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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자가 무슨 춤쟁이냐…게이 아니냐 오해도 받았죠”
국립발레단의 네 남자…‘발레리노로 산다는 것’

수명 길지않고 매일매일 경쟁

무대위 희열이 존재의 이유

‘개콘’ 발레리no 봤냐고요?

타이츠 안에 속옷만 입어 민망

원래 서포트란 보정옷 입죠

발레에 대중적 높은 관심 실감

지하철서 가끔 사인해달래요




“발레는 아름다운 예술입니다.” 한창 인기인 개그콘서트 코너 중 하나인 ‘발레리no’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멘트는 늘 똑같다. 이 ‘아름다운 예술’을 ‘말’이 아닌 ‘몸짓’으로, ‘웃음’이 아닌 ‘감동’으로 그려내는 ‘아름다운 남자’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 있는 연습실에서 ‘진짜 발레리노’들을 만났다. 무대에서는 목소리가 필요없는 국립발레단의 발레리노 김현웅(30), 이동훈(25), 윤전일(24), 배민순(24)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발레리노로 산다는 것’에 대해 솔직하고 유쾌한 수다를 쏟아냈다.

-발레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김현웅(이하 김):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 뮤지컬배우를 꿈꿨어요. 뮤지컬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춤과 노래, 연기를 다 잘해야 하니 춤부터 시작해보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발레학원에 다니면서 발레 공연 비디오를 보고 반해버렸어요. 고 3 때니 늦게 시작한 편이죠.  

▶배민순(이하 배): 백댄서가 꿈이었어요. 그런데 춤을 추려면 기본부터 하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발레를 시작하게 된 것이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발레를 하지 않았다면 백댄서로 활약했겠죠.

▶윤전일(이하 윤): 지금도 늦지 않았어. 저는 가수가 되려고 예고에 진학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발레를 시작했어요. 소름 끼칠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원래 가수로 무대에 서는 게 꿈이었거든요.

▶김: 네가 노래를 부르면 소름이 돋긴 해.

▶이동훈(이하 이): 비보이 춤에 빠져 있던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무용을 전공한 체육 선생님께서 ‘제대로 된 춤’ 한 번 배워 보라고 해서 발레를 처음 만났죠. 그런데 아무래도 일찍 시작하면 기본기가 탄탄하고 굳기 전의 몸이니 더 유연하겠죠.

▶김: 하지만 저는 가끔 생각해요. 더 일찍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너무 힘들어서 벌써 그만뒀을 것 같기도 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요.



-발레리노가 되려면 타고나야 하는 신체 조건이 있나요.

▶이: 발레리노의 이상적인 체형은 현웅이 형 사진을 찍어놓으면 돼요. 우선 기본으로 팔다리가 길어야 하고, 작은 얼굴로 태어나야 하죠. 베이글에 가려질 정도 크기의 얼굴요. 튀어나온 발등에 넓은 어깨, 그리고 유연해야 해요. 터닝 감각과 점프력까지. 그리고 하나 더 굽실거리는 머리카락.

▶김: 얼굴도 잘생겨야 해요. 저 보시면 알겠죠?

▶배: 냉정하게 말해서 타고나야 하는 부분이 크죠. 저도 키가 180㎝만 되면 좋을 텐데.

▶이: 저는 긴 다리와 유연한 발이 아쉬워요.

▶윤: 저 역시 긴 다리. 다리만 10㎝ 더 길면 좋겠어요. 허리 말고요. 그런 것 외에는 철저한 자기관리죠. 발레리나 못지않게 몸매관리가 중요하고, 체력 소모가 크니 스트레칭은 기본이죠. 매일 유산소 운동도 꾸준히 합니다.



-요즘 인기인 개그콘서트의 ‘발레리no’ 코너는 한 번씩은 봤나요.

▶이: 처음엔 재밌어서 웃었는데 매번 똑같은 스타일로 가니 조금 짜증 나더라고요.

▶김: 주요 부위를 가린다는 초점 하나에만 맞춰 웃기는 거잖아요. 발레리노라는 소재로 다양한 얘기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부분은 아쉬워요. 발레를 하는 사람들이 타이츠를 입고 무대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도 있고요.

▶배: 발레리노들은 타이츠 안에 서포트라는 것을 착용해요. 여성들의 보정속옷 같은 거죠. 그런데 개그콘서트를 보니 그들은 속옷만 착용하고 흰색 타이츠를 입는 것 같더라고요.

▶윤: 서포트 없이 연습하는 건 공부할 때 연필 없이 시작하는 것과 같죠. 저는 고등학교 시험 볼 때 처음 입어봤어요. 처음엔 불편하고 갑갑하며 피부가 상하기도 하죠.

▶김: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서포트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어요. 속옷만 입었죠. 고 3이면 다 컸는데. 검은색 타이츠만 입어서 다행이죠. 발레학원의 유일한 발레리노여서 원장님도 서포트에 신경을 안 썼죠. 한참 후에 종로3가에 직접 가서 사 입었어요. 입어 보고는 식은땀이 다 나더라고요. 그동안 이걸 착용 안 했다니 싶어서. 

▶이: 처음엔 착용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죠. 지금은 일상복을 입을 때도 없으면 왠지 허전해요.

▶윤: 혹시라도 연습하는 데 서포트를 안 가져왔다면 그날 연습은 못해요. 병가를 내는 한이 있어도.   

