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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미국의 삼총사 바이런 넬슨-샘 스니드-벤 호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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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삼총사.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벤 호건, 바이런 넬슨, 샘 스니드.


미국 최초의 골프스타 월터 하겐이 1892년 태어났고, 그 다음 세대의 골프 스타인 진 사라센과 보비 존스는 1902년에 태어났다. 이후 10년 후인 1912년 3세대 스타 플레이어인 바이런 넬슨, 샘 스니드, 벤 호건이 동시에 출생했다. 정확히 10년을 주기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미국의 골프 역사가들은 이 3세대 세 명의 선수를 ‘미국의 삼총사(American Triumvirate)’ 라고 불렀다. 이는 영국의 ‘위대한 삼총사(Great Triumvirate)’로 불렸던 해리 바든-존 테일러-제임스 브레이드에 버금간다는 의미였다. 참고로 삼총사는 원래 로마시대의 3인 집정체제에서 유래했다.

영국의 삼총사는 1894년부터 1914년까지 21년 동안에 디오픈 16승을 합작했고, 미국의 삼총사는 1936년부터 PGA투어 198승과 메이저 대회 21승을 합작했다. 1945-1946년에는 세 선수가 PGA투어 전체 대회의 70%를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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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슨-스니드-호건 비교


이번 주 '타임리프'는 바이런 넬슨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샘 스니드와 벤 호건은 계속 연재된다.

라이벌 호건을 물리친 넬슨

어린 시절부터 텍사스 주의 글렌 가든 컨트리 클럽에서 벤 호건과 함께 캐디를 하며 자랐던 바이런 넬슨은 모든 면에서 호건을 앞서 갔다. 호건보다 체격이 더 크고 얼굴도 잘 생겼으며 성격도 온순해서 가장 인기 있는 캐디였다. 세 선수 중에서 가장 먼저 PGA 투어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충분한 돈을 벌어서 가장 먼저 은퇴했다.

넬슨은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호건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갔다. 캐디 골프 대회에서는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호건을 이겨서 주니어 멤버십을 받았고, 당시 매치플레이로 열렸던 PGA챔피언십에서도 이겼고, 1942년 마스터스 연장전에서도 호건을 제압했으며, 명문 골프장에서 헤드프로를 구할 때도 함께 지원한 호건을 물리치고 취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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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벤 호건(왼쪽)과 함께 포즈를 취한 넬슨.


모던 스윙의 아버지


1924년 미국골프협회(USGA)가 스틸 샤프트를 공인했지만 프로 선수들은 히커리 샤프트를 계속 사용했다. 히커리 샤프트의 스윙은 손과 손목을 많이 써야하는데, 스틸 샤프트는 그렇게 하면 훅이 나는 문제가 있었다. 이때 스틸 샤프트를 사용하여 새로운 스윙을 개발해 낸 선수가 바로 넬슨이었다. 그래서 그가 ‘모던 스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이다.

넬슨은 손의 과대한 움직임을 없애고 팔과 어깨가 하나로 움직이는 백스윙(one-piece takeaway)을 만들어서 클럽페이스가 스윙 궤적 내내 스퀘어를 유지하도록 했다. 참고로 USGA는 새로 개발된 공과 클럽을 실험해 공인하려는 목적으로 공을 치는 로봇을 개발했다. 공을 반복적으로 스퀘어로 쳐야 하는 이 로봇의 이름은 ‘아이언 바이런’이라고 지어졌다. 넬슨 만이 로봇처럼 정확히 공을 쳐 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넬슨은 임팩트 순간에 프로 선수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스퀘어 상태를 유지했다.

Mr. Golf의 대기록

1944년 넬슨은 PGA 8승을 올리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1945년에 골프 역사에서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대기록이 나왔다. PGA투어 11연승을 포함한 총 18승의 금자탑이다. 30개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 18회, 2위 7회, 나머지도 모두 톱 10이었다. 11연승 이후 미디어는 넬슨에게 ‘Mr. Golf’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당시 PGA투어의 경쟁이 지금처럼 치열하지 않았다며 기록을 폄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샘 스니드가 26개, 벤 호건이 18개 대회에 함께 참가했다. 만만치 않은 경쟁자가 있었던 것이다. 또 무엇보다 1945년 넬슨의 평균타수가 68.33타라는 수치가 대기록의 폄훼를 막아준다. 이 기록은 2000년 타이거 우즈가 67.79타를 기록할 때까지 55년간 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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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넬슨의 젊은 시절 모습.


꿈을 이룬 후 은퇴


넬슨은 1945년에만 상금 6만 달러를 벌었는데 이는 현재의 가치로 평가하면 거의 1,000만 달러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넬슨은 더 이상 상금을 벌기 위한 골프를 치고 싶지 않았다. 1946년 시즌 중 6승을 거둔 후에 은퇴를 선언하고 고향 텍사스에 75만 평의 땅을 사서 농장을 설립했다. 이어 소원대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며 살기 시작했다. 농장은 어릴 때부터 꿈꿔온 소망이었다. 자기가 사용했던 골프 클럽은 스폰서였던 맥그리거에 돌려보내서 보관을 요청했다. 더 이상 골프를 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넬슨은 은퇴 후 골퍼로서 최초로 자기의 이름을 건 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매년 텍사스에서 열리는 바이런 넬슨 클래식이다. 1950년대에는 TV 중계방송의 해설가로 활동하며 시청자들에게 스윙의 기본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켄 벤추리, 톰 왓슨 등 후배 선수들의 스윙 코치와 멘토의 역할을 하기도 했던 넬슨은 골프 선수 중에서 최고의 젠틀맨으로 인정받았고, 2006년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P.S. 아래에 링크하는 동영상에서 넬슨의 스윙을 볼 수 있는데 임팩트 순간에 왼쪽 무릎을 굽히는 동작이 특이하다. 아주 유명한 넬슨의 주저 앉는(sitting) 동작이다. 넬슨의 스윙은 스퀘어 상태를 오래 유지하고, 1달러 화폐 크기의 가장 완벽한 디봇이 떨어져 나갔다. 넬슨 이후에 어떤 선수도 그 동작을 따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 바이런 넬슨의 스윙 영상




* 박노승 : 건국대 산업대학원 골프산업학과 겸임교수, 대한골프협회 경기위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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