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스포츠 타타라타] ‘대학생 때 중학교 수학을 시작한’ 어떤 교수님의 이야기
이미지중앙

고려용접봉(KISWEL)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최희암 부회장의 동영상.


# 기자가 물었다. “감독님에게 농구란 무엇인가요?” 호칭을 부회장으로 쓰고, 감독님으로 읽히는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 인생의 기초공사지요. 농구를 통해 남과 싸우는 법과 양보하는 법, 경쟁할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웠어요." 조선일보 2020년 2월 15일자에 실린 고려용접봉(KISWEL)의 최희암 부회장(65) 인터뷰 기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최 부회장은 1990년대 초중반 TV광고에 등장할 정도로 스타감독이었다. 그는 2009년 말 프로농구 전자랜드 감독을 끝으로 농구코트를 떠났다. 고려용접봉의 다롄 지사장(중국법인장)이 됐고, 깜짝 놀랄 만한 경영실적을 내 2014년 중국보다 규모가 10배에 이르는 창원공장 사장으로의 영전했다. 여기서도 경영능력을 인정받았고, 2017년부터는 매출 3000억 원이 넘는 고려용접봉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

# 울산의 꼬마 탁구선수 박재현은 기대주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84년 제1회 제일모직배(지금은 삼성생명배) 우수선수 초청 탁구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학성중학교 2학년 때인 1986년 소년체전에서는 당시 중학랭킹 1위였던 대전 대신중학교의 추교성(현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을 1회전에서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은메달을 획득, 울산시내에서 카퍼레이드까지 했다. 이어 3학년 때는 신수현(탁구신동 신유빈의 아버지)의 환일중학교와 중학랭킹 1위 이철승(현 삼성생명 남자 감독)이 이끈 성의중학교를 차례로 꺾고 소년체전 단체전 우승을 일궜다. 또 카퍼레이드를 했다. 이해 출전한 전국대회 단체전에서 모두 우승한 학성중학교의 에이스는 박재현이었다. 그는 청소년 대표에 선발됐고, 당시 중고 운동선수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88꿈나무’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미지중앙

학성중학교 3학년 때 소년체전 우승으로 울산에서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선수' 박재현(왼쪽).


# 이런 박재현은 1992년 한국체대 2학년 때 사실상 은퇴를 결심했다. 고교(학성고) 시절부터 실력이 떨어졌고, 대학입학 후에는 부상까지 겹치며 탁구선수로 성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좋다! 대학에 온 만큼 이제부터는 탁구 대신 공부로 승부를 걸어보자.’ 다부지게 결심한 박재현은 중학교 수학을 공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생의 또 다른 승부수를 던졌다. 전공이 체육측정평가였기에 ‘수학’을 먼저 택했다. 이후 수학은 물론이고, 어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전공공부까지 기초가 부족했기에 일반학생들에게 뒤지 않기 위해 서너 배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10여 년을 살았더니 2006년 3월 만 34세에 모교의 ‘교수’가 됐다.

# 2020년 현재 박재현은 한국 체육학계에서 제법 실력 있는 교수다. 빼어난 학문적 능력과 특유의 넉넉한 인품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교수’ 박재현은 탁구유망주 시절보다 더 빛을 발한다. 운동측정 및 스포츠분석 분야에서 좋은 연구실적을 쌓았고, 한국체육학회와 한국체육측정평가학회에서 주요보직을 역임했다. 행정에도 밝아 국립대 최연소 기획처장을 지냈고, 올해초에는 청와대의 체육담당 행정관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연구실에는 15명의 박사급 연구원들이 상주하고, 그는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 등 체육계의 다양한 분야에서 학자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3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한국체대 총장을 지낸 김성조 경북관광공사 사장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브리핑을 잘한다. 특히 수학적 머리가 좋다”고 그를 칭찬한 바 있다.

이미지중앙

제자의 학위수여식 때 연구실 상주생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박재현 교수(가운데).


# 교수 박재현의 전성기는 현재진행형이다. 2018년 빅데이터 분석 기술을 활용해 ‘나도윈(NADOWIN)’이라는 획기적인 랭킹시스템을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지금까지 착실하게 업그레이드가 이뤄지면서 향후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통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이어 최근에는 ‘스포츠 관심도’ 발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6월부터 매주 월요일 주요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통계량을 분석해 스포츠 종목, KBO 구단, 축구 프로구단, 스포츠 브랜드, 스포테이너, 스포츠음료 등 다양한 분야의 관심도 측정결과를 발표하고 있이다. 신선한 분석결과와 함께 스포츠산업 활성화를 위한 무료 정보서비스라는 공익성에 호평이 자자하다. 지난 주에는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향후 3년 간 5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스포츠 승부조작을 통계적으로 식별해내는 인공지능 모형을 개발하는 연구 프로젝트도 따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한국 스포츠계에서 빅데이터와 AI 기술 활용의 '고수'인 것은 분명하다.

# 사실 학계에서 박재현 교수의 탁구유망주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탁구선수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이들도 있다. 이유는 은퇴한 후 박재현은 탁구라켓을 잡지 않았고, 공부에 매진하면서 탁구인들과 교류도 점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 성격상 “내가 한때는 말이야”라며 자랑하지도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 연구하고, 가르치고, 행정일을 하기에도 바빠서 탁구까지 챙기지 못한 것이죠.” 이런 박재현 교수는 2019년 서울 전국체전 때 한국체대에 서울의 남녀대학팀을 급조하면서 본의 아니게 탁구계로 컴백했다. 탁구선수 출신 교수가 유일했기에 ‘감독’이 된 것이다. 이후 박재현 교수는 이철승, 추교성, 오광헌(보람할렐루야 감독), 유승민(대한탁구협회장) 등 탁구인들과의 반가운 해후를 이어가고 있다. 박 교수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고향인 탁구에 도움이 될까 고민하고 있고, 탁구인들도 박재현 교수가 ‘실력 있는 교수’가 됐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반겨주고 있다.

이미지중앙

박재현 교수가 책임교수를 맡고 있는 한국체대 스포츠분석센터는 2020년 6월부터 매주 스포츠 관심도 분석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은 6월 4째주 자료의 하나.


# 주니어시절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스포츠 선진국에서는 올림픽 출전선수가 은퇴 후 훌륭한 의사나 법조인 등 전문직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는 자연스럽다. 주니어 선수 입장에서 보면 운동하는 만큼 열심히 하면 사회적으로 도전하지 못할 일이 없다. 해당 분야의 전문성도 그렇지만 특히 사람관계인 리더십은 스포츠활동이 주는 최고의 가치 중 하나다. 미국의 명문대학이 시험성적뿐 아니라 스포츠활동의 리더십을 중요한 입학자료로 쓰는 것도 같은 이치다. 지휘봉 대신 용접봉을 잡았다고 해서 ‘용접봉 리더십’으로 불리는 최희암 감독은 "기업인으로 살아보니 리더십도 결국은 스포츠의 세계와 마찬가지인 인간관계였다"고 말했다. 한국체대 스포츠분석센터의 윤효준 박사는 스승 박재현 교수의 장점에 대해 “학문적 성과도 빼어나지만 무엇보다 형님 리더십이 좋습니다. 석박사 원생들을 정말 많이 챙깁니다”라고 말했다. 성공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힘들이지만, 그런 게 있다면 그 길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한국이 운동을 관둬도 멋진 삶을 살 수 있는 사회 즉, 박재현 교수 같은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여야 한다. 그래야 온갖 못된 일로 멍들고 있는 지금의 한국체육이 진정 존중받을 수 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이미지중앙

박재현 교수의 최근 모습.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