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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박수근 작품’ 의 가치를
격변기 질박한 서민의 삶
담담하고 진솔하게 담아내
60년대 20~50달러하던 그림
지금은 수억·수십억원 호가

진가 알아본 해외 수집가들
후원과 동시에 작품 사들여
세월지나 큰 수익으로 되돌아와
그림 보는 안목에 대한 보상



시골집 토담처럼 질박한 표면으로 1950~60년대 한국 서민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냈던 화가 박수근(1914~1965). 그의 그림은 언제 봐도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올해는 마침 이 국민화가의 탄생 100주년인 해다. 이를 기념해 그의 유화 90점과 수채화ㆍ드로잉 등 120여점이 관훈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전시되고 있다. 강원도 양구 깡촌 출신에,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인 이 서민적인 화가는 ‘그림값이 가장 비싼 작가’이기도 하다. 전시작의 총 작품가는 1200억원이 넘는다. 그의 유화 ‘빨래터’가 세운 경매 최고낙찰가 45억2000만원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50년 전만 해도 20~50달러에 불과했던 그의 그림은 도대체 왜 이렇게 비싼 것일까? ‘박수근 그림값의 진실’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격변기 우리네 삶을 진솔하게 담았기에 더 가치 있어=지금에야 ‘국민화가’로 불리지만 박수근은 살아생전 개인전 한 번 가져보지 못했던 불운한 화가다. 오산의 주한 미(美)공군사령부 도서관에서 1962년 약식으로 그림을 내건 게 전부다. 국전(國展)에서도 입상을 못하는 바람에 작가는 낙담한 나머지 폭음을 거듭했다. 간경화로 쉰하나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러나 과묵하고 성실했던 그는 선한 마음으로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매일매일 붓을 잡았다. 화강암처럼 우툴두툴한 화면에, 겨레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새겨넣었다. 그의 그림이 있었기에 우리는 50, 60년대 우리네 삶을 반추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박수근의 유화는 20~80달러에 불과했으나 국내팬들은 철저히 외면했고 미국인만 주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요즘 그의 그림은 수요가 많아 대작은 50억~80억원, 일부 대표작은 가격을 매기기 어려울 정도다. 사진은 1964년작‘ 귀로’. 16.4×34.6cm

삶과 예술이 일치했던 박수근의 인생역정은 급변하는 속도의 시대에 우리가 잃어선 안 될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운다. 그의 소박한 그림에서 숭고함이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적 아이콘’이기에 그의 작품을 수집하고자 하는 미술관이며 컬렉터가 많다. 작품값이 계속 상승하는 이유다.

하지만 생전에 작가는 그림이 안 팔려 늘 가난했다. 기껏해야 엽서, 공책 크기의 소품들이 한국을 찾았던 미군 등 외국인들의 기념품으로 팔렸을 뿐이다. 당시 국내 미술시장에선 동양화가들의 수묵산수화가 대세(?)였던 탓이다.

박수근은 작업실도 따로 없이, 창신동 집 대청마루에서 그림을 그렸다. 지금도 전해지는 흑백사진 속의 이 키 큰 작가는 대작들을 뒤로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소품들은 간간이 팔렸지만 대작은 1960년대 중반까지도 사겠다는 이들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그의 생계를 잇게 해준 이들은 몇몇 눈 밝은 미국 여성들이었다.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와 서정, 특이한 조형기법을 높게 평가한 이들이 그의 후원자였다.

특히 주한 미대사관 문정관의 부인이었던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er) 여사는 한국적 정서가 진득하게 배어 있는 박수근 그림을 각별히 좋아해 30여 점가량 수집했다. 박수근 그림의 최대 개인소장자였던 밀러 여사는 한국 근대기 미술시장의 ‘외국인 투자자 1호’였던 셈이다. 

어린 동생을 업은 소녀의 모습을 정겹게 그린 박수근의 1950년대 중반 작품(45×37cm) [사진제공=가나아트]

한국전쟁 이후 남편을 따라 서울에 와 있던 밀러 여사는 박수근의 그림들이 내걸려 있던 을지로 반도호텔(현 롯데백화점 자리) 내 반도화랑에 자주 들러, 박수근의 그림(유화)을 종종 샀다. 여사는 작가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자 주위 사람들에게도 작품 구입을 권했다.

