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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 들었다고 둥글둥글할 수만 없었지…”
200만 돌파 눈앞…‘부러진 화살’로 주목 한몸에 정지영 감독
석궁테러사건 진실 파헤치려 제작
김명호 교수·박훈 변호사 만나니
한편의 버디무비 절로 그려져

본명·구치소 모두 바꿔 사용
영화 법적 시비는 없을 것


“제가 원래 젊게 살아요. 철이 없는 거지. 스무 살 정도는 나이를 거꾸로 먹은 거지. 세상을 오래 살다 보면 둥글둥글 마모되고 사람에 대한 포용력도 커지고 사물에 대한 깨달음도 온다지만, 너무 명약관화한 것에도 두루뭉술해지면 성인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적 발언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꼭 해야 되는 상황에 있다면 비판적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이 지식인 된 도리 아닐까요?”

한국영화계에서 예순이 넘은 나이라면 뒷방을 차고 앉아 ‘에헴’ 하는 기침 섞은 잔소리나 가끔 하면서 ‘어른’ 대접을 받는 게 예사라지만 정지영(66) 감독은 14년 만의 신작 ‘부러진 화살’에서 날선 현실감각을 보여준다. 자칫 딱딱한 교훈조나 비장한 사설조가 될 법한 실화 소재의 영화에서 20대 젊은 관객마저 들었다 놨다 하는, 재기 넘치는 유머와 매끄러운 리듬감각은 ‘부러진 화살’의 빛나는 미덕 중의 하나다. 

‘부러진 화살’은 ‘석궁테러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실제 사건의 발단은 지난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수학과 조교수로 재임 중이던 김명호 교수가 대학별 고사 수학 출제 문제에 오류가 있다며 지적한 후 부교수 승진과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김 교수는 이에 반발해 교수 지위 확인 소송에 나섰으나 결국 패소한 후 재판 결과에 항의하기 위해 지난 2007년 담당판사를 찾아가 석궁을 들이댔다. 이 사건은 ‘사법권에 대한 도전’이라며 당시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으며, 결국 김 교수는 거듭된 항소심 끝에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지난해 만기출소했다. 


실제 당사자인 김명호 교수와 박훈 변호사는 극중 각각 김경호와 박준(박원상 분)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주요 공판내용은 실화에 바탕해 재구성했다. 영화는 판사를 찾아간 김 교수가 실제 석궁을 쏴 상대가 부상을 했는지, 석궁을 들고 위협만 했을 뿐인지를 가리는 공판 과정을 주로 그린다.

영화 속에서 검사와 판사 등 사법권력은 뻔뻔하고 파렴치하고 무원칙하며 이기적이고 탈법적인 집단으로 묘사된다. 국민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안성기가 김 교수 역할을 맡아 바보스러울 정도의 철저한 원칙주의자를 연기한다. 그게 오히려 관객들에겐 능청스러운 유머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지난 18일 개봉해 첫 주 2위에서 두 번째 주말엔 1위에 오르며 누적관객 187만명을 돌파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지만 정작 실체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문성근 씨의 추천으로 동명의 르포를 읽게 됐는데 저조차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진실을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영화화에 착수했죠.”

정 감독은 1998년작 ‘까’를 마지막으로 이후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다룬 ‘아리랑’과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은지화’, 사극 ‘울밑에 선 봉선화’ 등 몇 편의 프로젝트를 준비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그러던 중 만난 ‘부러진 화살’은 정 감독의 영화적 구미를 확 잡아당겼다.

“일단 공판기록이 흥미진진하더군요. 그다음엔 김명호 교수를 만났더니 또 그 양반이 아주 재미있어요. 자료 보강을 위해 당시 사건의 김 교수 측 변호사(박훈)를 대면했더니 그분도 역시 한 ‘캐릭터’ 하더라고. 그래서 둘을 주인공으로 한 버디무비로 작정했죠.”


‘부러진 화살’이 지난해 말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후 화제가 되면서 법조계가 술렁거렸고, 최근엔 사법부에서 일선 판사들에게 ‘대응지침’까지 내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 감독은 “영화는 공판기록을 거의 그대로 담았지만 사건 당사자와 관계자들의 본명이나 지명, 구치소 등 논란이 될 부분은 모두 바꿨기 때문에 법적 시비가 일어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정 감독은 지난 1982년 데뷔해 베트남전을 다룬 ‘하얀전쟁’,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한 ‘남부군’ 등 문제작을 내왔던 한국의 대표적인 리얼리즘 감독으로 꼽힌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미국, 독일, 일본 등 전후 문학작품이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양분이 됐고, 한국영화사의 리얼리즘 걸작 ‘오발탄’(감독 유현목)이 ‘영화적 뿌리’가 됐다고 밝혔다.

“현대사를 많이 다뤄왔죠. 그래서 돌이켜보니 제가 천착하고 있는 화두는 권력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디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데 왜 분배가 안 되고 누군가에 의해 독점이 되는가, 그것이 개개인을 얼마나 불편하게 만드는가라는 데 가장 큰 관심이 있습니다.”

정 감독의 아들 상민(37) 씨는 ‘부러진 화살’의 공동제작사인 아우라픽쳐스의 대표이자 영화감독으로, 2대가 영화인의 핏줄을 내림하게 됐다. 새해 초 만난 정 감독은 “앞으로 서너 편 정도를 더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덧붙였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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