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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의 숨소리를 거부하는 ‘둔황’
실크로드 1000년의 신비가 생생히
바람결에 슬피 우는 둔황의 밍사산
마르지 않는 ‘초승달 샘’ 장관이루고
붉은 노을에 잠시 ‘넋’을 내려 놓다

둔황의 애잔한 역사 깃든 ‘모가오쿠’
설법듣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왕…
타임머신을 타고 그들을 만나다

中 무서운 서부 대개발 바람타고
고속철도 건설 거대한 공사판 변신
둔황의 영화·신비감 사라질 위기에


[둔황=이해준 기자]
바람이 산을 움직이고 뜨거운 모래가 모든 사물을 집어삼키는 곳. 인간과 낙타가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문명이 만나던 곳. 그 역사마저 모래바람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800여 년 후 되살아난 신비와 환상의 땅.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오아시스 도시 둔황(敦煌). 동쪽으로는 고비 사막이, 서쪽으로는 죽음의 땅이라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이어지는 광활한 황무지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사막의 마을이라고 해서 사저우(沙州)라고도 불리었던 곳이다. 지금은 중국의 서부대개발과 관광객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지만, 역사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실크로드의 영화와 슬픔을 애잔하게 노래하고 있다.



슬프게 우는 모래산과 신비의 샘

란저우(蘭州)에서 자동차로 꼬박 이틀을 달려 둔황에 도착하니 마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이틀 동안 지긋지긋하게 본 황무지였지만, 곧장 밍사산(鳴沙山)으로 향했다. 노을에 물든 풍경이 환상이라니 놓칠 수가 없다. 입구에 이르자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쌍봉낙타가 과거 대상(隊商) 행렬을 연상시키듯 긴 대열을 이루며 지나간다. 그 뒤로 남북 20㎞, 동서 40㎞에 이르는 모래산이 첩첩이 이어진다. 란저우에서 시작한 치롄(祁連) 산맥도 여기에서 사막으로 변한다.

모래가 날리며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음악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낸다 하여 밍사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바람에 밀려 사막을 횡단해온 때문일까, 밍사산의 모래는 아주 곱다. 고운 모래가 거대한 산을 만들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신발이 푹푹 파묻힐 정도로 보드랍다. 헉헉거리며 오르다 아예 신발을 벗는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간지럽게 스치고, 발가락이 숨을 쉰다.

마침 해가 서녘으로 넘어가며 붉은 노을을 토해내자 끝없이 이어진 모래산이 온통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밍사산 중턱으로 올라가자 저 아래에 초승달 모양의 웨야취안(月牙泉)이 석양을 반사하며 선명하게 빛난다. 연간 강수량 39㎜, 증발량 2800㎜의 메마른 땅에서도 수천 년 동안 마르지 않은 신비의 샘이다. 사막을 건너온 사람과 낙타의 타들어가는 목을 적셔주던 생명의 오아시스. 지금은 무분별한 농지 개발과 고비 사막 확대로 수량이 줄어들어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니 초승달 샘이 더 애처롭다.

둔황의 역사는 실크로드의 역사다. 실크로드는 기원전 100년경 한나라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이 사신으로 서역을 다녀온 후 길이 트이기 시작해 당나라 때인 7~8세기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둔황엔 최대 3만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중국의 한족은 물론 위구르(이슬람), 돌궐, 티베트, 서하, 멀리 고구려 유민까지 어울린 국제 무역도시, 세계화의 원조였다. 중국의 비단이 타클라마칸 사막과 톈산 산맥, 중앙아 초원을 넘어 유럽으로 전해졌다. 당나라의 현장, 신라의 혜초, 이탈리아의 마르코폴로도 이곳을 지났다. 하지만 12세기 십자군전쟁과 오스만투르크의 중앙아시아 장악으로 실크로드가 끊기면서 둔황도 쇠락한다. 사막을 건너던 대상행렬이 사라지면서 상인과 학자, 무사, 승려, 무희도 하나씩 떠나 이곳도 작고 평범한 오아시스 마을로 되돌아갔다. 무상한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붉게 물들었던 밍사산과 웨야취안에 어둠이 내리고, 낙타가 푸르르르 콧김을 내뿜으며 달을 맞는다.

