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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를 목숨처럼 여긴 괴짜

감독으로 활약하는 지금도 

그는 여전히 ‘농구대통령’ 이었다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만남은 늘 경기 직후 체육관 벤치나 선수단 숙소였다. 이번엔 시합 말고 어떻게 사는지가 궁금했다. 가족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인터뷰 며칠 전 불쑥 건 전화에 “좋죠”. 시원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옳거니….’ 

약속시간인 오전 11시보다 10여분 일찍 서울 후암동 자택을 찾았다. 부인 이미수(44) 씨가 반갑게 맞았다. 구면인 터라 격의 없이 인사말을 건네고 남편 선수 시절 얘기를 나누는 것도 잠시,초인종 너머로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비가 미쳤나 봐. 엉뚱한 길 가르쳐줘서 뺑뺑 돌아왔잖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예사롭지 않은 등장에 “풋” 하고 웃음부터 나온다.

‘농구대통령’ 허재(46) KCC 감독.

태릉선수촌에서 막 달려온 허 감독과의 간만의 만남은 지난달 19일 자택에서 정확히 오전 10시59분에 이뤄졌다.

감독 부임 후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한 기쁨도 잠시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 나설 국가대표팀을 맡고 있다. 이 세상에 거칠 게 없을 것 같은 남자, 그와 18년 가까이 살아온 부인 이미수 씨는 대꾸도 없이 “시원한 물 줄까요?”라고 동문서답한다. 사자를 다루는 조련사의 내공이 느껴진다.

허 감독을 선수 시절부터 수차례 인터뷰를 했다. ‘써도 될까’ 싶은 내용까지 스스럼없이 말하니 인터뷰할 맛이 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왜곡된 기사가 나가도 “뭐, 그럴 수도 있지”라며 쿨하게 넘어간다. 때론 작심하고 던진 질문에 “에이, 알아서 써”라고 말해 기자를 허탈하게 만드는 롤러코스터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심지어 음주운전으로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 며칠 뒤 취중토크 인터뷰 요청도 받아들인 적이 있다.

이번 인터뷰에 앞서 잡은 콘셉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허 감독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속칭 ‘가오(체면)’를 좀 허물어 보자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농구가 인생의 전부인 그와 농구 얘기를 가급적 하지 말아 보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후자는 실패한 것 같다. 아무리 다른 얘기를 해도 결국은 농구로 돌아왔다.

“라면은 역시 계란이 들어가야지.” “다 퍼졌는데 지금 넣으면 어떡해요?” 농구대통령 허재도 부엌에선 별 도움 안 되는 군식구였다. 20여년 만에 달랑 라면 한 냄비 끓이는데 어찌나 불평도 많고, 유난스러운지…. 그래도 부인 이미수 씨는 못 보던 모습이라 그런지 우스워 죽겠단다.                                                                                         [사진=박해묵 기자/mook@healdm.com]

라면 끓여보라고? 에이, 가오 떨어지게. 대표팀 막내 때 끓여보고 20년도 넘었는데…. 선수때나 지금이나 코트선 사고뭉치였지만, 필드에서 골프채 잡으면 신사 중의 신사. 못 믿겠으면 캐디들한테 물어봐. 농구하는 아들 녀석들 실력만 되면 우리 팀 뽑을 것. 물론 그때까지 감독으로 있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선수 은퇴하고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갔던 시절. 요리해주고 여행도 다니고…. 그때가 유일하게 남편노릇 했던 때 같다.


“평생 집안일 안 하던 양반이 왜…”

손에 물 묻혀본 지 오래된 ‘나쁜 남자’. 심기를 건드려봤다.

“라면 좀 끓여보세요.”

가정적인 이미지와는 담을 쌓은 그가 과연 부엌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가오 떨어지게, 그리고 나 라면 못 끓여….” 농구 선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가 라면이다. 아무리 먹어도 돌아서면 배고픈 중ㆍ고교 시절은 물론, 연봉을 받을 만큼 받는 프로 선수들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신기한 요물이 라면이다. 빼빼 마른 선수와 코치가 한 번에 3~4개씩 먹는 건 보통이다. 라면 좋아하는 감독과 수년간 밤참으로 라면파티를 하는 바람에 체중이 120㎏을 넘어간 비운의 코치도 있다.

“허 감독도 졸병 시절이 있었을 텐데, 왜 못 끓여요?”

