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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시련 극복 전문가’ 서울복싱협회의 박성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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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복싱협회의 박성춘 회장.


작년 5월 어느날이었습니다. 한체대에서 개최된 서울시 전국체전 선발전에 참관했던 필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서울시 체육회에서 복싱종목이 사고단체로 지목되어 심판진들이 전원 지방심판들로 채워졌기 때문이죠. 물론 덕분에 김종섭(광주) 정희조(대구) 김종진(대천) 등 선후배 심판들과 모처럼 해후하는 즐거움은 있었지만 말입니다.

인구 1,000만의 서울 복싱은 언제부터인가 약세를 보여왔고, 이제는 소년체전과 전국체전, 대통령배 등 시도대항전에서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고민해봤습니다. 새 천 년을 전후해 동원중, 성사중, 봉화중, 목일중 등 중학교팀과 당곡고, 용산공고, 리라공고 등 고교팀이 줄줄이 해체되면서 치명타를 맞았죠. 이후 끊임없이 우수선수들이 화수분처럼 공급되던 수도 서울의 복싱은 선수 수급이 단절되면서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잠깐 과거를 보죠. 서울체고는 1985년 역사상 최고의 황금 멤버를 자랑했습니다. 정해명, 한광형, 최현실, 정경준, 최임곤(이상 경희대), 조동범, 나학균, 전병성(이상 한체대), 김석현, 김범수(이상 동국대) 등이 주인공이었죠. 이들을 조련한 학원스포츠 최고의 명장인 이흥수(54년생, 의성-용인대) 감독은 전국 무대를 쥐락펴락하며 명성을 날렸고 이듬해인 1986년 국가대표 코칭스태프로 전격 발탁됐습니다.

이후 1987년엔 바톤을 이어받은 황철순(55년-고성) 감독이 이끄는 리라공고의 조인주, 이창환, 박기홍, 김진호 등 4인방이 전국을 평정합니다. 특히 그해 청소년대표로 이창환(LF), 박기홍(F), 조인주(B) 등이 선발됐고 본선(쿠바)에서 조인주는 은메달을 획득하며 국위를 선양했죠. 이어 1992년엔 최요삼, 홍성민, 백달근, 최준욱, 임계룡 등 ‘독수리 5형제’가 활약한 용산공고가 그해 제42회 전국학생선수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96년엔 현 서울복싱협회 회장이자 당시 서울체고 코치였던 박성춘이 연맹회장배와 제46회 전국학생선수권에서 거푸 종합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주축 멤버들인 전성호, 홍민수, 서종민, 박상현, 박흥민 등 졸업생 전원을 한체대에 진학하기도 했습니다.

1997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연맹회장배 종합 준우승에 이어 제47회 전국학생선수권을 2연패하면서 주력선수들인 김지훈, 유재민, 채승석, 성국경, 강대원, 권오근, 정진우, 최인태 등 졸업생 전원이 한체대와 대전대, 용인대 등으로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옛시조 가사처럼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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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박성춘 회장, 지말오 수정자원대표, 안상우 탄다타대표.


이에 서울복싱협회는 지난해 7월 박성춘(1968년생, 순천) 회장과 배석정(63년생, 곡성) 부회장 투톱 체재로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하고 중흥을 결의했습니다. 서울 복싱 부활의 선봉에 선 박성춘 회장이 오늘 링사이드산책의 주인공입니다.

박 회장은 중2 때인 1982년 제3회 회장배스몰급 결승에서 후에 국가대표로 발탁된 나학균(장안중)과 치열한 타격전 끝에 판정승을 거두며 우승, 전격적으로 꿈나무 대표로 선발됩니다. 박성춘은 꿈나무 합숙 때 뜀박질만큼은 선두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체력이 뛰어났고, 펀치력도 준수했습니다. 중3 때는 소년체전 본선에서 금메달(모스키토급)을 획득하며 ‘제2의 허영모’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고2 때인 1985년 박성춘은 학생선수권(LF급)에서 전년도 중등부 3관왕을 차지한 최우수복서 출신의 이창환(69-리라공고, 90년 북경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맞대결해 치열한 타격전 끝에 판정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졸업반인 1986년 일본에서 벌어진 재팬컵 대회에서 우승하며 한뼘 더 성장하며 국제적인 복서로 거듭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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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서울복싱협회의 배석정 부회장, 최동식 관장, 박성춘 회장.


아쉬운 것은 바로 다음 순간에 나왔습니다. 1986년 전국체전에서 박성춘은 강원대표 전인덕과의 대결에서 두 차례 녹다운을 시키며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판정에서 지고 맙니다. 분노를 참지 못한 김상모 관장은 환멸을 느끼며 그날 이후로 복싱계를 완전히 떠납니다. 복싱을 책을 탐독하며 연구를 했고, 이를 실전에 응용해 허영모와 성광배, 김창렬, 이해준(한체대), 김대준(경희대), 이성칠(호남대) 등 기라성 같은 복서를 배출했던 신화적인 지도자가 아쉬운 퇴장하고 만 것이죠.

박성춘은 그해 12월 열린 전국선수권에서 전인덕과 또 다시 맞붙어 역시 두 차례 다운을 곁들이며 설욕에 성공합니다. 전인덕은 후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1994년 아시아선수권(플라이급)을 석권하고, 올림픽 최종 선발전(96년 애틀랜타)에서도 우승하는 등 한국의 간판복서로 성장했죠.

