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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젤-JTBC LA오픈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후 동생인 에리야를 끌어안고 기뻐하는 모리야 쭈타누깐. 웃는 얼굴로 지켜보는 이는 이들 자매의 어머니인 나루몬. [사진=LPGA투어]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이강래 기자] 96년 프로 데뷔전에 나선 박세리를 만났다. 인터뷰 도중 ‘아버지’란 단어가 나오자 박세리의 얼굴에서 갑자기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엣된 얼굴의 박세리는 “골재업을 하던 아빠의 사업이 잘 될 때 따르던 사람들이 부도직후 흔적없이 사라졌다”며 “제가 골프로 성공해서 대신 복수할 거에요”라고 대답했다. 이후 박세리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세계적인 선수가 됐다.

'땅콩' 김미현은 LPGA투어 진출 초기 부모와 함께 중고차에 가재도구를 싣고 다니며 투어생활을 했다. 이런 모습이 국내 TV를 통해 방영돼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IMF 한파로 시름에 빠져 있던 국민들은 박세리의 US여자오픈 우승에 환호했지만 김미현 가족의 고군분투에도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김미현은 고단했던 미국생활을 통해 일군 부(富)로 가족과 함께 인천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20여년 전 한국인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가족애가 지난 23일 재현됐다. 그 것도 한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로스엔젤레스의 중심지 코리아타운 근처 윌셔 골프장에서, 한국기업이 후원하는 LPGA투어 경기인 휴젤-JTBC LA오픈에서다. 태국의 모리야 쭈타누깐은 박인비와 고진영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LPGA투어 156경기 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우승경험이 없는 모리야가 선두였기에, 반대로 우승경험이 풍부한 박인비와 고진영이 추격자였기에 첫 우승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맹수에 쫒기는 사슴 같던 모리야는 살얼음판 위를 걸으며 마지막까지 버텨 뜻을 이뤘다. 그 와중에 갤러리와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동생인 에리야의 눈물이었다.

선두를 달리던 언니 모리야가 마지막 홀에서 1m 남짓한 챔피언 퍼트를 남겨뒀을 때 그린 주변에서 응원하던 에리야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 장면은 TV 카메라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됐다. 눈물의 의미는 복잡해 보였다. 언니가 우승을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반대로 ‘드디어 언니가 우승하는구나!“란 감격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듯 했다.

2타차 선두 상황. 고진영이 18번 홀에서 1.2m 거리의 버디 퍼트를 성공시킨다면 모리야의 챔피언 퍼트는 중압감이 대단했을 것이다. 버디와 보기가 교차한다면 순식간에 2타가 상쇄되어 경기는 연장전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추격자 고진영의 퍼트는 크게 휘면서 홀을 벗어났고 승부는 그걸로 마무리됐다.

침착하게 마지막 퍼트를 성공시킨 모리야는 오히려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모습은 첫 우승을 꿈꿔온 지난 6년 세월의 고단함이 더 강렬하게 묻어나는 듯 했다.

TV로 중계를 지켜보던 골프팬들은 그들의 가족애에 가슴 뭉클해졌다. 모리야는 우승후 “좌절해도 인내심을 갖고 버텼다”며 “나를 지탱해 준 건 가족의 사랑과 격려”라고 말했다. 동생 에리야는 “눈물이 난 것은 언니가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며 또한 언니의 우승은 우리 가족 모두의 목표이기도 했다”며 울먹였다.

가족애는 인내심의 원동력인 듯 하다. 또한 인내심은 좌절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다. 한국여자골프의 힘은 ‘근면성’이란 유교적 직업윤리가 뒷받침되어 있다. 가장 먼저 연습장에 도착했다가 가장 늦게 떠난다는 한국선수들의 근면성은 가족애가 있기에 가능했다.

해외무대에서 성공한 선수들을 보면 ‘가족의 희생’이란 공통점이 있다. 부모와 가족 구성원 전체는 한명의 골프선수를 위해 마음과 돈, 시간 등 소중한 것을 몽땅 다 바친다. 선수 입장에선 이를 잘 알기에 연습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런 부담감이 오히려 독(毒)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성공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걸 지켜봤다.

개인주의가 강한 서구 사회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적인 정서다. 20년 전 한국선수들의 모습이 요즘 태국선수들과 오버랩된다. 모리야-에리야 자매도 아빠는 태국에서 골프샵을 운영하고 엄마가 미국에서 딸들을 뒷바라지하는 이산가족이다. 아시아가 세계여자골프를 지배하고 있는 현상은 가족의 희생을 빼고는 설명이 어려워 보인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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