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특파원 칼럼 - 박영서> ‘거인’ 후야오방을 기억하라
중국 공산당은 개방·개혁 이후 경제개혁은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정치개혁은 거의 진행하지 않았다. 중국내 사회불안이 그치질 않고 갈수록 격화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래도 당 지도부 내에 소수이지만 진정한 정치개혁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있었다. 지난 15일 서거 25주년을 맞은 후야오방(胡耀邦)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후야오방은 정치개혁이 경제개혁과 함께 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청렴하고 진보적인 지도자였다.

1915년 후난(湖南)성 류양(柳陽)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대장정에 참가해 ‘꼬마 홍군(紅軍)전사’로 불렸다. 그러나 전사의 길은 순탄하지는 않았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노선을 지지하다가 당시 당권을 장악했던 친 소련 성향의 지도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가까스로 석방된 일도 있었고 군벌군에 잡혀 포로생활을 하다가 탈출한 이력도 있다. 신중국이 성립된 이후 지방의 당과 행정기관을 오가며 일했다. 산시(陝西)성 서기로 있을 때 밤낮없이 일하다 과로사할 뻔 했었다. 그때 ‘산시는 살이 쩠지만 후야오방은 살이 빠졌다’는 말이 생겼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개혁·개방적 성향의 그는 실각과 복권을 반복했다. 4인방이 체포되고 정계에 복귀한 그는 1982년 당 총서기에까지 올랐다.

그는 언론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초안을 계획했지만 1987년 보수파에 의해 실각됐다. 동유럽 대변동의 영향으로 발생한 학생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였다. 실의 속에 지내다가 2년 뒤인 1989년 4월 심장병으로 급서했다. 수많은 학생 시민들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다 결국 톈안먼 사태로 이어지게 됐다. 톈안먼 사태는 유혈참사로 막을 내렸고 이런 연유로 그는 ‘유혈폭동’의 배후자로 지금까지 금기시되어왔다.

톈안먼 사태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평가는 아직까지 달라지지 않고있다. 그러나 톈안먼 사태의 ‘도화선’ 후야오방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그것이 공식화된다면 거대한 변화의 조짐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은 지난 11일 후야오방의 생가와 기념관을 찾아 헌화했고 15일에는 홍콩 언론들이 일제히 후야오방을 기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중국 인터넷에는 개혁파 지식인들의 추모 글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일각에선 탄생 100년이 되는 내년에 그가 공식 복권될 것이란 전망도 내놓고있다. “당을 개혁하면 당이 무너지지만, 당을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후야오방이 생전 외쳤던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가 갈수록 높아지는 분위기다. 개혁파의 반격이 시작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후야오방의 부활이 ‘중국식’ 민주주의가 아닌 ‘진정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뤄낼 지 기대를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박영서 베이징 특파원 /py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