/수 많은 꽃중에 들꽃이 되어도 행복하리”



가왕 조용필의 노래 ‘들꽃’이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때가 언제였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아마 25년 전 쯤 아니었을까. 처음 이 노래를 만났을때 충격을 받았다. 가사는 황홀한 시(詩)였다. 노랫말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했다.

이 노래는 그후 나의 ‘18번’이 됐다. 수십년간 이 노래를 불렀으니, 아마 1000번 이상은 내 목에서 흘러 나왔을 것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들꽃’이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거친 들판에 수줍게 핀 들꽃. 장미처럼 화려하지 않고, 튤립처럼 열정적이지는 않은, 그저 이름없는 꽃. 그게 들꽃이다.

들꽃은 우리 삶이다. 평범한 우리 일상이다. 화려한 권력과는 거리가 멀고 멋드러진 재물과는 동떨어져 사는 이들의평범한 인생,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반복되는 일상을 소화하는 민초(民草)들을 대변한다. 들꽃은 요란하지 않으며 인내로 무장돼 있다. 평범한 삶은 소박하지만, 인내를 요하는 법이다. 묘하게 그래서 들꽃과 우리 인생은 닮았다. 들꽃의 유일한 저항이라면 자존심이다. 들꽃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토양이 아니면 거부한다. 들꽃을 파 다른 곳에 심으면 대체로 죽는다. 꽃 전문가들도 들꽃을 이식하려면 매우 조심스럽게 다룰 정도다. 설사 살아나더라도 늘 고향을 그리워 한다. 이쯤되면 들꽃은 까탈스럽다. 우리네 서민이 평소엔 죽은 듯 살다가, 너무나 참기 힘들때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묘하게 닮았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 그들에겐 저마다의 들꽃인생이 있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너무 어렸을때부터 인내의 인생을 맛봤던 내가 그래서 ‘들꽃’이라는 노래를 들었을때 단숨에 꽂혔나 보다.

들꽃은 내게 ‘그리움’이다. 내 할머니도, 외할머니도 들꽃으로 살다가 가셨다. 그들 역시 이름 없는 들꽃처럼 살았지만, 나에겐 어느 화려한 꽃 이상의 의미였다. 그들은 지난한 인내의 삶으로 인생을 채웠고, 나를 위해 온몸을 헌신했다. 지금은 내 어머니가 아직도 자식을 위해 들꽃처럼 살고 있다.

들꽃을 생각나게 만드는, 가슴 따뜻한 수필집이 나왔다. 여든살의 자칭 ‘주부’ 이영희 씨가 쓴 ‘잊히지 않는 선물’(초판 2014년 8월13일ㆍ도서출판 맑은샘ㆍ187쪽ㆍ1만원)이다. 틈틈이 삶의 소회를 끄적였는데, 이것이 책으로 나올 줄 자신도 미처 몰랐단다.

작가는 겸손하다.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옛 고향과 현재의 소박한 삶으로 향한다. 그는 서문에서 말한다. “나는 글을 쓸 만한 소양도 자질도 배운 것도 없는 평범한 주부”라고. “어느날 사느라고 부딪친 사소한 터덕거림이 얼른 삭여지지 않을때, 또는 아침 현관문 앞에서 몇 잎 구르는 단풍잎을 그 가을 처음 보면서 ‘아, 낙엽!’하고 가만이 외치고, 그런때 한 줄 두 줄 써보았다”고. 그런 것이기에 “세상에 내놓기가 부끄럽지만 하지만 이제 나를 숨길 것도 꾸밀 것도 없는 나이이기에 이대로 내놓는다”고.

솔직한 말인 것 같다. 이영희 씨의 수필집은 그래서 화려하지는 않다. 미사여구도 없다. 전문가가 아니라는 작가의 말처럼,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투박한 곳도 군데군데 보인다.

그런데도 담담한 수묵화 냄새가 난다. 향기롭다. 꾸미지도, 애써 맵시를 포장한 것이 아니기에 자연향이 콧가에 맴맴돈다.



