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광주비엔날레,두리반에서 역사와 인간을 돌아본다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바람이 한결 선선해진 9월. 광주시 서구문화센터 전광판에선 광고와 뉴스 사이에 ‘고문은 잔인하다’ ‘Fear is..’같은 한글과 영문 텍스트들이 흘러 나온다. 미국 작가 제니 홀저가 2012광주비엔날레를 위해 제작한 ‘광주를 위하여’란 작품이다. 이 디지털 비디오를 통해 홀저는 아픈 역사를 겪은 도시를 조용히 어루만지고 있다.

광주시 치평동의 사찰 무각사(無覺寺)에선 한국 작가 우순옥이 2층의 작은 방 여덟 곳에, 여덟가지 빛깔의 조명을 2분40초 간격으로 바꿔가며 빛의 연주를 펼치고 있다. ‘아주 작은 집-무각사, 색들의 방’이란 이름의 이 오묘한 조명작업은 8개의 방으로 통하는 창문이 스크린이 되어 그 위로 마치 빛이 호흡을 하듯 8가지 색들이 서서히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무수히 피어오르는 색들은 마치 시간이 겹겹이 솟아올랐다 사라지는 듯 하며 거대한 하나의 순환적 텍스트를 이룬다. 

우순옥의 빛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문화관 2층의 중앙 마루에는 독일 작가 볼프강 라이프가 절에서 재배한 쌀과 노란 꽃가루로 작은 산들을 쌓아올렸다. 의사 출신으로 인도의 브라만 철학에 매료돼 독일과 인도를 오가며 작업하는 그는 쌀로 된 작은 더미들을 무수히 쌓아올림으로써 우주와 소우주(개인)를 만들었다. 여기서 쌀과 꽃가루는 생명과 재생을 은유한다.

‘2012광주비엔날레’가 7일 대장정에 돌입했다. 올해로 9회째를 맞는 이 행사는 오는 11월11일까지 전세계 42개국의 작가 92명(팀)이 총 303점(개별작품으론 150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 가운데 60%가 비엔날레를 위해 새로 제작된 신작이다. 


▶두리반(둥근 밥상)에 모여 앉아 집단과 개인, 역사와 삶 돌아보기=‘라운드테이블(원탁)’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올 광주비엔날레는 김선정 예술종합학교 교수, 마미 카타오카 모리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와싼 알-쿠다이라 아랍근대미술관 초대관장 등 아시아의 여성 큐레이터 6명이 전시를 꾸몄다. 이들 공동감독들은 각기 ‘역사의 재고찰’ ‘친밀성 자율성 익명성’ ‘집단성의 로그인,로그아웃’ 등 6개의 소주제를 내걸고 광주비엔날레를 이끌었다. 다양한 지역의 역사와 활동을 가로지르며, 각 공동체와 다양한 맥락의 소속감을 성찰한 이들이 도출해낸 결과는 따라서 하나의 관점으로 귀결되진 않는다.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지적과 함께 일각에서 ‘산만하고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선정 감독은 “6명이 공동감독이 됐을 때부터 예상했던 비판이다. 라운드테이블은 다양한 안건들을 상정해 의견을 나누는, 여럿이 둘러앉아 밥을 나눠먹는 한국의 ‘두리반’과 같은 맥락으로, 대안적 형태의 전시를 지향했다”고 했다. 이어 “이번 비엔날레는 정치적 평등성과 독자성에 관해 다양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며, 정보사회가 가져온 동질화의 문제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 곳곳의 상황을 반영하는 다양한 담론들이 시각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올 비엔날레는 하나의 접점으로 좁혀지기 보다는, 여러 갈래로 분화하면서 전지구적, 특히 아시아의 문화생산을 위한 수평적 교환의 장이 되고 있다. 또 전체 출품작 중 절반 가까이가 아시아및 아랍권 작가의 작품이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현대미술제로서 그 성격을 공고히 했다. 특히 광주의 비극적 역사, 장소성 등을 고찰한 작업들이 여럿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마이클 주는 시위현장에서 경찰이 쓰는 투명방패 108개를 기와처럼 이어 기다란 투명 지붕을 드리웠다. 그리곤 그 아래로 작가가 늘 사용하는 일상용품을 점토로 빚어 줄줄이 매달았다. 작품명은 ‘분할불가’. 원래 호신용으로 쓰였으나 근래엔 시위진압용으로 쓰이는 경찰의 ‘방패’가, 유적지처럼 보이는 도시를 막아주는 형상이다. 유물처럼 보이는 개인 용품은 익명성을 드러내며 무명의 개인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서도호는 광주 구도심에 남아 있는 흔적들에 주목해 이를 탁본으로 떴다. 관람객들에게도 탁본을 뜨게 했다. 그리곤 이 탁본들로 집을 꾸밈으로써 광주만의 역사성을 되돌아보는 ‘탁본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이처럼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공간에 남겨진 흔적을 되새겨냄으로써 집단 속 개인의 흔적이나 경험을 보여주는 동시에, 공간의 문제도 조명하고 있는 것. 


