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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읽기 - 이은형> 부부싸움도 신고합시다
가정폭력도 심각한 상황
‘남의 집 일’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 팽배
목숨까지 앗아가는 결과



여학생들이 모여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무슨 얘기를 그리 심각하게 하냐고 했더니 ‘수원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란다. 모든 사람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지만, 특히 20대 여성들에게는 공포감까지 들게 한다. 이 사건으로 경찰은 무능한 대처와 판단력 부족, 사후 대처에서의 거짓말 및 왜곡 등으로 범인 못지않게 질타의 대상이 됐다. 당연한 결과다. 경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무능한 경찰 못지않게 피해 여성을 죽음으로 몰고 간 또 다른 ‘공범’이 있다. 바로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잘못된 인식’이었다.

피해 여성은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지만 모두 무산됐다. 몇 번의 결정적 기회를 무산시킨 것은 ‘부부 싸움’이라고 여기고 무관심하게 넘긴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피해 여성이 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던 가게 주인, 비명소리를 들었지만 부부 싸움이라고 생각해서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웃 주민, 그리고 20여명이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명백한 폭행의 정황과 처참한 비명소리를 들으면서도 부부 싸움이라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112신고센터의 남성 경찰들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가정폭력근절운동단체인 POWA(People Opposing Women Abuse)에서 2분짜리 광고를 만들어 방영했다. 이 광고는 가정폭력에 대한 이웃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실험을 담고 있다. 밤 늦은 시각, 주택가에서 한 남자가 드럼을 치기 시작하고 그 소리는 동네에 울려퍼진다. 시끄러운 소리에 이웃들이 이 남자의 집을 찾아와서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한다. 다른 날 밤, 드럼 소리만큼 시끄럽게 녹음된 남녀간의 다투는 소리를 스피커로 틀었다. 물건을 던지고 고함소리가 동네에 크게 울려퍼졌지만 아무도 항의하러 오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다. 우리 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좀 크게 난 적이 있었는데 경비실에서 바로 연락이 왔다. 날이 더운 때라 베란다 문을 열고 피아노를 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이웃집에서 아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 남성의 고함소리, 뭔가 물건을 던지는 듯 쿵쿵 하는 소리, 그리고 여성의 비명소리까지 들려왔다. 놀라서 경비실에 연락했더니 경비원은 난감해했다. 나는 ‘인터폰이라도 하면 상황이 나아질 것 같다’고 재촉했지만 경비원은 끝내 인터폰 연락조차 하지 못했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상황’이 종료된 듯하여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정폭력은 명백한 범죄이며, 함께 생활하는 가족 사이의 폭력이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주는 상처는 더욱 크다. 2010년 가정폭력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확률이 16.7%로, 65세 미만 부부 6쌍 중 1쌍이 배우자로부터 신체적 폭력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살해하는 아내나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를 상해하는 자녀 등 가정폭력으로 인한 끔찍한 사건도 매년 건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주요 정당의 대표가 모두 여성이었던 선거가 이제 막 끝났다. 여성계에 따르면 각 정당이 저출산 대책이나 보육 지원 등에 대해 다양한 공약을 제시하는 반면, 가정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가정폭력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충분히 건질 수 있었던 여성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가정폭력 그 자체로 인한 피해도 방치하고 있다. 부부 싸움, 신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공범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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