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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카누스티 디 오픈의 영웅 벤 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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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디 오픈 우승컵을 들고 있는 벤 호건.


이번 주 카누스티 골프링크스에서 개최되는 제147회 디 오픈이 열린다. 이번 여덟 번째 디 오픈 개최인 카누스티는 디 오픈에 열리는 9개의 로테이션 코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로 평가받고 있다.

톰 왓슨, 게리 플레이어 등 과거 이곳에서 우승했던 7명의 챔피언들은 모두 위대하지만 그중 최고의 영웅은 역시 벤 호건이었다. 평생 카누스티의 디 오픈에 단 한 번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던 벤 호건의 스토리를 돌아본다.

디 오픈에서 우승해야 위대해진다

1953년 마스터스와 US 오픈을 연달아 우승한 벤 호건은 마스터스 2승, US 오픈 4승, PGA 챔피언십 2승으로 메이저 8승을 완성한 후 시즌을 끝내고 싶어했다.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었던 디 오픈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20년 선배 월터 하겐, 10년 선배 진 사라센과 보비 존스 등 위대한 골퍼들이 벤 호건의 디 오픈 참가를 강력하게 설득해왔다. 골프 역사의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디 오픈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들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한 호건은 카누스티에서 열리는 디 오픈 참가를 결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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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호건(오른쪽)과 캐디 세실 팀스.


철저한 사전 준비


이왕 출전한다면 꼭 우승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벤 호건은 대회가 열리기 2 주 전 카누스티에 도착해 준비를 시작했다. 영국의 골프 미디어와 팬들은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환영하며 첫 라운드를 기다렸다.

링크스 코스의 베테랑 캐디 세실 팀스와 처음 만난 호건은 이런 대화를 놔눴다.

“골프백을 메고 따라만 오면 되고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그린을 읽을 때는 제 도움이 필요할 텐데요?”
“그것도 필요 없소.”

캐디는 자신의 도움을 거절하는 호건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링크스 코스를 처음 본 호건은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골프를 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곳에 온 것이 실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해변의 잔디는 미국과 다른 특성이 있어서, 쇼트 아이언을 칠 때 미국보다 훨씬 얇고 긴 디봇이 생기면서 백스핀의 양도 많아졌다. 호건은 스핀 컨트롤을 위해 디봇을 내지 않고 공만 깨끗하게 쳐 내는 샷을 준비했다. 해변의 바람은 텍사스의 강한 바람에 단련되어 있었기에 적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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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누스티 6번 홀의 안내판(왼쪽)과 기념동판.


파5 6번홀의 전략

홀별 플레이 전략을 세우던 호건은 521야드 파5 6번 홀에서 중요한 결심을 했다. 그린까지 왼쪽은 계속 OB지역이고, 페어웨이 중간에 벙커가 있어서 다른 선수들은 벙커의 오른쪽을 목표로 티샷을 하는데, 호건은 폭이 21미터에 불과한 벙커와 OB지역 사이의 왼쪽 페어웨이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이곳으로 가면 세컨샷이 훨씬 유리해지기 때문이었다. 용감한 선수들만이 갈 수 있는 길이었다.

호건은 4개 라운드 모두 이 페어웨이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고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이 홀에서 버디를 잡아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의 위대한 샷들을 기념하기 위한 동판이 지금도 페어웨이 옆에 세워져 있다. 카누스티 골프링크스는 2003년 이 홀의 명칭을 ‘긴 홀’이라는 뜻의 ‘롱(Long)’에서 ‘호건의 골목(Hogan’s Alley)‘으로 변경했다.

당시에는 영국의 볼이 지름 1.62인치였고 미국의 볼은 현재와 같은 1.68인치였는데 영국의 작은 볼은 바람 속에서 더 멀리 날아가는 장점이 있으나 러프에서는 더 깊이 박히는 단점이 있었다. 호건은 영국의 볼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생애 처음으로 영국 볼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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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디 오픈 당시 5번 홀에서 티샷을 기다리는 벤 호건.