“대학 신입생 때 해보고, 대표팀 막내 시절에 좀 끓여본 게 마지막이라 한 20년 넘었어요”라면서도 “냄비 어딨지?”라며 엉거주춤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하긴 그 이후에는 감독도 함부로 못하는 농구대통령이었으니 손에 물 안 묻히고 고참생활하지 않았겠는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인 이미수 씨는 “평생 집안일 안 하던 양반이…”라며 반색하면서도 약간은 걱정스러운 눈치다.

냄비가 작네 크네, 앞치마가 있네 없네, 싱크대가 어쩌고저쩌고…. 투덜대며 라면을 끓이다 입을 연다. “대표팀 막내 때 국제 대회 나가면 밤에 라면 끓여 고참에게 대령하는 게 큰일이었어요. 먹고 난 커다란 사골통조림통에 끓였는데 선배 3~4명을 한 조로 3개조에 끓여 대령하고 나면 한밤중이 됐죠. 그때야 한술 뜨고 잠을 잘 수 있었어요.”

허 감독이 “에이 퍼졌네”라며 휙 자리를 뜨자 방에 있던 둘째아들 훈(용산고 농구선수)이 냄새 맡고 불쑥 나타난다. “아빠, 안 드세요? 그럼 제가 먹을게요.” 날름 젓가락을 든다. “하도 라면을 못 먹게 하니 아들이 라면만 보면 참지 못해요.” 이미수 씨의 설명이다. 허 감독은 “저놈은 ‘강동희꽈’라 배고프면 뛰지를 못해”라며 흐뭇하게 바라본다. 허 감독의 중앙대 2년 후배이자 선수 시절 환상의 콤비였던 강동희 원주동부 감독은 대식가로 유명하다.

술고래로 이름난 허 감독은 의외로 밥을 잘 먹지 않는다. 선수 시절 경기가 있는 날에도 고작 우유 한 잔 마시고 출전해 40~50점씩 넣곤 했다. 술 냄새 때문에 상대 선수가 수비를 못할 만큼 숙취 상태일 때도 해장국 한 번 찾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40대 중반을 넘어선 요즘에는 살기 위해 밥을 챙겨 먹는다고.

어설픈 라면 ‘요리’를 뒤로하고 거실에서 차 한잔을 놓고 마주앉았다. 유일한 취미인 골프로 화제를 옮겼다.



우즈 좋아하는 이유? 시원하게 때리잖아

워낙 직선적이고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이라 신중하고 차분해야 하는 골프에 맞지 않을 것 같았다. “결혼할 무렵인 1994년에 처음 채를 잡았으니 당시엔 빨리 시작한 편이었다”고 소개하면서 “열심히 하면 잘 칠 스타일인데, 젊어서는 술 먹느라 안 하고, 감독이 되고서는 바빠서 많이 못 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허 감독은 농구 비시즌에 친한 선후배나 감독자 모임 등을 통해 1년에 스무 번 정도 라운딩을 나간다고 한다. 드라이버는 핑 G15, 아이언은 캘러웨이 X16 시리즈, 퍼터는 스카티 카메론을 쓴다. 드라이버는 250m 정도 보낸다고. 아마추어치고는 꽤 장타다. 베스트 스코어가 2004년에 작성한 83타. 80대는 많이 치지만 스코어에 집착하지 않아 90대도 자주 기록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장기는 어프로치와 퍼트. “가드 출신이라 그런지 손에 감각은 좀 있는 것 같다. 한타 한타에 집중하진 않는 편이다. 파 잡으면 기뻐하고, 못 치면 캐디피 낸다고 여긴다. 그래도 얼굴이 알려져 있으니 안 맞으면 X팔려서 신경이 쓰이긴 한다”고 털어놨다. 그저 좋은 사람들과 몇 시간씩 얘기하고, 바람 쐬고, 목욕하고, 맛있는 식사하는 게 골프의 큰 즐거움이라고 한다. 라운딩 단골 멤버는 친형이나 다름없는 최형길 KCC 농구단장. “단장님과 치면 돈 잃어도 다 돌려줘서 좋다”며 씩 웃는다.

최 단장은 프로농구계에서 골프 최고수에 속하지만 가끔은 자신이 이길 때도 있다며 자랑한다. 

성질이 불같아서 매너가 별로일 것 같다고 하자 펄쩍 뛴다. “전국 웬만한 골프장 다 가봤는데 거기 캐디들 붙잡고 물어 보세요. 매너 하나는 정말 좋아요. 골프 못 치는데 매너라도 좋아야죠.”

워낙 입담이 좋은 데다 농구 코트 밖에서는 허허 웃는 스타일이라 사실 상대가 낯붉힐 일을 만들지 않는다.

