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 <이형석의 상상력 사전> 유머
사람도 사랑도 죽이고 살리는 게 유머다. 등반이나 화재, 비행기 추락 등 각종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다양한 사례를 모아 공통점을 분석한 로런스 곤잘레스의 저서 ‘생존’은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무기’ 중 하나로 유머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계곡 등반 중 바위 틈에 몸이 끼여 조난을 당한 뒤 무려 닷새 넘게 버티다 결국은 자신의 팔을 자르고 살아난 애런 랄스턴의 실화를 그린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127시간’은 그 증거다. 팔은 마비되고 추위와 배고픔이 극에 달한 최악의 상황에서 주인공은 홀로 TV토크쇼 흉내를 내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농담을 던진다. 이 웃음은 각성제이자 진통제인 셈이다.

유머는 특히 남자로 하여금 사랑을 성취하게 하는 연애의 가장 좋은 벗이기도 하다. 29일 개봉한 영화 ‘러브 픽션’에서 남자주인공 구주월(하정우 분)의 상상 속 연애코치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 진지해선 안 돼. 여자가 부담을 느끼니까. 베르테르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알아? 바로 형편없는 유머감각이었어. 유머야말로 세대를 초월한 여자들의 영원한 친구지.”

채식주의자라는 이유로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31살의 소설가 구주월(하정우)의 앞에 운명의 상대가 나타난다. 영화사 직원 이희진(공효진)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유머의 융단 폭격을 시작한다. 일단 데이트를 청하는 편지. “뜻하지 않게 낭자를 뵙고 잠시나마 님의 자태에 혼절이라도 한 듯 정신이 아득하고 혼백이 산란하여 오뉴월 누렁이마냥 혀를 쭉 빼물고 애꿎은 타액만 드립다 들이켰소만”으로 시작된 편지는 “이번 주말 저녁 한수에 배나 띄워놓고 칵테일이라도 한 사발씩 홀짝이고 싶은데 부디 망측하다 꾸짖지 마시고 가슴 벅찬 리플라이 기다리겠소”로 마무리된다. 이런 편지를 받고 무심할 여인네가 있을까. 두 남녀는 만남을 시작하고, 무표정에 시치미 뚝 뗀 남자의 ‘유머 서커스’는 계속된다. 뭇사람이 모인 술자리에서 불쑥 일어서 “고결한 인격과 활달한 미모를 갖춘 것도 모자라 절제된 지성과 안정된 유머감각으로 내 마음을 초토화시킨 저 여인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분연히 일어섰다”며 “우아, 숭고, 희망, 기쁨, 평화, 매혹, 섹시를 제것으로 하고 비천, 타락, 절망, 슬픔, 혼돈, 평범, 따분만을 내게 허락한 당신! 당신은 누구신가”며 좌중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주월. 자지러지는 웃음은 두 남녀의 거리를 좁혀 마침내 한 침대에서 만나게 한다. 그러나 웃음은 점차 창백해지고 농담은 밑천을 드러내며 서서히 찾아오는 관계의 균열 속으로 회의와 권태가 찾아든다. ‘러브 픽션’은 연애에서 유머가 차지하는 ‘화학적 비중’을 남녀관계의 빛나고 아프고 치사하고 더러웠다가 시들해지는 순간들 속에 매우 탁월하게 용해시켜 냈으며, 이 영화 자체도 근래의 어떤 한국 로맨스영화보다 우월한 유머감각을 뽐낸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복근보다 먼저 유머감각을 단련할 일이다. 탓할 것은 빈곤한 상상력이지, 부모님이 물려주신 외모가 아닐지니.

suk@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