1960년대 초까지도 그의 소품은 불과 20달러 선이었다. 서류가방에 쏙 들어가는 크기인 것도 한국 체류 기념으로 가져가기에 제격이었다. 조금 큰 작품도 50달러에 불과했다. 쌀 두세 가마니 값이면 박수근의 제대로 된 유화를 살 수 있었던 것. 요즘 박수근의 그림은 호당(엽서 크기) 2억~3억원, 중간 크기 작품이 30억~50억원을 호가하니 그 상승폭은 놀랍기 짝이 없다.

고국에 돌아가서도 밀러 여사는 매달 50달러, 100달러씩을 송금하며 박수근 작품을 지속적으로 수집했다. 박수근은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림값 50달러 대신 물감을 사서 보내 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만큼 국내에선 양질의 유화물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해지는 밀러 여사의 거실 사진에는 벽난로 위에 나란히 걸린 박수근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는 미국의 미술저널에 박수근을 소개했으며, 미국 미술관 전시 등에 출품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박수근의 대표적 구도를 보여주는 유화‘ 고목과 여인’(53×40cm). [사진제공=가나아트]

▶1960년대 초 20∼50달러였던 그림, 이제는 수억, 수십억원대=밀러 여사가 40, 50달러에 샀던 그림은 지난 2001년 국내 경매에선 5억원에, 2002년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선 7억5000만원에 팔린 바 있다. 물론 10여년이 지난 요즘은 이보다 가격이 더 높아졌다.

밀러 여사가 수집했던 그림은 이제 모두 한국으로 돌아왔다. 1979년, 박수근의 부인이었던 김복순 여사는 동숭동에서 두손갤러리를 운영했던 김양수 대표와 함께 미국으로 밀러 여사를 찾아갔다. 박수근 회고전을 열기 위해서였다. 그리곤 작품 30여점을 모두 인수했다.

그러나 당시 박수근 작품은 수요가 많아지며, 회고전이 개막되기도 전에 유력 컬렉터 등에 모두 팔리고 말았다. 그 전까지 300만원이었던 호당 가격도 600만~700만원으로 수직상승했다. 하룻밤 새에 두 배가 뛴 것이다. 주위에선 ‘너무 올린다’고 원성이 자자했다. 이후로도 박수근 작품 값은 매년 꾸준히 올라 현재 호당 2억~3억원대를 기록 중이다. 박수근 작품에 일찍 눈을 돌린 수집가로선 더없이 실속 있는 투자였던 셈이다.

그 후 밀러 여사의 수집품은 일부는 미술관에, 일부는 기업에, 일부는 개인으로 손바뀜이 됐다. 여사의 보유작은 경로가 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높게 평가되곤 한다. 


박수근의 또 다른 후원자로는 주한 외교관 부인들의 모임을 이끌었던 셀리아 짐머맨(Celia Zimmerman) 여사가 꼽힌다. 짐머맨 여사 또한 박수근 그림을 3, 4점 보유했다. 이 밖에 반도호텔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았던 존 탐(3점), 반도호텔 내에 사무실이 있었던 존 닉스(6점) 씨 등 박수근 작품 수집가는 10명 선으로 파악된다. 모두 미국인인 것이 공통점이다. 총 350여점으로 추산되는 박수근의 유화는 이제 20점 정도를 제외하곤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파악된다.

어떤 이들은 “박수근 작품 값이 그렇게 비쌀 필요가 있느냐?” “뉴욕경매에서 비싼 값에 되사오는 것은 결국 미국인들 좋은 일만 시키는 거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제 대접을 못 받았기에 박수근 그림은 해외로 유출됐던 것이다. 눈 밝은 컬렉터, 문화애호가들이 그의 그림이 좋아, 또는 작가를 후원하기 위해 작품을 사들였다가 이를 되팔아 큰돈을 벌었다면 이는 안목에 대한 대가이다. 자칫하면 소실될 수도 있었을 작품을 잘 보관해, 오늘로 전해지게 한 점도 평가받을 일이다.

우리 주식시장에서도 이제 외국인 투자자들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미술시장은 이미 50년 전부터 외국인 투자자들이 더 많았던 셈이다. 물론 요즘도 외국인들에게 더 잘 팔리는 우리 작가의 작품이 부지기수다. 글로벌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될성부를 새싹을 잘 찾아내, 이를 꾸준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작가의 성장을 함께 지켜볼 때 아트 컬렉션은 ‘뜻밖의 가치’를 불러올 수 있다. 단 미술 수집은 돈이 우선이 아니라, 작품에 주목하는 게 우선임은 동서고금 변치 않는 불문율이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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