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적인 기타연주 ‘괜찮아 일어나’ 빠르고 강렬한 사운드 ‘진격의 망령’ 신곡 5곡 · 선공개 4곡 ‘호프’ 발매

“팬들의 오랜 기다림에 보답… 위축된 메탈, 다시 키워보고 싶다” 29일엔 앨범 발매 기념 콘서트

“깜빡이는 등을 켜고 어둠을 가로질러! 욕망을 두고 추억도 두고 저 도시를 떠나왔네!” 성큼 다가온 봄 햇볕과 겨울 끝자락에 남은 추위가 기싸움을 벌이던 날의 서울 양재동 한 연습실. 빠르게 연타하는 드럼 소리에 이어 강렬한 기타와 베이스 리프(짧은 마디를 되풀이하는 연주법)가 연습실 안을 가 득 채웠다. 연주하는 손놀림은 눈으로 쫓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날래고 힘찼지만, 표정만큼은 익숙하다는 듯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연주를 마친 이들은 잠시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다가 이내 다시 합주에 돌입했다‘. 한국 록의 자존심’ 밴드 블랙홀은 여전히 연습벌레였다.

오는 11일 블랙홀이 9년 만에 새 앨범 ‘호프(Hope)’를 발매한다. 블랙홀은 한국 헤비메탈 음악의 태동기인 지난 1985년에 결성돼 지금까지 정규 앨범 8장과 베스트 앨범, 싱글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블랙홀은 당대에 함께 무대에 섰던 시나위, 백두산, 부활 등과는 달리 단 한 번도 공백기 없이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온 한국 록 음악사의 유일한 밴드이기도 하다. 현재 리더 주상균(보컬ㆍ기타), 정병희(베이스), 이원재(기타), 이관욱(드럼) 등 현재 멤버들 역시 대부분 20년 이상 무대에서 호흡을 맞춰온 베테랑들이다.

주상균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팬들과 공연을 통해 만나 왔는데, 앨범을 내지 않아 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며 “9년 만의 새 앨범이지만 욕심을 부리기보다 담백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더 활발히 앨범을 발표할 계획이고 이번 앨범은 그 시작”이라고 밝혔다.

지난 1989년 첫 정규 앨범 ‘미러클(Miracle)’을 발표한 블랙홀은 수록곡 ‘깊은 밤의 서정곡’으로 록밴드로서는 이례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며 밴드의 이름을 세간에 각인시켰다. 서양의 록음악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 천착했던 다른 밴드들과는 달리 블랙홀은 한국적인 록이라는 새로운 음악의 틀을 제시해 주목을 받았다. 특히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동학농민운동 등 한국사의 각종 중요한 사건과 사회적인 부조리를 훑었던 1995년 작 정규 4집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는 록이라는 장르를 넘어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블랙홀은 2005년 작 정규 8집 ‘히어로(Hero)’로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앨범상, 최우수 록 싱글상을 수상하며 세월에 지지 않는 음악적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관욱은 “앨범을 오랫동안 발표하지 않고 공연 중심으로만 활동해 온 터라 밴드 대내외적으로 어수선한 부분이 많았다”며 “이번 앨범을 제작하며 그간의 어수선했던 부분을 정리하고 다시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번 앨범엔 ‘일어나 괜찮아’ ‘진격의 망령’ ‘그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 ‘단기 4252년 3월 1일’ ‘유니버스(Universe)’ 등 신곡 5곡과 ‘라이어(Liar)’ ‘이시아이시(E.C.I.C)’ ‘더 프레스 디프레스(The Press Depress)’ ‘사랑한다면’ 등 과거 디지털 싱글로 먼저 공개한 4곡을 포함해 총 9곡이 담겨 있다.

주상균은 “앨범의 곡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니 ‘희망’이라는 공통적인 주제로 엮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 온 사람들이 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고 노래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원재는 “그동안 디지털 싱글로 공개됐던 곡들이 마치 집 없이 떠도는 자식 같아 안타까웠다”며 “그 곡들이 앨범이라는 집을 찾았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덧붙였다.

9년만에 새 앨범…블랙홀, 한국록의‘희망’을 들려주마
오는 11일 블랙홀이 9년 만에 새 앨범 ‘호프(Hope)’를 발매한다. 블랙홀은 한국 헤비메탈 음악의 태동기인 지난 1985년에 결성돼 지금까지 정규 앨범 8장과 베스트 앨범, 싱글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9년 만에 새 앨범‘ 호프(Hope)’를 발매하는 록밴드 블랙홀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양재동의 한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병희(베이스), 이관욱(드럼), 주상균(보컬ㆍ기타), 이원재(기타). [사진제공=윈스토리]

‘괜찮아 일어나’는 3집의 수록곡 ‘날 그리는 바다’를 연상케 하는 몽환적인 기타 연주와 블랙홀 특유의 서정적인 가사가 인상적인 곡이다. ‘진격의 망령’은 블랙홀의 대표곡 ‘야간비행’을 연상케 하는 스피드와 강렬한 연주를 들려주는 곡으로 사회비판적인 가사와 유려한 멜로디가 돋보인다. ‘단기 4252년 3월 1일’은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2집의 ‘녹두꽃 필 때에’와 4집의 ‘잊혀진 전쟁’의 연장선상에 놓인 곡으로 3ㆍ1 운동을 재조명하는 가사가 눈길을 끈다. ‘유니버스(Universe)’는 기존의 블랙홀의 음악에선 들을 수 없었던 전자음을 전면에 내세운 곡으로 블랙홀의 음악적 변신을 알리고 있다. ‘그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는 블랙홀이 팬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곡으로 지난해 11월 50여명의 팬들이 함께 코러스 녹음에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주상균은 “이번 앨범의 가장 큰 음악적 변화는 곡들을 함축적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이라며 “연주를 결코 질질 끌지 않고도 짧은 시간에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집약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정병희는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앨범 제작에 매달렸다”며 “언제나 라이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블랙홀인 만큼 앨범 이상으로 좋은 무대로 팬들의 오랜 기다림에 보답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블랙홀은 오는 29일 오후 7시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K아트홀에서 앨범 발매 기념 콘서트를 벌일 예정이다.

주상균은 “이번 콘서트는 무대ㆍ관객ㆍ연주만으로 구성됐던 그간의 블랙홀의 콘서트에서 벗어나 다양한 조명, 동영상 등을 활용하는 종합적인 무대 연출을 시도할 계획”이라며 “최근 들어 헤비메탈 신이 많이 위축돼 있는데, 위축된 신을 우리가 나서서 다시 키워 보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정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