‘유쾌한 수다’ 전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한 발레리노들. 무대 위가 아니면 타이츠를 입지 않는다는 이들이지만 촬영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해줬다. (가운데 뒤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현웅, 윤전일, 배민순, 이동훈.


-직업으로서의 발레리노는 어떤가요.

▶김: 2004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일찍 자리를 잡은 편이죠. 처음엔 아직 취업을 못한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하기도 했어요. 전문직이기도 하고. 하지만 먼저 시작했을 뿐이지, 발레리노의 수명이 길진 않잖아요.

▶윤: 하루하루가 경쟁이에요. 발레단 입단부터 매 공연도. 후배들은 끊임없이 올라오고, 저는 제 자리를 지켜야 하니까요. 학교 다닐 때부터 계속되는 경쟁. 하지만 무용수에겐 그런 긴장이 없어선 안 되겠죠.

▶이: 저는 연습이나 무대를 즐기는 공간으로 생각해요. 경쟁은 부담이지만 발레단 입단 후 더 많은 것을 배워서 좋았죠. 캐스팅이 안 돼도 객석에서도 간접적으로 배워요. 발레단 입단이 제 능력의 꽃을 피우는 시작점인 것 같아요.



-발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발레리노라고 하면 주변에서 쉽게 하는 오해나 편견도 있지 않나요.

▶배: 발레리노라고 하면 단번에 “진짜 쫄쫄이 입냐”고 묻죠. 

▶이: 특히 결혼할 사람을 만나 신부 측 부모님을 만나면 그런다고 하더라고요. “남자가 무슨 춤쟁이냐” “어떻게 먹고살 거냐” “한 가정을 꾸려갈 수 있겠냐” 등의 질문이 쏟아진대요. 심지어 저는 고등학교 때 “게이냐”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윤: 그래서 이쪽을 아는 사람들이 대화하기도 편하죠. 제 여자친구도 국립발레단의 발레리나예요.

▶배: 저도. 아무래도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많고, 서로의 일을 잘 이해해주니 가까워지기 쉽죠. 


-파트너가 중요하다고 하던데, 상대 발레리나와 호흡을 맞출 때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김: 자세를 잡고 타이밍을 맞추는 것은 반복된 연습으로 맞춰가는 거죠. 경험이 많은 사람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될 때가 있어요. 엄격하게 선후배를 따지는 곳이니까요. 

▶이: 발레리노는 발레리나와 균형을 맞추고 드는 동작이 많잖아요. 그런데 파트너가 몸관리를 안 하면 스트레스가 엄청나죠. 직접적으로 그만 먹으라고 얘긴 못하고, 같이 운동하고 살 빼자고 간접적으로 말하기도 해요.

▶윤: 몸무게 변화는 서로에게 가장 예민한 부분이죠. 전 막을 함께해야 하는데 드는 장면이 두려워지면 표정관리도 안 되고 정신적인 부담도 커지죠.

▶이: 조용한 장면에서 자칫 잘못하면 ‘으음’ 하는 신음이 나기도 해요.



-최근 ‘지젤’ 매진뿐 아니라 뮤지컬 ‘빌리엘리어트’에 영화 ‘블랙스완’ 등 다양한 장르에서 발레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무대 밖에서도 인기를 실감하나요.

▶김: (옆에 있던 국립발레단 직원을 돌아보며) 오늘 나한테 소포 온 것 없어요? 한 번은 코엑스를 갔는데 “발레리노 김현웅 씨, 맞죠?”라며 사인을 부탁하더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막 몰려들면서 “누구야? 연예인이야?” 하며 웅성웅성했어요. 그런데 저를 확인한 후엔 뿔뿔이 흩어졌어요. 결국 처음 사인을 부탁했던 분이랑 저만 덩그러니 남았죠.

▶이: 저는 동대문에 쇼핑하러 갔는데 한 가게 사장님이 알아보시고 고른 옷을 공짜로 주셨어요. 가끔 지하철에서도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사인을 청하기도 해요. 

▶배: 멋있다.



-이런 흐름을 타고 발레 대중화가 현실에서 더 발전적으로 진행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배: 공연장을 찾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을 위해 공연 실황이 TV를 통해 자주 방영이 되면 좋겠어요.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인데, 발레 콩쿠르도 중계하면 재미있지 않을까요.

▶이: 기본도 중요해요. 어렸을 때부터 체육 과목에 무용이 별도로 있어야 하고, 전공을 하든 안 하든 모든 학교에 무용실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슈즈가 뭔지, ‘백조의 호수’가 뭔지도 모른 채 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김: 무엇보다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탁월한 스타가 있어야죠. 조승우라는 배우가 보여주는 뮤지컬계의 이슈만 봐도 그래요.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보러와 달라고 호소하기보다 먼저 스타를 키우고 작품을 잘 만들어 관객이 스스로 찾아오게 해야죠.



-국립발레단 무대에 선 멋진 발레리노들을 보며 발레에 대한 꿈을 꾸는 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 하지 마.

▶배: 뛰지 마.

▶윤: 바에서 손 떼라.

▶김: 돌지 마? 냉정하게 보일지 몰라도 발레는 우선 시각예술이에요. 기본적인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죠.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 해도 즐기지 못하면 오래갈 수 없어요.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각오 없이 뛰어들거나 버텨 보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다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나아요. 하지만 선택한 이후 무대에서 느끼는 희열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죠.

윤정현 기자/hit@heraldcorp.comㆍ
사진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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