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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해창 선임기자가 만난 사람> 강인덕 전 통일부장관 “해양과 대륙 문명 연결고리,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 빛내야”
내년이면 남북이 갈라선지 70년이 된다. 그러나 질곡의 분단사는 반목과 대립 속에 여전히 진행형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연초 통일대박론에 이어 3월에 드레스덴선언을 내놓더니 최근에는 통일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이달을 기점으로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기대된다. 8.15광복절 경축사에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14~18일), 인천아시안게임 북한 선수단 및 응원단 참가, 추석명절 남북이산가족상봉 등 호재도 즐비하다. 복잡 미묘한 때, 분단의 산증인이자 분단극복에 평생을 오롯이 바쳐 온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을 삼청동 극동문제연구소 통일관 연구실에서 만나 조언과 충고를 들었다.

강 전 장관은 초대 통일부 장관(그전까지는 통일원)이다. 보수진영 핵심정보통인 그가 1998년 진보성향의 김대중(DJ) 정부 1기 내각에 기용된 것이다. 그 배경이 궁금했는데 먼저 말문을 연다. “묘하지. 92년 대선에 패배한 김대중 총재(평민당)가 영국에 유학 갔다 돌아와 동교동에 아태평화재단이란 걸 만들었는데 나보고 강연을 요청해 왔어. 진보 쪽 젊은 정치인들이 모여 중구난방으로 통일을 떠들기에 지독하게 두 차례 교육을 했지. 가만 놔두면 괜히 김 총재한테 피해가 갈 것 같더라고. 김 총재도 문제가 있다 싶어 나를 불렀을 게야.”

삼청동 극동문제연구소 통일관 옆 정원에서 만난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나중에 김 총재 제의로 서교호텔에서 단둘이 식사하며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고 훗날 김 총재가 대권을 잡으면서 통일부 장관에 전격 발탁된 것이다. DJ진영의 ‘햇볕정책’도 나이브하다며 비판하던 그였다.

주변의 만류에도 그가 동참을 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는 IMF외환위기 체제였는데 내정(정치)이 안 되면 대북정책도 안 되는 상황이야. 내정을 강화 시켜 국가위기를 벗어나는 일에 공헌을 하고 싶었어. 장관 취임식에서 그랬지. ‘휴전선에 포탄 안 터지게 하고 총격전이 안 일어나도록 하는 게 내 일이다. 그래야만 외국인투자도 들어오게 되고 외환위기도 극복된다. 그러면 내 할 일은 끝난다’고.” 강 전 장관은 외교학의 대부 니콜슨(Harold Nicolson)경의 ‘외교는 정치의 연장이자 현실이다’라는 경구를 반복해 강조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사건에 따른 5.24조치로 남북관계는 전면 중단된 상태다. 유일하게 가동 중인 개성공단도 강제 폐쇄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물론 인도적 지원은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불안하다. “대북사업은 워낙 리스크가 너무 커. 개혁과 개방 안 되면 누가 대북투자를 하겠어. 금강산 문제도 그렇고 개성문제도 위험부담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야.”

그렇다면 개성공단은 실패작이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 우선 접경지대에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커. 다만 근로자 문제를 북한이 몽땅 장악한 것은 큰 문제야. 노동력에 대한 유연성 확보가 관건인데.” 개성공단 폐쇄 때 정부가 시시콜콜 나선 것도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123개 투자기업 사장단이 나서서 ‘3통(통행·통신·통관)도 안 되고, 더구나 일시에 근로자들을 빼내는 상태로는 우린 더 이상 못한다. 완전히 빼겠다’ 이렇게 했어야지. 연간 인금(현금) 약 4000 만 달러가 들어가는데 북이 외면할 수 있겠나.”

강 전 장관은 자신을 ‘포용(engagement)주의자’라고 한다. 금강산관광 프로젝트를 예로 들면서다. “금강산관광사업은 북쪽이 꼭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선 돈이 안 드니까 우리도 위험부담이 적고. 내가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측에 ‘지금은 국가적으로 위기다. 은행 빚도 엄청나니 과도하지 않은 범위에서 하자’고 먼저 제안을 했지. 결국 소 1001두를 몰고 가는 데 그 때 현대에 대해 얼마나 홍보효과가 컸어. 애초에는 500두에서 1000로 됐다가 끝자리가 0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한 마리 더 보탠 거였어. 싣고 간 트럭은 북한에 구제역이 발생해 두고 오기로 한 것이지.”

여든을 훌쩍 넘기고도 정정한 모습으로 장장 4시간에 걸쳐 남북문제는 물론 동북아 질서재편에 대해 고도의 지식과 정보를 들려준 강 전 장관.

