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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어떤 야구인의 야구계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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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017년 개정판 표지.


# 유명한 이야기꾼 박민규의 출세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003년)은 역설의 미학으로 가득하다. 요즘 화제가 된 영화 <1987>을 언급하지 않아도, ‘정의사회 구현’을 내건 1980년대는 진짜 정의롭지 않았다.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하고, 인천을 연고로 한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야구팀도 그랬다. ‘슈퍼스타들’을 표방했는데 승률은 1할2푼5리였다. 소설 후반부 웃음이 빵 터지는 유명한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야구를 추구하는데, 갑자기 야구가 잘되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 중 다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코미디에 가까운 플레이에 주력한다. 작품은 슈퍼스타를 동경하는 스포츠, 그 속에서 어차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슈퍼스타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짜 좋아하고, 진짜 즐기면 그것이 최선이다. 꼭 슈퍼스타일 필요는 없다.

# 대전 출신의 A 씨는 서울대 야구부였다. 50대 중반이 된 지금도 1승도 올리지 못했던 서울대 야구부 시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라 일에 항의할 일이 있어 대학을 9년 반이나 다닌 끝에 1994년 대기업에 입사했다. 서울대의 1승은 그가 졸업한 후 10년이 지나서야 나왔다. 2004년 199패 1무 끝에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1승에 성공해 화제가 됐다. 2013년 서울대는 15개월에 걸쳐 '서울대다움 찾기' 프로젝트를 진행해 제1호 인물로 서울대 야구부를 선정했다(2호는 지금보다는 이미지가 제법 좋았던 반기문 UN사무총장). 물론 A 씨는 누구보다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 ‘서울대를 대표할 수많은 인물들 중 엄선해서 탄생한 최초의 인물에 제가 선정됐습니다. (중략) 뻥으로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까봐 말씀드립니다만 절대 뻥이 아닙니다. 다만 1호 인물에 개인이 아닌 단체(서울대야구부)가 선정되었을 뿐이며 저는 무려 9년 반을 서울대 야구부로 활동했고, 서울대 야구부의 훌륭한 정신을 만들었던 주역 중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제 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으며. 개인자격으로 선정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A 씨가 지인들에게 보낸 메일의 내용이다.

# 1992년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A 씨는 서울대 야구선수로 어느 대학팀과 경기를 하고 있었다. 5회도 못 되었는데 점수차는 이미 7회 콜드게임이 될 정도로 넉넉하게 벌어져 있었다. 순수 아마추어로 구성된 서울대 야구부에게는 익숙한 상황. A씨는 마운드 위의 투수였고, 상대팀 타자들은 고의로 헛스윙을 해 삼진을 당하고 들어가는 시간절약 작전을 썼다. 그런데 좀 심했다. 상대팀 타자들은 실실 웃었고, 하늘에다 대고 스윙을 해댔다. A 씨는 분노가 일었고, 와인드업을 한 후 2구째를 바로 마운드 앞 땅바닥에 내리 꽂아버렸다. 심판도, 타자도 당황하고, 양 팀 덕아웃은 벤치클리어링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래도 A 씨는 상태팀 감독을 노려보며 무언의 항의를 보냈다. 심판의 퇴장명령이 나오려는 순간 몇 안 되는 관중이 기립박수와 환호성으로 A 씨를 응원했고, 상대팀 감독은 바로 타자에게 사인을 보냈다. 다음부터는 정상적으로 게임이 진행됐다. 경기 후 상대팀 감독님이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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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호 대표.


# A 씨는 휴렛팩커드엔터프라이즈의 이길호 상무(53)다. 나름 대기업에서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했고, 서울대 야구부 경험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엘리트선수들을 상대로 1승 한 번 해보겠다고 무모한 도전을 계속한 경험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힘든 일을 피하지 않고 자처해 즐기는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무는 얼마 전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대기업 임원 생활을 마치고,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일을 하기로 했다. 한국독립야구연맹 산하 서울저니맨외인구단의 대표 겸 단장을 맡은 것이다. 이 대표는 “오랫동안 꿈으로 간직해왔던 일을 맡게 되어 기쁘다. 선수들이 꿈을 이루도록 지원하는 것은 물론 리그의 발전과 성장에 기여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 이길호 대표는 스스로 야구인이라고 자부한다.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지만 분명 대학선수였으니 자부할 일이 아니라 자명한 일이다. 저니맨구단의 수장이 되면서 야구인이 다시 야구계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곳이 참 제격이다. 주목해주는 사람도 없고,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야구가 좋아, 아니 야구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는 선수들이 꿈 하나만을 고이 간직하며 모인 독립구단이다. 말이 구단대표지, 결코 빛나는 자리가 아니다. 폼 나는 일보다는, 머슴처럼 해야할 일이 많다. 세상 이치로는 더 나은 삶이 있을 법도 한데 왜 힘든 이 길을 택했을까? 묻고 싶었는데 서울대 야구부 얘기를 들은 후 궁금증이 풀려버렸다. 부디, 모처럼 야구계로 돌아온 이 야구인이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편집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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