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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김기수처럼’ 호치민 노점소녀의 복싱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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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6월 27일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왼쪽).


# 한국은 지금까지 모두 44명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을 배출했다. 지금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만 한국 프로복싱은 1980년대 한때 미국에 이어 세계 2대 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뭐든 최초의 기록은 오래 남는 법, 한국의 첫 세계챔피언은 1966년 6월 25일 WBA WBC 슈퍼웰터급 통합챔피언에 오른 김기수(1939년생, 1997년 작고)였다. 아시안게임(58년) 금메달리스트에, 로마 올림픽까지 출전했고, 프로데뷔 후 무패행진을 달렸지만 김기수가 세계정상 도전의 기회를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국민소득이 200달러 하던 시절,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무려 5만5,000달러를 주고,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복서 벤베누티를 불러왔다. 김기수가 챔피언이 되자(2-1 판정승) 카퍼레이드를 하고, 영화가 나오는 등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 장면을 보고 복싱을 시작한 홍수환(1950년생)이 1974년 한국의 두 번째 세계챔피언이 됐으니 김기수 쾌거는 한국의 국력에 비해 빠른 편이었다.

# 코로나19 때문에 세상이 난리이고, 사람이 모이는 속성을 가진 스포츠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파행을 겪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베트남에서는 한류가 섞인 복싱바람이 불었다. 24살의 베트남 여자복서 응웬 티 투 니가 지난달 29일 호치민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캄보디아 바벳(목바이)에서 WBO 아시아퍼시픽 미니멈급 챔피언에 등극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프로복싱 동양챔피언은 이번이 처음. 또 라이벌 국가로 복싱강국 태국의 칸야랏을 2-1 판정으로 꺾었기에 베트남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다. 베트남 최대신문인 노동신문 등 주요언론이 '복권 팔던 소녀 복서 베트남에 영광을 가져오다' 등의 제목으로 연일 기사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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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베트남 복서로는 첫 프로복싱 동양챔피언이 된 투 니 선수가 베트남국기인 금성홍기를 두른 채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사진=커키버팔로체육관 제공]


# “정말 짠해요. 니 선수는 집안형편이 정말 어렵거든요. 학생 때 복싱을 시작해서 실력도 좋았지만 베트남에서는 복싱으로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요. 노점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팔던 모습이 아직도 선해요. 어쨌든 어렵게 살면서도 복싱을 놓치 않았고, 이를 높이 평가해 제가 스카우트했습니다. 이제 복싱에 전념하고 있으니 베트남의 첫 세계챔피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5년 전부터 베트남에서 복싱전도사를 자청하고 있는 커키 버팔로 체육관의 김상범 대표(49)는 니 선수의 동양챔피언 등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니 선수가 어렵게 살던 시절의 사진을 헤럴드경제에 보내왔다.

# 1996년 호치민에서 출생한 니는 부모가 어릴 때 이혼하면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왔다. 가난한 나라인 베트남에서도 최빈층의 삶을 산 것이다. 복권을 팔았다는 것은 점잖은 표현이고, 할머니와 함께 노점에서 복권은 물론이고, 과일, 잡화 등 팔아보지 않은 것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 일찌감치 격투기에 입문했고, 중학교부터는 복서로 전향해 나름 좋은 성적을 냈지만 복싱으로 먹고살 여건은 되지 않았다. 운동을 하면서도 노점을 했고, 피곤할 때는 노점 근처 길거리에서 잠을 청할 정도로 고달픈 삶을 살았다.

# 니는 2010년부터 아마추어 복서로 나서 그해 청소년 복싱 토너먼트 금메달을 따는 등 호성적을 거뒀다. 2015년부터는 호치민 시 대표로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김상범 대표는 “2015년 베트남에서 복싱대회를 열었고, 이때 승리한 니 선수에게 내가 시상을 했다. 이후 계속 지켜보다 니 선수가 2018년 호주의 난적을 상대로 엄청난 경기력을 발휘했고, 마침 커키 버팔로 체육관이 확장하게 되면서 그를 스카우트 했다. 니 선수는 내게는 이미 영웅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복싱에 대한 강한 열정을 바탕으로 열심히 운동하기 때문이다. 니 선수가 베트남의 첫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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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베트남 호치민의 한 골목에서 티셔츠를 걸어놓은 채 노점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니 선수의 모습. [사진=커키버팔로체육관]


# “복싱은 나의 열정이고, 국가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복싱은 내가 먹고 살 만큼 충분한 돈을 준다. 더 열심히 하면 백만 달러의 선수가 될 수 있다. 복싱으로 내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니 선수는 다부지다. 예전 한국의 ‘헝그리 복서’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29일 경기 승리로 프로전적 4전전승(1KO)을 기록한 니는 올해 안으로 동급 세계챔피언 타다 에츠코(39 일본, 19승3패3무)를 겨냥하고 있다. 타다가 12년 경력의 노련한 복서지만 니는 “이미 타다 선수의 경기를 동영상으로 많이 봤다. 아주 강한 선수이지만 나는 이길 자신이 있다”라고 말했다. 김상범 대표가 추진하고 있는 니 선수의 세계도전은 당초 한국의 안산을 고려했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 5월 이후 호치민의 응후엔 후에 광장에서 5만 명의 관중을 모아 치를 계획이다. 물론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후에 말이다.

# 한국의 1호 세계챔프 김기수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아주 가난했다. 유복자였고, 전쟁을 겪으면서 작은 배를 타고 15일에 거쳐 포항으로 내려왔고, 이후 미군 화물선을 타고 전남 여수에 터를 잡았다. 홀어머니 슬하에 2남2년 중 한 명. 다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김기수는 더 그랬다. 그래서일까, 복싱으로 성공해 돈을 번 김기수는 은퇴 후 알뜰하게 사업을 하고, 건물주가 되는 등 재산관리를 잘했다. 한국의 여럿 프로복싱 세계챔피언들이 주먹으로 번 돈을 잘 관리하지 못한 것과는 아주 달랐다. 1997년 간암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나름 유복한 삶을 살았다. 왕년의 홈런타자 김봉연과는 동서였고, 김응룡 감독과는 술친구였다. 그는 돈얘기가 나오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4각의 링은 냉정하다. 하지만 링 밖은 더욱 비정하다.”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김기수의 헝그리정신은 2020년 “복싱으로 가난을 딛고 일어서고, 조국의 명예를 높이겠다”는 니 선수와 꼭 닮아 있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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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동양타이틀매치에서 승리한 후 니 선수(가운데)가 김상범 대표(왼쪽)와 함께 링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커키버팔로체육관]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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