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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둔황...실크로드의 신비와 애수를 간직한 오아시스
바람이 산을 움직이고 뜨거운 모래가 모든 사물을 집어삼키는 곳. 인간과 낙타가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문명이 만나던 곳. 그 역사마저 모래바람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800여 년 후 되살아난 신비와 환상의 땅.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오아시스 도시 둔황(敦煌). 동쪽으로는 고비사막이, 서쪽으로는 죽음의 땅이라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이어지는 광활한 황무지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사막의 마을이라고 해서 사주(沙州)라고도 불리웠던 곳이다. 지금은 중국의 서부대개발과 관광객의 물결에 휩쓸려들어가고 있지만, 역사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실크로드의 영화와 슬픔을 애잔하게 노래하고 있다.

▶슬프게 우는 모래산과 신비의 샘=란저우(蘭州)에서 자동차로 꼬박 이틀을 달려 둔황에 도착하니 마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이틀 동안 지긋지긋하게 본 황무지였지만, 곧장 밍샤산(鳴沙山)으로 향했다. 노을에 물든 풍경이 환상이라니 놓칠 수가 없다. 입구에 이르자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쌍봉낙타가 과거 대상(隊商) 행렬을 연상시키듯 긴 대열을 이루며 지나간다. 그 뒤로 남북 20km, 동서 40km에 이르는 모래산이 첩첩이 이어진다. 란저우에서 시작한 치롄산맥(祁連山脈)도 여기에서 사막으로 변한다.

모래가 날리면 사람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음악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내 밍샤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래산으로 해가 넘어가면서 사방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아래쪽엔 수천년 동안 마르지 않은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이 석양을 반사하고 있다.

모래가 날리며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음악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낸다 하여 밍샤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바람에 밀려 사막을 횡단해온 때문일까, 밍샤산의 모래는 아주 곱다. 고운 모래가 거대한 산을 만들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신발이 푹푹 파묻힐 정도로 보드랍다. 헉헉 거리며 오르다 아예 신발을 벗는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간지럽게 스치고, 발가락이 숨을 쉰다.

마침 해가 서녘으로 넘어가며 붉은 노을을 토해내자 끝없이 이어진 모래산이 온통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밍샤산 중턱으로 올라가자 저 아래에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月牙泉)이 석양을 반사하며 선명하게 빛난다. 연간 강수량이 39mm, 증발량이 2800mm의 메마른 땅에서도 수천년 동안 마르지 않은 신비의 샘이다. 사막을 건너온 사람과 낙타의 타들어가던 목을 적셔주던 생명의 오아시스. 지금은 무분별한 농지개발과 고비사막 확대로 수량이 줄어들어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니 초승달 샘이 더 애처롭다.
 
바람에 밀려온 모래가 칼날 같은 능선을 형성한 밍샤산이 석양을 받아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밍샤산의 모래는 아주 고와 이곳을 한 번 다녀가면 몇 년 동안 신발에서 모래가 나올 지경이라고 한다.

둔황의 역사는 실크로드의 역사다. 실크로드는 개원전 100년 경 한나라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이 사신으로 서역을 다녀온 후 길이 트이기 시작해 당나라 때인 7~8세기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둔황엔 최대 3만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중국의 한족은 물론 위구르(이슬람), 돌궐, 티벳, 서하, 멀리 고구려 유민까지 어울린 국제무역도시, 세계화의 원조였다. 중국의 비단이 타클라마칸사막과 텐산산맥, 중앙아 초원을 넘어 유럽으로 전해졌다. 당나라의 현장, 신라의 혜초, 이탈리아의 마르코폴로도 이곳을 지났다.

하지만 12세기 십자군전쟁과 오스만투르크의 중앙아시아 장악으로 실크로드가 끊기면서 둔황도 쇠락한다. 사막을 건너던 대상행렬이 사라지면서 상인과 학자, 무사, 승려, 무희도 하나씩 떠나 이곳도 작고 평범한 오아시스 마을로 되돌아갔다. 무상한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붉게 물들었던 밍샤산과 월아천에 어둠이 내리고, 낙타가 푸르르르 콧김을 내뿜으며 달을 맞는다.

선녀가 흘린 눈물로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

▶실클로드의 슬픔이 깃든 불상의 아파트=둔황의 애잔한 역사를 잘 보여주는 곳은 막고굴(莫高窟)이다. 둔황석굴이라고도 불리는 막고굴은 둔황시 남동쪽 25km 지점의 단애를 이룬 석산에 자리잡고 있다. 석굴 앞으로는 메마른 강이 흐르고, 깎아지른 절벽 위는 모래로 덮여 있다. 그 모래는 사막으로 이어진다. 벌집처럼 석굴을 뚫고 화려한 벽화와 불상으로 장식한 불상의 아파트다.

역사적ㆍ문화적 가치가 워낙 커 관람객을 가장 철저하게 통제하는 곳이다. 예약을 받아 가이드와 함께 1시간 동안 8~10개 석굴을 돌아보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와 함께 뜯어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리신(李新) 둔황연구원 연구원은 “건조한 기후로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지만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와 수증기로 년 후에는 지금의 색깔을 보지 못할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막고굴은 16국시대인 366년 낙준(樂樽)이라는 승려가 석산 위에 홀연히 나타난 금빛 불상을 보고 만들기 시작해 14세기까지 거의 1000년 동안 조성됐다. 1.7km에 걸쳐 735개의 석굴이 만들어졌으며, 이 가운데 492개가 보존돼 있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 232개, 수나라가 79개, 서하가 64개 등으로 당나라 석굴이 가장 많다. 당 현종 때에는 17개의 사찰에 승려도 1000명을 넘었다.