예전에는 실크로드를 지나는 대상과 비단을 실어날랐을 쌍봉낙타들이 모래가 우는 산, 밍사산 앞의 모래벌판을 지나고 있다. 뒤에 펼쳐진 밍사산은 둔황 시내에서 남쪽으로 5㎞ 정도 떨어진 지점부터 남북으로 20㎞, 동서로 40㎞에 이르는 거대한 산이다. 아주 고운 모래로 이루어져 발이 푹푹 빠진다. 밍사산 골짜기를 지나면 수천 년 동안 마르지 않은 초승달 모양의 웨야취안이 자리 잡아 석양이 질 때 밍사산의 모래와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실크로드의 슬픔이 깃든 불상의 아파트=둔황의 애잔한 역사를 잘 보여주는 곳은 모가오쿠(莫高窟ㆍ막고굴)이다. 둔황 석굴이라고도 불리는 모가오쿠는 둔황시 남동쪽 25㎞ 지점의 단애를 이룬 석산에 자리 잡고 있다. 석굴 앞으로는 메마른 강이 흐르고, 깎아지른 절벽 위는 모래로 덮여 있다. 그 모래는 사막으로 이어진다. 벌집처럼 석굴을 뚫고 화려한 벽화와 불상으로 장식한 불상의 아파트다.

역사적ㆍ문화적 가치가 워낙 커 관람객을 가장 철저하게 통제하는 곳이다. 예약을 받아 가이드와 함께 1시간 동안 8~10개 석굴을 돌아보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와 함께 뜯어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리신(李新) 둔황연구원 연구원은 “건조한 기후로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지만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와 수증기로 수십 년 후에는 지금의 색깔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모가오쿠는 16국시대인 366년 낙준(樂樽)이라는 승려가 석산 위에 홀연히 나타난 금빛 불상을 보고 만들기 시작해 14세기까지 거의 1000년 동안 조성됐다. 1.7㎞에 걸쳐 735개의 석굴이 만들어졌으며, 이 가운데 492개가 보존돼 있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 232개, 수나라 때 79개, 서하 때 64개 등으로 당나라 석굴이 가장 많다. 당 현종 때에는 17개의 사찰에 승려도 1000명을 넘었다.

모가오쿠로 들어가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000여 년 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벽과 천장을 가득 메운 벽화들은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 경제 교류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당나라 중기 벽화(237호굴)엔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토번(티베트)왕을 따라 부처의 설법을 듣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왕 모습이 선명했다. 송나라 초기의 벽화(61호굴)엔 신라와 고려의 사신도도 발견됐다.

모가오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17호굴이다. 완벽하게 보존된 고대의 불교 경전과 법령 등 엄청난 자료가 쏟아져 세상을 놀라게 한 곳이다. 17호굴은 모가오쿠에서 가장 큰 16호굴 입구 오른쪽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만한 구멍 안의 작은 굴이었다.

12세기 실크로드의 퇴조와 함께 모래와 먼지에 덮였던 모가오쿠가 다시 세상의 관심을 끈 것은 800여 년 지난 1900년대 초다. 당시 석굴을 관리하던 왕위안루(王圓菉)라는 노인이 16호굴 입구의 모래를 치우다 우연히 작은 굴(17호굴)을 발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왕 노인이 보기에 낡고 쓸모없는 서책이 천장까지 까마득했다. 하지만 1907년 영국인 스타인이 왕 노인에게는 큰돈, 자신에게는 푼돈을 지불하고 1만여 점을 낙타와 수레에 싣고 사라졌다. 다음 해에는 프랑스인이, 이어 러시아와 일본인이 와서 또 가져갔다. 미국인은 벽화를 뜯어가기까지 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여기서 발견돼 지금은 프랑스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혼란기에 있던 중국은 나중에야 그 가치를 알고 보호에 나섰다. 서책의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였지만, 온전히 보존된 불상과 벽화도 많았다. 입구 전체를 보강해 일일이 문을 만들어 달고, 나무로 만들어졌던 난간과 계단도 시멘트로 대체했다. 하지만 관광객의 물결로 모가오쿠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서린 비애와 안타까움이 둔황을 더 애잔하게 만든다.