좋아하는 골프 선수는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라고 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걸작이다. “공을 깰 듯이 ‘무지하게’ 세게 때리잖아요.” 그래서 좋아한다는 그에게서 잠시 잊을 뻔한 괴짜라는 생각이 다시 든다.

털털한 성격은 옷차림새에도 나타난다. 명품이나 고급 브랜드는 없다. 깔끔하면 된다. 선수 때는 명품 좋아하고, 시계도 많이 샀지만 취향이 변한 모양이다.

그는 젊어서 두주불사로 유명했다.(물론 지금도 일반인과는 비교가 안 되는 주량이다.) 오히려 술에 자유로운 감독이 되면서 주량이 줄었다고 한다. 대신 담배가 하루 3갑 정도로 늘었다.

“감독이 되니 밤에 할 일이 많아졌어요. 경기 복기도 해야지, 다음 상대 비디오도 봐야지, 패턴(농구전술)도 만들거나 바꿔야 합니다. 술먹으러 나갈 시간이 없어요. 대신 책상머리에서 담배만 뻑뻑 피웁니다.” 인터뷰 중에도 줄담배를 피워댔다. 



농구쟁이 셋 뒷바라지…아내가 고생

알려진 대로 허 감독의 두 아들 웅(용산고 3)과 훈(용산고 1)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농구 선수의 길을 걷고 있다.

허 감독은 선수 시절 “농구는 성공의 길이 너무 좁고, 무대도 국내뿐이라 권하고 싶지 않다. 굳이 운동을 하겠다면 축구를 시키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허재 주니어들’은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가업을 잇고 있다. 

올해 졸업반인 웅은 연세대 진학이 확정됐다. 형은 포워드, 동생은 가드 포지션이다. 남들보다 늦은 중1 때 농구를 시작한 웅은 입이 좀 까다로워 체중이 덜 나가는 게 걱정이라고. 둘째 훈은 마침 고려대와의 연습경기에서 코를 얻어맞아 콧잔등이 퉁퉁 부었다. “형이 영화 ‘아바타’ 주인공 닮았다고 놀린다”며 투덜대는 훈은 완전 개구쟁이 인상이다.

허 감독이 분당 집을 전세 놓고 후암동으로 이사한 것도 용산중ㆍ고를 다닌 두 아들의 뒷바라지 때문이다. 부인 이미수 씨는 다른 학교를 보낼까도 생각했지만 ‘용산의 전설’ 허 감독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 안 된다”며 결사반대해 용산 유니폼을 입게 됐다.

이미수 씨는 “두 아이 쫓아다니다 보면 정신이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남편 뒷바라지로도 모자라 자식들까지 코트에서 뛰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우리 많이 닮았어요?” 허재 감독이 자신의 분신이자, 누구보다 사랑하는 두 아들 웅(왼쪽), 훈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허 감독은 아내의 이런 헌신적인 노력도 못마땅해 타박이다. “따라다니는 건 좋은데, 경기장에 부모들 오는 건 잘못이야. 내가 운동할 때도 부모님들이 오셨지만 숙소에서 식사 준비는 해줘도 체육관 안에는 안 들어오셨어”라고 말한다. 학원스포츠가 부모들의 희생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지만, 선수를 지도하고 기용하는 일은 코치만의 불가침 영역이라는 것. 하지만 요즘은 자신의 자녀가 못 뛰면 왜 내보내지 않냐고 코치에게 삿대질하거나, 전학 보내 달라는 학부모들도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다행히 그의 두 아들은 감독에게 출전을 부탁하지 않아도 될 만큼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고 있다.

만약 두 아들이 프로농구 드래프트에 나오면 감독인 아버지가 어떻게 할지 궁금해졌다. 과거 김동광(현 KBL 경기위원장) SBS 감독이 자신의 아들인 김지훈을 지명한 적이 있었다.

(웃으며) “그때까지 감독에서 안 잘리려나?”

“뽑아도 욕먹지 않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으면 뽑아야지. 하지만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뽑지는 않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허 감독은 프로농구판에서 ‘신의 손’으로 불린다.

원주 TG삼보(현 동부) 플레잉 코치 시절, 전창진 감독과 함께 나선 드래프트에서 1번을 뽑아 김주성을 선택한 뒤 만세를 부른 모습은 유명하다. KCC에서도 1번을 뽑아 국내 최장신 센터 하승진을 데려왔고, 혼혈 선수 드래프트에서도 1번을 뽑아 전태풍을 선택할 수 있었다. 2군 드래프트에서도 1번을 뽑다니 신기(神氣)가 있는지도 모른다.