세월이 흘렀지만 남북관계는 시원하게 뚫리지 않고 있다. 강 전 장관은 지금 북쪽이 인도적 지원 범위나 지원량, 그러니까 돈의 액수에 대해 탐색중인 것 같다고 했다. 식량과 비료 같은 것을 NGO 수준 말고 좀 더 담대하게 달라는 의미인데 우리 정부가 선뜻 나설 수 없는 입장이라는 설명이다.

북한의 식량문제에 일가견이 있다는 강 전 장관. “통일될 때까지 북한 식량문제는 해결 못해. 북한 논밭에서 나오는 소출이 우리의 3분의 1도 안 돼. 주체농법이 망쳤어. 모든 산은 계단식 밭으로 변한데다 산성화되고 강은 메꾸어졌어. 결국 국토재개발 차원에서 다룰 문제야.”

강 전 장관은 김정은 체제에 대해서도 속내를 훤히 들여다본다.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한다며 공산당기본원칙을 군으로 가져갔지만 김정은은 다시 당으로 돌려놓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자 핵개발 어쩌고 하면서 선군사상 계승쪽으로 기울고 있어. 체제는 당으로 갔지만 사상은 선군사상인 거지. 총을 맨 앞에 내세우는데 이건 모순이야. 당으로 왔으면 경제를 돌려야 하는데 선군사상 중심으로 하다 보니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에 중점을 두는 모양새야. 이런 상황이면 우리 지도자가 결심하기가 대단히 어려워. 이게 문제야.”

그는 시진핑 주석의 국빈방한을 성사시킨 것을 격찬하면서도 지나친 대중 의존도는 경계한다. “휴전협정 이후에 남한은 섬나라 신세가 됐는데, 그 덕에 해양국가 문화를 도입함으로써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이룬 유일한 국가가 됐어. 그런데 여기에 한계가 온 것이야. 이제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가치를 발현시켜야 하지 않으면 안 되지. 다시 말해 대륙과 해양세력을 연결하는 역할인데 내가 박 대통령의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야.”

강 전 장관은 반도국가로서 장점을 충분히 살린다면 통일 후 인구 7000만 명에 면적은 전체 22만k㎡가 넘어 새로운 비약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주변정세와 맞물려 북한을 보는 게 중요한데. 북쪽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인식이 필요해. 거기에도 모든 인간사가 다 벌어져. 심각한 것이 빈부격차, 도농격차, 지방과 평양 격차, 당과 평민의 격차인데 날로 심각해. 돈 있는 이들은 엄청나게 돈을 벌고 있지. 마치 중국의 태자당 같이 말이야. 얼마 전 붕괴된 평양 신축 아파트의 경우 15만 달러인데 매매가 된다고 하잖아. 커피 한잔에 1유로로 달러보다 비싸. 월급이 70센트인데 돈 있는 젊은이들은 맘대로 마신다고 그래. 과거 소련 붕괴는 당 간부들의 정보독점의 결과라고 하는데 북한이 지금 비슷해.”

강 전 장관은 일본과의 인연이 깊어서인지 한일관계를 중시한다. 친한파 지인층도 무척 두텁다. “한일 관계 더 나빠지면 안 돼. 일본은 납치문제 등 인도적 차원에서 점차 대북관계를 확대하고 있어. 미국이 군사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본 내 미군기지 운영에 일본의 부담이 커지면서 아베정권이 목소리를 더 키우는 게야. 우리하고 갈등이 깊어지자 친한 일본 친구들이 말문 좀 열어 달라고 연락해 와. 우리도 마찬가지만. 과거사에 너무 매몰되면 현재와 미래를 그르치게 돼. 정부가 안 되면 민간의 풀뿌리 외교, 지식인 교류라도 해야 옳아. 도쿄 내 반한시위가 전국으로 번지고 있다고 하잖아. 전엔 그러지 않았어.”

그는 어설픈 흡수통일론을 경계한다. “북한 권부는 권력공동체이고 백두혈통은 김일성 직계만이 아니고 빨치산 활동했던 이들은 모두 포함된다는 걸 알아야 돼. 북한이 쉽게 무너진다고 판단하면 안 돼. 지금 정권에 문제가 생겨도 대체세력이 나오게 돼 있어. 게다가 중국이 자기네 안보에 북한을 완충지대로 여기는 데 망하게 두겠나.”