▶둔황으로 가는 길=둔황을 여행하려면 동쪽 란저우나 서쪽 우루무치를 경유해야 한다. 대한항공과 중국동방항공이 이들 도시로 가는 전세기를 운항하고 있다. 5월부터 10월 초까지 운항한다. 란저우나 우루무치에서 둔황까지는 각각 1200㎞가 넘는다. 자동차로 최소 이틀에 걸쳐 달리거나, 15~16시간 소요되는 야간열차를 타야 한다. 하나투어가 관련 상품을 판매 중이다.

란저우에서 둔황을 잇는 띠처럼 이어진 지역이 허시쩌우랑(河西走廊)이다.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이라고도 한다. 남쪽엔 평균 해발 4000m의 치롄 산맥이 가로막고, 반대편은 끝없는 사막이다. 설산이 녹아 흘러내린 물이 귀중한 경작지를 제공해 실크로드가 형성됐다. 중국 쪽 실크로드라 할 수 있는 이 길을 달리는 것은 또다른 맛을 선사한다. 최소한 이틀, 좀 넉넉히 보려면 4~5일은 잡아야 한다.

란저우에서 출발하면 우웨이(武威), 장예(張掖), 주취안(酒泉)을 차례로 거친다. 도시 사이의 거리가 250~300㎞에 달해 이틀 동안 달리기도 만만치 않다. 처음에는 옥수수와 밀, 감자, 콩 등의 경작지가 무성하지만 점점 줄어들어 주취안을 지나면 거의 사막으로 변한다. 하지만 척박한 환경을 일구어온 사람들의 흔적과, 주변 소수민족이 격돌하던 역사의 현장이 곳곳에 박혀 있다.

밍사산에서 웨야취안을 내려다 보는 관광객들. 양관에 있는 실크로드 개척자 장건의 동상. 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인 자위관. 4~14세기까지 1000년 동안 만들어진 불상의 아파트 모가오쿠.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란저우의 황허(黃河), 장예의 완포쓰(萬佛寺)와 치차이산(七彩山), 주취안을 지나면 나오는 자위관(嘉浴關)이다. 란저우는 칭하이(靑海)성에서 발원한 황허가 처음 만나는 대도시로, 황토고원을 거치며 누런 격류로 변해 란저우를 관통한다. 칠채산은 장예 외곽의 무지갯빛 산으로, 산에 물감을 뿌려놓은 듯, 그 물감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이다. 가까이 보면 황토와 사암으로 돼 있다. 광물질을 함유한 지층이 오랜 세월 풍화하며 빚어낸 최고의 예술품이다. 자위관은 명나라 때 건설된 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이다. 발해만의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출발해 중국 북부 산악지대를 관통, 2700㎞를 달려온 천하제일웅관이 사막 위에 우뚝 서 장관을 이룬다.

란저우에서 달려온 실크로드는 둔황에서 북로와 남로로 갈라진다. 북로의 관문이 위먼관(玉門關), 남로의 관문이 양관(陽關)이다. 둔황시에서 80~100㎞ 떨어진 오아시스에 건설된 이들 관문을 지나면 타들어가는 사막이 기다리고 있다.

둔황은 역사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지만 위태로운 곳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가 서부대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철광석 등 자원이 대거 발견되면서 개발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5년 후에는 고속철도가 란저우~둔황을 5~6시간에 주파하게 된다. 허시쩌우랑 역시 거대한 공사판으로 바뀌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실크로드의 낭만과 신비를 느낄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둔황=이해준 문화부장/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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