고교랭킹 1위 박성춘은 1987년 한국체대에 입학했지만 간염이란 병마가 찾아와 정상적인 훈련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해 4월 벌어진 김명복배에서 신주섭(대구대), 양석진(동아대), 이범엽(동아대)을 차례로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7월 벌어진 88서울올림픽 3차 선발전에서 양석진(동아대), 조동범(한국체대)과 함께 삼각편대를 이루던 국가대표 김오곤(67년-마산)을 준결승에서 2회 KO로 눕히며 건재를 과시했습니다. 결승에서 오영호(작고)에게 석패한 것이 무척 아쉬웠죠.

박성춘은 그해 전국체전에서 또 다시 숙적 양석진(베이징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과 맞붙어 판정승을 거두며 결승에 진출합니다. 양석진 개인으로선 한 선수에게 연패한 것은 처음이었죠. 그러나 결승에서 상대전적 5승 1패의 앞도적 우세를 기록했던 국가대표 박종심(전남체고-동국대)에게 패했습니다. 그리고 링을 떠나고 맙니다. 간염의 휴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치명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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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춘 회장(왼쪽)과 허기주 국가대표팀 복싱코치.


박성춘은 대학 3학년 때인 1989년 10월 양친이 불의의 사고로 한날 한시에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맛봅니다. 추스릴 수 없는 이 슬픔은 박성춘의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삶의 변곡점을 만들었습니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후 무녀독남인 그가 뼈에 사무친 외로움과 살을 저미는 절망을 어찌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양친은 나란히 45년생으로 44세에 삶을 등졌는데 특히 부친은 동양화가로서 국선에 입상한 예술인이었습니다. 박성춘은 이후 숙소를 나와 자취를 하면서 등하교합니다. 선후배들에게 위축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였죠.

졸업 후 1995년부터 3년 동안 서울체고 강사를 거쳐 1999년부터 3년 동안 모교인 한체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박성춘은 아테네식으로 조련해 소속 팀을 여러 차례 종합우승으로 이끌며 지도자로 능력을 인정 받습니다. 그의 지론은 선수의 장점을 살려 지도하면 단점은 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아대 감독을 역임한 손영찬(43년생, 부산) 선생은 “박성춘 회장은 연맹 이사회 등 공적인 자리에서 서슴치 않고 직언할 수 있는 복싱인”이라 평했습니다. 서울시협회 수석 부회장을 지낸 이시우(40년생, 서울) 씨는 “비린내(?) 나지 않는 참신한 지도자”라며 칭찬했습니다.

이렇게 평판이 좋은 박성춘이 서울시협회 수장에 취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든든한 한체대 선후배들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특히 후배 허기주(70년새, 곡성) 현 대표팀 코치는 서울복싱협회의 든든한 조력자였습니다. 그는 고향 선배인 배석정(63년생, 곡성) 현대자동차 이사를 수석 부회장으로 추천하여 서울복싱협회가 안정을 취하도록 도왔습니다. 허기주는 1987년 청소년대표와 1990년 서울컵 국가대표를 지낸 정통파 복서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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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복싱협회의 임창용 심판위원.


배석정 부회장은 영산포중-전남체고-청주사대를 거친 복싱인 출신으로 이례적으로 현대자동차에서 직장인으로 성공한 분입니다. 한해 운영비만 수천 만 원이 드는 서울복싱협회 예산의 상당 부분을 소리소문없이 지원한다고 합니다. 또한 서울복싱협회에서 백의종군하며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국가대표출신의 최동식(77년생, 용산공고-청주사대) 관장은 현역시절 전국체전 8연패의 송학성을 비롯해 용인대 출신의 국가대표 3인방인 신학출, 이창윤, 황성범, 그리고 경희대 출신의 구재강, 서울시청의 최익현 등을 꺾은 바 있는 수준급의 복서였습니다.

여기에 얼마 전 끝난 서울시협회장기 대회에서 최우수심판상을 받은 동아대 출신의 임창용(61년생, 상주) 관장도 공명정대한 포청천으로 서울복싱협회를 돕고 있습니다. 경북 심판장과 국가대표 코치를 거쳤는데 그와 관련해서는 오래전 경북 시합 때 일어난 비화가 생각납니다. 당시 경북체고 코치는 그의 절친이자 현재 부탄 대표팀 감독인 정창구(60년생, 경주)였죠. 점촌체육관 선수와의 경기에서 동점이 나와 5명의 부심들이 버튼을 눌러 승패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승자를 결정했는데 임창용 심판은 친구인 정창구를 외면하고 소신껏 상대방쪽 코너에 승리의 버튼을 눌렀습니다. 이 일화는 지금도 많은 복싱인들에게 회자되는 에피소드죠.

아무튼 이제 서울복싱협회의 박성춘 회장이 좌절과 낙담을 떨치고 무쏘의 뿔처럼 끊임없는 정진하길 바랍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평론>에서 전쟁에 한 번도 휘말리지 않고 평화를 오래 지속시킨 나라는 없다. 만약 있다면 그런 나라는 스스로 무기력해지거나 내분에 직면한다고 썼습니다. 이 말은 어느 국가나 조직이나 고통과 충격이 없다면 역설적으로 발전이 없다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박 회장은 주변의 지인들을 만나 새로운 청사진의 밑그림을 그리면서 내년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굳은 의지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의 각오가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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