몇개의 글감을 들여다보자. 기본은 일상이며 사랑이다. “두 손녀가 다섯 살, 세 살 때였다. 내가 아이들 집에 들어서면 아이들이 쫓아 나와 “하므이, 하므이” 하며 매달린다. 두 아이를 번갈아 안아주고 “두부 사려” 해주고 목마도 태워주고 한참을 그러고 나면 어깨가 축 늘어진다. (중략)어떤 때는 내가 저희 말을 잘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으레 내가 “할머니가 잘 모르고 그랬어. 할머니는 바보지?” 한다. 그러면 “으응, 하무이는 바보야”라고 한다.”(하므이는 바보 중에서)

“옆집 순애 언니는 마을 사람들에 에워싸여 연지곤지 찍고 색동 원삼에 칠보족두리 쓰고 자기 집의 흙마당에 멍석을 펴고 혼례를 올렸다. 그때 나도 할머니 손잡고 구경 갔는데, 순애 언니가 얼마나 예뻤는지…”(흙마당 중에서)

“그 나무는 파란 하늘에 높이 서서 반짝이고 있었다. 나무가 반짝이는 것이 신기해 나는 울음을 그치고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살며시 다시 졸음이 오고, 졸음 속에서 하얀 모시옷을 입은 우리 할머니가 그 포플러 나무로부터 부지런히 내게로 오고 계셨다.”(포플러 나무 중에서)



이처럼 이영희 씨 책에선 가족과 사랑, 할머니가 많이 등장한다. 여든살이면 세상이 다 아름답게 보이는가 보다. 옛생각이 정답게 그림처럼 풀려 나온다. 이영희 씨 역시 누군가의 할머니가 됐다. 세월의 더께 앞에서 자신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 옛날 반짝거리던 포플러 나무의 추억은 그에게 그래서 수묵화 같은 인생을 담담히 술회하게 만들었나 보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할머니 생각에 울컥했다. 이영희 씨 보다는 훨씬 산 날이 적지만, 언젠가 나도 인생을 뒤돌아볼때면 할머니를 지금보다 훨씬 더 사무치게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사진= 책 '잊히지 않는 선물'

이 책을 읽은 어떤 이의 감상 글은 나보다도 더 정확하게 책의 진면목을 소개해준다. “초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린, 멀리 어스름 동이 트는 새벽하늘 해외 출장길. 영화 한편을 보고 또 한편을 볼까 이리저리 찾아보다 떠나기 전 가방에 넣은 ‘잊히지 않는 선물‘ 책을 펼쳤다. 단숨에 읽었다. 6ㆍ25 전쟁때 피난 못간 광주 이야기, 도시 아파트에서의 시골 향수. 수채화 그림을 보듯, 단 수밀복숭아를 한입 베어문 느낌의 수필 속의 소설을 읽은 느낌이었다. 이 수필은 화려하진 않으나 일상 속의 아름다움과 진실이 담겨있는 여인의,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다.”

공감한다. 이 글은 우리 어머니 얘기고, 할머니 얘기다. 이영희 씨 글이지만, 각자 할머니와 어머니 인생이 담겨 있다.

책장을 덮고 잠깐 사무실 창밖의 하늘을 본다. 그 옛날 두메산골 살때의 뭉게구름이다. “아, 할머니, 외할머니. 당신들이 그립습니다.”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덧붙임 글 하나 추가한다. 출판사는 책 표지에 백합과인 카라 세 송이를 넣었다. 카라의 꽃말은 순수, 순결을 의미한다. ‘시작’을 상징하는 고급스런 꽃이다. 웨딩홀의 단골 꽃인 이유다. 다만 고급품의 꽃은 넣었으되, 나머지는 제목을 제외하고는 여백으로 처리했다. 여든 저자의 지나온 인생을 존중하고, 아름답고 순결한 새 세상의 시각을 담은 저자의 순수한 뜻을 담백한 디자인으로 표현하겠다는 출판사의 배려가 담긴 듯 하다.

ysk@heraldcorp.com



▶저자 이영희

-전남 광주 출생

-광주 사범학교 졸업

-초등학교 교사

-월간문학 수필부문 신인 작품상

-한국 문인협회 회원

-무등수필 회원

-아름다운 우리수필에 작품 수록(2005년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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