서도호는 또 광주폴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틈새호텔’도 선보였다. 트럭 내부엔 새하얀 시트가 깔린 1인용 침대와 선반, 세면대에 커피포트와 헤어드라이어까지 갖췄다. 가죽으로 우아하게 마무리해 럭셔리하기까지 한 이 움직이는 호텔은 광주 곳곳의 틈새에 스며들어, 광주를 찾는 투숙객에게 특별한 밤을 선사하게 된다. 

총기류를 폐기하고 남은 고철로 악기를 만든 작가도 있다. 멕시코 작가 페드로 레예스는 살상무기였던 총기를 악기로 변형시킨 ‘이매진(Imagine)’을 통해 무기 제조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작가는 “군수산업이 죽음과 고통을 야기하고 있다”며 “이제는 전세계에서 무기 생산을 중단해야 한다. 물론 당장 실현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일을 자꾸 상상해야 실현될 것”이라고 했다.

올 비엔날레는 개인의 경험과 실존에 촛점을 맞춘 작업도 여럿이다. 김수자의 영상작업이 좋은 예다. 비엔날레 주전시관 구석의 어두운 방에서 김수자는 31분짜리 신작 ‘앨범;허드슨 길드’를 선보이고 있다. 

뇌를 다쳐 기억을 잃어가던 아버지(작고)와 함께 했던 특별했던 순간을 추억하며 작가는 뉴욕의 이주민 출신 60-80대 노인들을 촬영했다. 허드슨 길드는 노인들의 사회 참여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곳이다.

수직으로 프레임된 익명의 초상들은 뒤돌아 서있다가 ‘피터’ ‘스티브’ ‘마리나’하며 작가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응시한다. 어떤 이는 화들짝 놀라며, 어떤 이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저마다 다른 ‘응시의 방식’을 보여준다. 김수자는 그 모습에서 그들의 심리상태와 삶의 궤적을 포착해내며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영원’을 보여주는 영상은 보는 이의 심상에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잔상을 남긴다.

▶사찰, 낡은 극장, 시장까지 전시공간 확대=올 광주비엔날레는 본 전시관 외에 도심 사찰, 낡은 극장, 재래시장, 생태습지 등으로 전시공간을 확장했다. 따라서 비엔날레를 제대로 즐기려면 적어도 이틀은 할애해야 한다.

야외작업도 여럿 볼 수 있다. 비엔날레 전시관 광장에는 번쩍이는 거울로 만든 탁구대 14개가 놓여 있다. 아르헨티나 작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는 시민 누구나 이 탁구대에서 탁구를 칠 수 있게 했다. 단 물음표가 그려진 흰 티셔츠를 입고 쳐야 한다. 네트로 나뉜 탁구대는 분단 한국을, 공격과 수비는 냉전시대의 민족주의를 상징한다. 그러나 정작 거울에 비치는 것은 광주의 푸른 하늘과, 탁구를 즐기는 시민들의 신명나는 모습이다.

또 매일밤 비엔날레 전시관 야외광장과 건물 외벽에는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의 ‘언어 프로젝션’(Word Projection)이 투영되고 있다. 아직도 출국금지 상태인 아이웨이웨이는 소셜미디어와 비디오 영상을 통해 이번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1930년대에 지어진 광주극장과 사택에는 공간적 특성을 살려 광주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녹여낸 작업이 관람객을 맞는다. 마그누스 뱃토스(작가이자 저술가)는 광주극장에서 ‘스벤손 일대기 생중계’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작고한 친구 스벤손의 삶을 무성영화로 만들고, 변사의 내레이션을 더해 광주극장에서 상영하는 광경을 비디오로 담아 보여주는 이색적인 작업이다.

멕시코 출신의 조각가로 올해 양현재단이 수여하는 양현미술상을 수상한 아브라함 크루스비예가스는 낡은 광주극장 사택에서 3주간 거주하며 지금은 용도폐기된 공간에서 나온 잡동사니들로 공간을 재구성해, 생활과 경험이 연계된 예술적 실험을 시도했다. 


한편 광주시립미술관에서는 중국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을 모은 특별전인 ‘Ctrl+N : 비선형적 실행’전이 열리고 있다. 한중수교 20주년및 광주시립미술관 개관 20주년을 기념하는 이 전시에는 구원다(Gu Wenda), 인시우젼(YIN XIUZHEN) 등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15명의 작품 40여점이 내걸렸다. 

2012 광주비엔날레 입장료는 성인 1만4000원(예매 1만1000원), 청소년 6000원(예매 4000원)이며 한장의 티켓으로 모든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비엔날레 측은 비엔날레 정문-무각사-광천터미널-광주역-대한지적공사-비엔날레 정문을 오가는 셔틀버스도 운행한다. 062)608-4114 

/yr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