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명의들 ⑫>“수술해봤자 실명?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건 차원이 다르죠”
순천향대학교병원 안과 이성진 교수


[헤럴드경제=김태열 차장]“닥터 리, 내 한쪽 눈이 캄캄하게 하나도 안 보여. 자네가 좀 봐주게.”

10여년 전 순천향대서울병원 안과 이성진 교수(49)에게 전설과도 같은, 같은 병원 외과 교수가 찾아왔다. “사자와 같은 거장 선생님과 이제 막 펠로(전임의)를 마친 병아리 안과 의사의 첫 만남이었죠. 긴장 속에서 눈을 이것저것 검사를 했더니 ‘황반변성’이었는데 그중에 가장 최악인 ‘출혈성 수포망막박리’인 거예요. 심한 출혈로 눈 속에 벽지처럼 발라져 있는 망막의 뒤쪽이 피로 꽉 차서 전부 불룩하게 떨어져버린 거죠.”

정밀한 수술이 필요했고, 결과도 장담할 수 없었다. “선생님, 저는 경험이 일천하니 제 스승님께 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교수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 교수는 “그냥 자네가 봐주게”라고 빙긋이 웃었다.

“그때 황반변성으로 인한 출혈성 수포망막박리 수술을 처음으로 하게 됐어요. 망막을 길게 절개하고 그 뒤쪽에 있는 피를 5시간에 걸쳐 뺀 후 실리콘 기름을 넣고 엎드리시게 했죠. 다행히 수술이 잘됐어요.”

이후 1년에 2~3명씩 ‘다른 병원에서 수술이 안 된다고 들었다’며 비슷한 분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결과를 장담 못해 욕만 안 먹어도 다행인 어려운 수술이었지만 이 교수는 이때부터 안과 의사로서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해봤자 결국 실명하는데 뭐 하러 수술을 하냐고들 하지만 수술을 안 하면 결국 결과는 100% 실명이거든요. 용기를 내서 비슷한 과정으로 적극적으로 수술을 했죠. 처음에는 시야가 완전히 캄캄하지만, 수술 후 조금씩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하고 사물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환자들이 있어요. 환자들이 느끼는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겠죠?

‘눈이 어느날부터 커튼이 처지듯이 서서히 안 보인다면 어떤 기분일까’ 시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비록 암처럼 생명을 빼앗는 질환은 아니지만 이에 못지않은 극도의 공포감과 상실감을 불러온다. 최근 모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개그맨 이휘재 씨는 “어느 날 녹화장에 갔는데 대본이 안 보였다”며 “황반변성을 앓고 있어 최악의 경우 실명인데 오른쪽 눈의 상태가 심각했다”고 밝혀 충격을 준 바 있다.

지난 2009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실명인구는 70여만명에 이른다. 2008년 보건복지부는 해마다 전국에서 시각장애인이 2만여명씩 증가하는 것으로 발표한 바 있다. 따라서 현재 국내 실명인구는 약 80만명이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이 중 망막 질환, 백내장 등에 의한 후천적 실명이 약 70% 이상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황반변성은 대부분 노화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청장년층에서도 발병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로 미국과 유럽의 실명 1위 질환이며, 우리나라 65세 이상 실명의 1위 질환이기도 하다. 


황반변성은 말 그대로 사물의 초점이 맺히는 부위, 즉 황반부에 변성이 생기는 질환이다. 황반은, 눈 속에는 벽지처럼 발라져 있는 ‘망막’이라고 하는 비닐 세 겹 정도의 얇은 필름의 중심부에 위치하는데 노화, 자외선, 흡연, 고콜레스테롤증, 비타민 부족 등의 원인으로 망막의 바닥에 찌꺼기를 만들게 되고, 이 찌꺼기들이 망막 뒤쪽에 있는 혈관(맥락막)으로부터 망막으로 영양이나 산소를 공급하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결국 망막에 산소 부족이 발생하면 맥락막으로부터 신생 혈관이 망막으로 자라 들어오게 되는데, 이 혈관은 매우 약한 임시 혈관이라서 쉽게 터진다. 결국 망막에 피가 얼룩지거나 망막 뒤에 피가 고이면서 망막의 기능이 사라진다.

황반변성의 가장 큰 문제는 근본적인 치료법이 없다는 것이다. “신생 혈관을 제거하기 위해 레이저 광응고술, 광역학 요법이 사용됐으며, 최근 신생 혈관 생성 단백질을 억제하는 항체를 눈 속에 주사하는 치료법이 사용되고 있지만 약효가 사라지면 신생 혈관은 다시 스멀스멀 기어나와요. 근본적인 완치는 없는 셈이죠.”

‘수포성 망막박리’의 경우 출혈이 너무 심해 망막 뒤에 피가 불룩하고 고이는, 최악의 형태다. 


“그냥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면 외과적인 수술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 수술은 환자도 힘들고 의사도 힘들어요. 의사는 4~5시간 동안 망막 뒤의 피떡을 제거하기 위한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하고 전신마취 하에서 수술받은 환자는 일주일 이상 엎드려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수술 후에도 큰 고통이 따르죠. 눈에 가스나 기름을 주입해 떨어진 벽지(망막)를 벽에 다시 붙여주기 때문에 그래요.”

사실 황반변성을 수술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도 있다. 어차피 실명으로 가는 건 같은데 시야를 좀 밝게 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혼자서 움직임이 가능하고 일상생활 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질을 다르게 만들어요.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는 것과 아예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죠.”

이런 믿음으로 이성진 교수는 10년째 많은 의사가 잘하지 않는 황반변성으로 인한 출혈성 수포망막박리 수술을 10년 이상 꾸준히 해오고 있고 최근엔 이러한 성과를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해 큰 주목도 받았다. 


이 교수의 노력은 오늘날 순천향대 서울병원 안과가 지난 10년간 매년 15% 성장을 해온 것에 맞물린다. 그만큼 많은 환자가 찾는다는 것이고, 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교수가 도입한 ‘온콜 시스템’은 심각한 안 질환 환자가 필요로 할 때 24시간 응급수술을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500여명의 망막박리 환자를 당일 응급으로 수술했다.

“힘들긴 하지만 실명의 위기에서 힘들어하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잠시라도 여유를 부릴 수 없어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그의 외래 진료는 오전 7시에 시작해서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다. 한 환자에게 최소한 5분 이상은 할애하겠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10년 전 자비를 털어 ‘망막이야기’라는 홈페이지를 만들고 전국의 망막 환자 2000여명을 온라인으로 상담도 해오고 있다. “실명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희망을 품게 해주는 일은 망막 의사로서 그 무엇보다 갚진 일이에요.”


/kt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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