중ㆍ고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합숙과 전지훈련, 대회 출전 때문에 제대로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다. “이제 가족을 위해 시간을 좀 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자 부인 이미수 씨가 “미국 연수 시절에 그동안 못했던 거 다 했어요”라고 거든다.

허 감독은 2004년 국내 프로농구 선수로는 처음으로 화려한 은퇴경기를 가진 뒤 미국 페퍼다인대로 연수를 떠났다. 1년 남짓한 기간에 아이들을 차로 실어나르고, 요리도 같이 해먹고, 주말엔 여행 다니면서 그간의 진 빚을 톡톡히 갚았다고 한다. 



무섭게 때리셨던 정봉섭 선생님 못잊어

타고난 신체 조건과 천부적인 재능, 혹독한 개인 훈련으로 최고의 선수가 된 그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스승이 있다. 바로 정봉섭 전 중앙대 감독이다. 정 전 감독은 허재를 중앙대로 스카우트하기 위해작고한 그의 부친 허준 옹과 5년간 낚시를 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었던 일화로 유명하다. 연세대와 고려대가 대학농구를 양분하던 당시,국내 최고 선수인 허재를 중앙대가 뽑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허재의 입학 후 중앙대는 대학 무대는 물론 농구대잔치에서 실업팀을 꺾는 괴물팀으로 변신했다.

허재와의 이번 인터뷰 몇 주 전 한 언론에 정 감독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때 정 감독은 “나한테 제일 많이 맞은 게 허재”라고 밝혔다. 이에 허재는 “많이 맞았다. 학교에서도, 대표팀에서도”라고 웃으면서도 “하지만 왜 때리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제일 잘한다는 내가 맞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선수도 긴장하게 됐고, 나 역시 선수들 앞에 맞는 게 창피해서 더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이제 중앙대 체육부장을 거쳐, 일본 실업팀에서도 물러난 정 감독에 대해 “오늘의 허재가 있게 만든 스승이다. 나뿐만 아니라 한기범, 김유택, 강동희, 김영만 등 중앙대 출신 농구인들 모두에게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자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간단히 막국수나 한 그릇 먹자는 허 감독을 따라간 집 근처 막국숫집에서 폭탄주를 7잔이나 마셨다. 오랜만인데 낮이라도 가볍게 한잔하자는 그의 말에 속았다(?). 그리고는 한낮에 대리운전으로 휙 떠났다. 이게 ‘인간 허재’의 본모습일 것이다.

김성진 기자/withyj2@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중앙대 허재 감독, 내 마지막 타이틀됐으면…”

‘농구대통령’ 허재의 파란만장한 농구인생은 화려한 선수로서의 1막을 끝내고, 감독으로서 연륜을 쌓아가는 2막이 한창 진행 중이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는 평가대로 농구인 허재는 다시 보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고, 그 역시 행복한 농구인으로 살고 있다.

그가 더 바라는 게 있을까.

허재 감독에게 프로팀 지도자에서 물러난다면 꼭 해보고 싶은 ‘마지막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허 감독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교인 중앙대 감독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허재는 “용산중ㆍ고등학교에서 6년을 보냈지만, 중앙대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보낸 4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언젠가는 꼭 중앙대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는 감독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또 그 자리에 있을 후배를 밀어내고 들어가는 일은 절대 하고 싶지 않다고 못 박은 허재는 “만약 지도자로서 마지막을 정해야 하고, 또 우연히 나에게 기회가 온다면 중앙대 감독을 맡아보고 싶다”고 설명했다.

프로팀 지도자가 대학팀 사령탑을 맡는 경우는 흔치 않다.

최희암, 이충희 감독 등이 프로팀에서 물러난 뒤 동국대와 고려대를 맡은 적이 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모기업의 체계적인 지원, 일정 수준 이상에 올라 있는 완성된 프로선수들을 지도하다가 고교 선수 스카우트부터 행정 등 모든 살림을 해야 하는 대학 지도자를 맡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대학 감독을 하려면 중ㆍ고교 지도자들과의 친분이 필요하고, 아직 완벽하지 않은 선수들의 장ㆍ단점을 잘 가려서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허 감독은 “우리 아이들 때문에 고교대회나 대학대회를 자주 보러 가면서 선후배 지도자들과 많이 친해졌다. 만약 대학팀을 맡는 날이 온다면 훨씬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진 기자/withyj2@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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