밍샤산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쌍봉낙타가 과거 사막을 지나던 대상 행렬을 연상시킨다.

막고굴로 들어가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000여년 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벽과 천장을 가득 메운 벽화들은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 경제 교류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당나라 중기 벽화(237호굴)엔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토번(티벳)왕을 따라 부처의 설법을 듣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왕 모습이 선명했다. 송나라 초기의 벽화(61호굴)엔 신라와 고려의 사신도도 발견됐다.

막고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17호굴이다. 완벽하게 보존된 고대의 불교 경전과 법령 등 엄청난 자료가 쏟아져 세상을 놀라게 한 곳이다. 17호굴은 막고굴에서 가장 큰 16호굴 입구 오른쪽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만한 구멍 안의 작은 굴이었다.

12세기 실크로드의 퇴조와 함께 모래와 먼지에 덮였던 막고굴이 다시 세상의 관심을 끈 것은 800여년 지난 1900년대 초다. 당시 석굴을 관리하던 왕원록(王圓菉)이라는 노인이 16호굴 입구의 모래를 치우다 우연히 작은 굴(17호굴)을 발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왕 노인이 보기에 낡고 쓸모없는 서책이 천장까지 까마득했다. 하지만 1907년 영국인 스타인이 왕 노인에게는 큰 돈, 스타인에게는 푼돈을 지불하고 1만여 점을 낙타와 수레에 싣고 사라졌다. 다음해에는 프랑스인이, 이어 러시아와 일본인이 와서 또 가져갔다. 미국인은 벽화를 뜯어가기까지 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여기서 발견돼 지금은 프랑스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혼란기에 있던 중국은 나중에야 그 가치를 알고 보호에 나섰다. 서책의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였지만, 온전히 보존된 불상과 벽화도 많았다. 입구 전체를 보강해 일일이 문을 만들어 달고, 나무로 만들어졌던 난간과 계단도 시멘트로 대체했다. 하지만 관광객의 물결로 막고굴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서린 비애와 안타까움이 둔황을 더 애잔하게 만든다.

둔황석굴이라고도 부르는 막고굴. 4~14세기까지 1000년동안 만들어진 석굴로, 불상의 아파트다.

▶둔황으로 가는 길=둔황을 여행하려면 동쪽 란저우나 서쪽 우루무치를 경유해야 한다. 대한항공과 중국동방항공이 이들 도시로 가는 전세기를 운항하고 있다. 5월부터 10월 초까지 운항한다. 란저우나 우루무치에서 둔황까지는 각각 1200km가 넘는다. 자동차로 최소 이틀에 걸쳐 달리거나, 15~16시간 소요되는 야간열차를 타야 한다. 하나투어가 관련 상품을 판매중이다.

란저우에서 둔황을 잇는 띠처럼 이어진 지역이 하서주랑(河西走廊)이다. 하서회랑이라고도 한다. 남쪽엔 평균 해발 4000m의 치롄산맥이 가로막고, 반대편은 끝없는 사막이다. 설산이 녹아 흘러내린 물이 귀중한 경작지를 제공해 실크로드가 형성됐다. 중국쪽 실크로드라 할 수 있는 이 길을 달리는 것은 또다른 맛을 선사한다. 최소한 이틀, 좀 넉넉히 보려면 4~5일은 잡아야 한다.

란저우에서 출발하면 무웨이(武威), 장예(張液), 주취안(酒泉)을 차례로 거친다. 도시 사이의 거리가 250~300km에 달해 이틀 동안 달리기도 만만치 않다. 처음에는 옥수수와 밀, 감자, 콩 등의 경작지가 무성하지만 점점 줄어들어 주취안을 지나면 거의 사막으로 변한다. 하지만 척박한 환경을 일구어온 사람들의 흔적과, 주변 소수민족이 격돌하던 역사의 현장이 곳곳에 박혀 있다.

장예 외곽의 무지개빛 칠채산. 산에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환상적인 정취를 제공한다.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란저우의 황허(黃河), 장예의 만불사와 칠채산, 주취안을 지나면 나오는 자위관(가욕관)이다. 란저우는 칭하이성에서 발원한 황허가 처음 만나는 대도시로, 황토고원을 거치며 누런 격류로 변해 란저우를 관통한다. 칠채산은 장예 외곽의 무지개빛 산으로, 산에 물감을 뿌려놓은 듯, 그 물감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이다. 가까이 보면 황토와 사암으로 돼 있다. 광물질을 함유한 지층이 오랜 세월 풍화하며 빚어낸 최고의 예술품이다. 자위관은 명나라 때 건설된 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이다. 발해만의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출발해 중국 북부 산악지대를 관통, 2700km를 달려온 천하제일웅관이 사막 위에 우뚝 서 장관을 이룬다.

란저우에서 달려온 실크로드는 둔황에서 북로와 남로로 갈라진다. 북로의 관문이 옥문관(玉門關), 남로의 관문이 양관(陽關)이다. 둔황시에서 80~100km 떨어진 오아시스에 건설된 이들 관문을 지나면 타들어가는 사막이 기다리고 있다.

둔황은 역사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지만 위태로운 곳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가 서부대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철광석 등 자원이 대거 발견되면서 개발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5년 후에는 고속철도가 란저우~둔황을 5~6시간에 주파하게 된다. 하서주랑 역시 거대한 공사판으로 바뀌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실크로드의 낭만과 신비를 느낄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둔황=이해준 문화부장/hjlee@heraldcorp.com

사진=이해준 문화부장

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인 자위관. 자위관을 지나면 천연 방어막인 사막이 펼쳐진다.

둔황에서 서역남로로 이어지는 양관. 사막 언덕에 전시된 수레가 실크로드의 험난한 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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