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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보뉴스에 갇힌 TV ‘집단 우울증’ 양상...방송의 기능은?
대한민국을 둘러싼 공기는 여전히 비통하다. TV 속 생방송 뉴스특보가 국민들의 가슴을 짓누르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다. 차디찬 수면 아래로 잠긴 어린 학생들의 생환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수차례의 고비를 맞으면서도 나아진 게 없는 후진국형 참사는 우리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어른들의 자괴감은 커져가는 때다. 오열하는 가족들, 시신으로 인양되는 실종자들의 참담한 현실에 기적의 끈도 느슨해진다.

충격과 분노, 슬픔…. 상처받은 국민의 마음은 어디서부터 어루만져야 할까. 치유는 어떻게 시작되어야 하나. 주요 예능 프로그램을 결방하고 뉴스특보 체제로 총력을 집중했던 방송사의 고민도 깊어져가고 있다. 방송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까지 닿아있는 고민들이다. 지상파 방송3사 편성팀 관계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진행하며 10여 차례 이상 편성표를 바꾸고 있다. 세월호 침몰 8일째, 방송 관계자들은 조심스럽게 방송이 ‘치유의 기능’을 해야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 방송3사 편성의 기준…드라마는 왜?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16일 이후 지상파 방송3사는 뉴스특보 체제로 전환해 사고현장에 집중했다. “국가적인 재난 사태에 웃고 떠들고 노래하는 프로그램의 방영을 자제하는 것이 옳다”는 내부 판단으로 내린 당연한 결정이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며 3사 편성에는 변화가 생겼다. 예능은 결방, 드라마는 방영이라는 틀을 세웠다. 지난 21, 22일 양일간 방송3사에선 오후 10시 월화드라마를 방송했다.

‘웃음’은 끊겼지만 ‘허구의 현실’은 계속됐다. SBS 편성팀 관계자는 “예능 프로그램이나 오락성이 강한 교양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이 실제 상황이라고 가정하고 보지만, 드라마의 경우 장르로 구현된 허구의 이야기라는 점을 시청자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편성을 용인했다”고 기준을 설명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해 한 방송사 관계자는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언급하며 “어린 학생들이 피해자가 된 참사이다 보니 예능 프로그램, 특히 코미디 프로그램의 경우 한 달간 결방이 예상된다”고 했다. 앞서 천안함 사건 당시 KBS2 ‘개그콘서트’는 5주간 결방했다. 현재 KBS의 경우 21일부터 한 주간 모든 예능 프로그램의 결방을 확정했으며, SBS는 같은 기간 일부 교양 성격이 짙은 예능 이외의 프로그램은 방영하지 않기로 했다. MBC는 22일 현재 주중(월~목) 예능프로그램의 경우 결방 원칙을 세웠으며, 다른 편성은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는 입장이다.

▶ 국민적 트라우마, 방송의 기능은?=국민들의 눈은 ‘뉴스특보’에 고정돼 있지만, 사고 후 계속된 현장 중계와 특보가 국민적 상흔을 더욱 깊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거듭 확인되는 최악의 연안여객운송시스템, 무능하고 부실한 관련 기관들의 재난방재대처, 국가 위기관리체제의 총체적 붕괴가 국민들에겐 자괴와 수치, 분노가 뒤엉킨 감정으로 되돌아왔다. 예기치 못한 참사로부터 그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는 공포도 키웠다. 전문의들은 국민들의 집단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염려되는 상황에서 연일 사고 소식만 보도하는 방송의 역할과 기능을 재고해야 한다고 신중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방송사에선 이미 시청자들의 편성 요청 전화도 받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의 홍보팀 관계자는 “매일같이 쏟아지는 뉴스특보에 시청자들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국민적 우울증세가 심화된 것 같다. 뉴스특보 이외의 프로그램들을 편성해달라는 민원전화도 들어온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방송사 관계자는 “현재 상황에서 정규 프로그램의 결방이 모든 시청자들의 통일된 의견은 아니다. 정규방송도 시청자와의 약속이다. 대한민국의 ‘집단 우울증’까지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24시간 뉴스특보 체제로만 운영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방송사 예능국의 한 PD도 “오락성이 강한 예능이야 지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웃음이 줄 순기능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언급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이미 현대인에게 TV는 생각의 전부를 보여주는 형태로 자리했고, 일정 부분 우리의 삶이 TV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다”며 “방송은 늘 살아있는 형태로 지속돼왔다. 국민감정과 정서에 따라 일정 기간 애도기간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치유의 개념으로의 방송이 유지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특히 “과거엔 예능을 오락이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웃음보다는 의미에 중점을 둔 방송이 많은 것은 물론 순수 예능 프로그램 자체에도 치유의 기능이 있다. 웃음 역시 힘든 현실에서 휴식을 준다는 의미가 있다”며 “일괄적인 결방이 유일한 해답인가에 대해선 의구심이 든다. 프로그램을 방영한다고 해서 애도의 분위기를 흐트러뜨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비단 예능 프로그램이 아닐 지라도 집단 트라우마에 빠진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할 대체 프로그램의 부재도 아쉽다. 시청률 지상주의에 휩싸여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만 제작해온 방송가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 평론가는 “예능 프로그램이 부적절하다 여긴다면 적합한 프로그램을 구성해야 한다. 선정적이지 않은 내용을 담으면서도 지나친 오락성이 배제돼 힐링을 줄 수 있는 다양한 폭의 프로그램이 있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안전지대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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