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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조트 붕괴·세월호참사·군부대 총기난사…다사다난했던 대한민국…민속명절 가족들 모인자리 “무고하셨죠?” 안부인사만으로도 좋지 아니한가…
올해 추석은 1976년 이후 38년 만에 가장 이른 추석이다. 시민들은 이처럼 ‘부지런한’ 추석이 “무척 반갑다”고 입을 모았다. 여름 휴가 복귀 직후라서, 또는 쉬는 ‘빨간날’이 빨리 도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유는 다소 서글프다. 유난히 비극적인 사고가 많았던 올해,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추석은 가족애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올해는 믿기 힘든 사건ㆍ사고들의 연속이었다. “전 국민이 트라우마를 겪을 지경”이라는 호소가 나올 정도이다.

300명이 넘게 사망ㆍ실종됐지만 4개월을 넘기고도 아직 마무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세월호 참사, 대학생 9명과 이벤트 업체 직원 1명이 숨진 경북 경주 마우나 리조트의 체육관 붕괴 사고, 육군 28사단의 윤 일병 집단 구타 사망 사건과 22사단 임모 병장의 총기 난사 사고까지. 또 송파 버스 질주와 대구 버스 추락, 울산 현대중공업 화재, 고양터미널 화재, 장성 요양병원 화재, 광주 헬기 추락 등 한 가정의 아내이자 남편, 자식들이었을 사람들은 속절 없이 사고에 희생되고 말았다.

드러내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오열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 또는 형제 자매의 사진이 또렷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흉한 민낯을 낱낱이 보여주는 사고에 대해 시민들은 집회ㆍ시위에 참가하거나 SNS에 견해를 올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가족은 다치지 않았다’는 서글픈 안도감이 조성되면서, 내 가족에 대한 애정도가 새삼스레 높아진 모습이 완연하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정수경(45ㆍ여) 씨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희생자 가족들이 우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며 “그분들에게 좀 죄송스럽고 한편으로는 슬프지만, 요즘에는 남편과 자식들이 무사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세월호 사고 이후 삼겹살이 유독 많이 팔렸던 것으로 집계됐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삼겹살은 가족 여럿이 모여 먹는 전형적인 음식인데 삼겹살이 많이 팔렸다는 것은 그만큼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한 달 뒤인 지난 5월 미래창조과학부는 전국 16∼39세 남녀 10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26.5%가 미래사회의 주요 가치로 ‘안전한 생활환경’을 꼽았고 이어 ‘여가시간’(20.4%), ‘건강’(20.3%) 등의 순으로 응답률이 높았다고 밝혔다. 기존에 중시하던 ‘대인관계’(4.8%), ‘사회적 지위’(1.4%) 등은 한참 뒤로 밀려났다.

충격적인 경험과 기억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기존의 생각을 바꿔놓는다. 빽빽한 지네의 굼뜬 행렬처럼, 꽉 막힌 고속도로 불통에 투덜대면서 ‘의무방어전’처럼 고향으로 향했던 추석의 ‘클리셰’가, 올해만큼은 소중하게 다가온다는 사람들의 속내는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울 강서구에 사는 박모(55) 씨는 “작년 추석 때 내 딴에는 조카들 걱정한다고 취업에 대한 질문과 결혼 문제를 물었었다”며 “하지만 그것이 조카들에게는 ‘스트레스’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을 것 같아 참 미안하다”고 했다. 이어 “힘내라는 말도 부담이 되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즐겁게 살면 된다’는 말을 올해 꼭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의류업에 종사하는 권모(38) 씨는 “이번 추석에는 어머니 칠순과 조카의 돌잔치가 잡혀있는데, 작년 같았으면 쉬고 싶은데 가족 행사가 많다고 푸념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고가 발생해 평범한 가정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더 커진 것 같다”고 했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이모(30) 씨는 “짐도 많아서 고향인 부산으로 차를 끌고 내려간다. 결혼할 사람과 함께 내려가는데 둘 다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매년 생각만해도 답답해지는 힘겨운 귀성ㆍ귀경길. 하지만 올해는 거친 풍파 속에서 무고하다는 안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기쁜 여로(旅路)가 될 것 같다.

이지웅 기자/plat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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