명캐디의 도발


강풍 속에서 시작된 1라운드를 73타로 시작한 호건은 2라운드에서 71타를 쳐서 선두에 2타 차이로 따라붙더니 3라운드에서 70타로 아르헨티나의 비센조와 공동선두가 되었다.

당시에는 3, 4라운드를 같은 날에 끝냈는데 오후의 4라운드 9번 홀까지 공동선두였던 벤 호건의 긴장과 압박감은 최고로 올라갔다. 중요한 순간이었던 10번 홀은 406야드 파4 홀이었는데 오전 라운드에서 드라이버-3번 아이언으로 파를 잡고 지나갔던 홀이었다. 드라이버를 잘 친 호건이 다시 3번 아이언을 빼려고 하자 캐디 팀스가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따라오기만 하라고 경고했던 보스의 명령을 어긴 것이다.

“미스터 호건, 지금은 아침과 다른 바람입니다. 2번 아이언을 쳐야 합니다.”

갑작스런 캐디의 도발에 멈칫한 호건은 바람을 체크한 후 잠시 생각하다가 2번 아이언으로 바꿔 잡았다. 그리고 캐디를 노려보며 말했다.

“만일 이 샷이 그린을 넘어가면 2번 아이언으로 당신의 목을 감아버리겠소.”

호건은 그린을 넘겨서 팀스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것처럼 최고로 강한 스윙을 했다. 2번 아이언을 떠나 그린 앞에 떨어진 볼은 깃대를 향해서 구르더니 깃대를 3미터 지나서 멈췄고 호건은 쉽게 파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긴장된 순간에 플레이어의 클럽선택을 바꾼 캐디의 용감한 행동은 팀스가 명캐디였음을 증명한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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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신'으로 불리는 벤 호건의 초상.


신의 경지에 오른 위대한 볼 스트라이커의 우승


4라운드 13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 15번 홀까지 2타차 선두를 달리던 호건은 따라오는 미국기자로부터 선두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16번 홀 파3의 티샷을 4미터에 붙인 후 기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클럽하우스로 돌아가서 나의 우승 소식을 기사로 써도 좋겠소.”

4라운드에서 68타를 쳐 합계 282타, 4타 차 우승이었는데 호건의 아홉 번째 이며 마지막 메이저 우승이었다. 68타는 카누스티의 코스 레코드였고 282타는 디 오픈 역사상 최저타의 기록이었다. 악명 높은 카누스티의 러프에 한 번도 볼을 빠뜨리지 않고 100퍼센트 페어웨이를 지킨 호건의 볼 스트라이킹 능력은 신의 경지였다.

디 오픈 역사상 가장 많이 몰려들었던 팬들과 영국 미디어는 호건에게 ‘(얼음 같은 작은 사람(Wee Ice Mon 혹은 The Wee Ice Man)’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영국 최고의 골프 기자였던 버나드 다윈은 그가 더 타임즈에서 은퇴하는 마지막 해에 호건의 우승을 보고 이렇게 썼다. “호건이 우승을 위해 4라운드에서 64타가 필요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64타를 쳤을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벤 호건의 라운드를 볼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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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호건의 디 오픈 우승을 축하하는 뉴욕 브로드웨이의 카퍼레이드 환영식 장면.


그랜드슬램과 호건슬램

대서양을 건너는 퀸 엘리자베스 호를 타고 뉴욕 항으로 돌아온 호건을 환영하는 현수막들이 항구를 덮었고, 뉴욕시는 브로드웨이에서 색종이가 날리는 카퍼레이드 환영식을 준비했다. 좀처럼 자기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호건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디 오픈의 우승으로 호건은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두 번째 선수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그랜드슬램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마스터스, US 오픈, 디 오픈을 한 해에 제패한 쾌거는 골프역사상 1953년의 벤 호건뿐이었다. 그래서 이는 ‘호건슬램’으로 불리고 있다.

벤 호건은 1953년 6개 대회에 출전했는데 메이저 3승을 포함하여 5개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호건은 그 이후 다시는 디 오픈에 참가하지 않았다.

* 박노승 : 건국대 산업대학원 골프산업학과 겸임교수, 대한골프협회 경기위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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