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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X파일] ‘상황’ 에 대해서 아십니까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상황 걸렸다”는 말은 주로 군 부대에서 쓰는 표현입니다. 상황이 걸리면 부대 지휘통제실에서 비상 명령을 내리게 되고 즉각 5분 대기조가 출동하게 되지요. 지통실이 임의로 가정한 상황에 따라 5분 대기조는 일사불란하게 현장으로 출동해 상황을 종료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군 부대가 아닌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도 ‘상황’이 종종 걸린다고 합니다. 어떤 내막일까요.

지난해까지 아파트 분양 시장에 찬 바람이 불면서 미분양 아파트가 속출했습니다. 최근 들어 부동산 시장에 훈풍이 불고는 있지만 여전히 잔여세대를 판매 중인 견본주택이 여러 곳입니다. 상황은 바로 이런 곳에서 걸립니다.

파리를 날리고 있는 미분양 아파트 견본주택에 손님이 ‘뜨면’ 이른바 상황이 걸립니다. 그 손님이 최대한 해당 아파트에 호의적인 시각을 갖도록 상황을 연출하는 겁니다.

미분양 아파트의 견본주택은 비교적 한산한 편입니다. 그러나 견본주택으로 문의전화가 걸려오면 곧바로 ‘도떼기 시장’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고 합니다.

한 아파트 견본주택에서 내방객이 단지 모형을 바라보고 있다.

전화가 오면 분양팀 중 한 명이 받습니다.

그러면 같은 분양팀의 한가한 다른 직원들이 일제히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질러댑니다. 마치 밀어닥치고 있는 고객들과 숨가쁘게 상담을 진행 중인 것처럼 보이려는 거지요. 고객이 수화기 너머로 북적이는 견본주택을 연상할 수 있도록 일종의 효과음을 내는 겁니다.

경력이 일천한 초보 분양팀 사원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한 광경입니다. 그렇다고 멀뚱멀뚱 지켜만 보고 있다가는 분양팀장한테 호된 꾸지람을 듣기 일쑤입니다. 이런 미분양 아파트 분양업은 계약건당 얼마의 성과급을 받는 체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한 건이라도 계약을 더 체결하는 것이 지상 과제인데 넌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는 거지요. 보다못해 일부 분양팀장들은 초보 사원들에게 상황이 걸릴 경우의 레파토리, 또는 일종의 매뉴얼을 메모지에 친히 적어주기도 한답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고객님. 아, 우리 단지에 관심이 많으세요? 지금 여기 상황은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계약자들이 계속해서 견본주택에 몰려들고 있고, 오시는 족족 계약서를 쓰고 계셔서 완판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어서 오세요.”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이렇게 전화로 응대하는 경우가 상황 1단계입니다.

2단계 상황은 전화를 걸었던 고객이 견본주택으로 직접 내왕하는 경웁니다. 이때는 군 부대와 마찬가지로 5분 대기조까지 투입됩니다. 분양팀 중 이 고객을 할당받은 담당사원이 고객을 상담석에 앉히고 상담을 벌이기 시작하면 당장 할 일이 없는 분양팀의 다른 직원들이 내방객으로 가장해 현장에 투입되는 겁니다.

이들은 진짜 고객 주변에 자리를 잡고 웅성웅성하는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이 아파트를 곧 계약할 것 같은 시늉을 하기도 합니다. 진짜 고객이 견본주택을 둘러본다며 자리를 뜨면 이들도 슬슬 따라나섭니다. 진짜 고객 주변을 맴돌면서 지속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거지요.

이들이 일부러 손님 행세를 하는지 알아채는 눈치빠른 고객들도 더러 있다고 합니다. 또 눈썰미가 뛰어난 고객들 일부는 견본주택을 두 세번 방문하면서 어느 날은 분양 직원으로, 어느 날은 손님으로 분하는 이들의 정체를 간파하기도 한답니다.

최대한 들키지 않기 위한 분양 직원들의 노력도 눈물겹습니다. 가족, 또는 부부로 가장하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계약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이런 ‘상황’에 대해 알지 못하는 외부인들이 우연찮게 ‘상황’을 목격하는 경우, 상당한 충격에 휩싸인다고 합니다.

한 분양 대행사 관계자는 “어느날 점심시간에 중국음식을 배달시켰는데 그때 마침 문의전화가 걸려와 본의 아니게 상황이 걸렸었다”며 “직원들이 음식을 받다말고 일제히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하자 중국음식점 배달원이 깜짝 놀라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며 멋적게 웃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우리 소비자들은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선, 계약 당사자들의 판별력이 중요해 보입니다. 아파트를 계약한다는 건 사실상 전 재산과 가까운 수억원의 상품을 구입한다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할 일입니다. 모든 상황을 곧이곧대로 믿고 섣불리 계약을 체결했다가 후회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지요.

soo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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