통일 중간단계가 필요하다는 강 전 장관은 막대한 통일비용에 대한 우려는 기우라며 일정기간 신탁통치 형식으로 특별지역을 설정해 남측 기술과 자본에 북측 자원과 인력을 합치면 경제는 곧 급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게 바로 우리 민족의 저력이지. 대북투자와 관련해 압록강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우리 기업들이 중국과 제휴해 북한에 들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중국은 정치협상하고 우리는 자본을 대는 형식이지. 남에서 북쪽으로 가려하지 말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발상의 전환을 가져야 해.”

중국에 대한 그의 시각은 세밀하다. “강택민-후진타오-시진핑 체제까지 변함없이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시장원리를 적용하라(市場運作)’는 권유야. 북한이 확 바뀌어야 하는데 안되고 있어. 나는 과거에는 개혁이 없는 개방은 소용없다고 봤는데 지금은 개방을 통해서 개혁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해. 지금 자연스럽게 북한에는 밀매(밀수)가 이뤄지고 시장이 커지고 있어. 시장을 폐쇄하면 북한 경제 무너지게 될 정도야. 이제 점점 더 개방되고 시장원리가 작동한다는 의미지. 드레스덴선언을 적절하게 단계별로 차질 없이 구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좀 더 유연해 질 필요가 있다는 충고이자 조언이다. 



<강인덕 전 장관이 걸어 온 길>

*1932년생(평양)

*1945-1950년 평양 제1 고급중학교 졸업

*1950년 12월 월남

*1950-1955년 군입대(육군)

*1954-1958년 한국외대 노어과 졸업

*1959-1962년 해병대사령부 정보국 전략분석관(중위)

*1962-1978년 중앙정보부 북한과장-북한국장

*1973-1977년 경희대 정치학 박사

*1979-1998년 (재)극동문제연구소 이사장 겸 소장

*1998년 3월-1999년 5월 통일부 장관

*1997-현재 일본 성학원(聖學院)대학 종합연구소 객원교수

*2002-현재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대학 초빙교수



<남북대화 물꼰 튼 1972년ㆍㆍㆍ긴박했던 비하인드 스토리>

남북대화 출발점은 1970년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8.15 기념사에서 “북한이 무력포기를 하면 남북 간의 인위적인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 단초다.

그렇다면 8.15선언이 갑작스럽게 나온 배경은 뭘까. 바로 ‘닉슨독트린’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밀리던 미국이 아시아에서 경찰국가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것. 우방들은 각자 알아서 자국방위를 하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북한은 침묵으로 일관하다 이듬해인 1971년 6월 12일에 이르러서야 우리측 제안을 보란 듯이 거부했다.

그 사이 중앙정보부는 당시 강인덕 북한국장을 중심으로 8.15선언 후속조치로 남북이산가족상봉 문제를 선택해 비밀리에 연구에 몰두했다. 이번엔 이산가족문제를 8.15 기념식에서 제안하기로 했다. 인도적 차원의 카드를 꺼내들어야 하는 우리 측의 절박함이 감지된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하필이면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사전에 기사화 해 큰 파문을 일으키고 만 것. 북한이 문제를 삼기 전에 중앙정보부가 선수를 쳤고, 결국 예정보다 앞당겨 8.12일 당시 최두선 적십자사총재 명의로 대북이산가족상봉 제안을 했다.

1972년 11월 3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해 환영을 받는 남측 대표단(오른쪽부터 강인덕ㆍ최규하ㆍ이후락ㆍ장기영).

안타깝게도 이후 남북대화는 한 발짝도 변화가 없었다. 인도적 문제는 결국 정치적 협상 없이는 못 푼다며 북측이 완강했기 때문. 바로 김일성 식 대화기법이다. 당시는 김일성 주석이 큰 소리 칠만도 했다. 경제적으로 남한에 앞선 데다 ‘4대 군사노선’을 완성해 정립했고, 더구나 베트남전을 계기로 미국이 혈맹 남한과도 거리를 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부러울 게 없었던 북한이었다.

결국 북한의 요구대로 정치회담으로 바꿔 또 한해를 보낸 끝에 드디어 빗장이 풀렸다. 1972년 5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밀사로 평양을 전격 방문하고 이어 북측의 박성철 부수상이 답방형식으로 서울에 온 것. 돌아올 기약 없는 밀사의 교환이 있고서야 비로소 신뢰의 싹이 텄고, 남북대화의 초석인 ‘7.4남북공동성명’이 성사돼 오늘에 이렀다. 

회담 이튿날 남측 대표을 반갑게 맞이하는 북한 김일성 주석(악수하는 이가 강인덕 당시 북한과장, 김 주석 뒤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hchw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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