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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골프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3대 역전드라마 (1) - 1913년 US오픈 : 프란시스 위멧(1893-1967)

미국의 <골프채널>에서 골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3대 역전드라마를 선정했다. 3번 모두 당대 최고의 선수가 메이저 대회에서 무명의 선수에게 역전패하여 골프역사가 바뀌는 스토리이다. 첫 번째는 1913년 US 오픈에서 해리 바든을 꺾은 아마추어 골퍼 프란시스 위멧(Francis Ouimet), 두 번째는 벤 호건과 연장전을 벌이며 역전승 했던 1955년 US오픈 챔피언 잭 플렉 (Jack Fleck), 세 번째는 2009년 PGA 챔피언십에서 타이거 우즈에 역전승한 양용은의 이야기가 선정되었다. 감동적이고 중요한 골프역사이므로 그 사실들을 뒤돌아 본다. 첫 번째 이야기는 당연히 프란시스 위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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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아마추어 프란시스 위멧(오른쪽)과 10살 꼬마 캐디 에디 로리.


최초의 미국태생 US오픈 챔피언 존 맥더머트(John McDermott)

US오픈이 처음 개최된 1895년부터 1910년까지 16년 동안 우승자는 언제나 영국에서 이민 온 골퍼들이었다. 당시 골프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골퍼들은 기술적으로 미국의 골퍼들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했다. 수모를 겪던 미국 골프계에서는 미국태생 챔피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1911년 드디어 현재까지도 최연소 우승기록으로 남아 있는 19세의 미국 토종 존 맥더머트가 우승컵을 차지했다.

미국 골프계에는 큰 경사였지만 대서양 건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영국 골프계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1912년 US오픈에서 맥더머트가 2년 연속 우승을 하자 영국에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테니스, 육상, 요트 등에서 이미 미국에 밀리면서 위기의식을 가졌던 영국은 골프에서 우월성을 확인하고, 아직 미국이 골프종주국인 영국을 따라 오려면 멀었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수퍼스타 해리 바든

당시 세계 골프의 최고 스타는 디 오픈 5승(후에 1승을 추가하여 6승이 됨)과 1900년 US 오픈을 우승했던 해리 바든이었는데, 전성기의 타이거 우즈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런던타임즈>의 노스클리프 회장은 바든에게 1913년 미국 US오픈에 출전하여 우승컵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모든 경비를 지원할 테니 미국 골프를 손 봐주고 영국의 자존심을 회복시키라는 요청이었다. 노스클리프 회장은 바든의 컨디션이 나쁠 것에 대비하여 1912년 디 오픈 챔피언 테드 레이(Ted Ray)를 함께 보내서 확실하게 미국을 제압할 계획을 세웠다.

영국은 바든이 디오픈에 출전한 후 US 오픈으로 갈 수 있도록 미국 USGA에 6월의 US오픈을 9월로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USGA에서는 해리 바든이 출전한다는 소식 하나로 개최 날짜를 연기해 주었다. 역사상 US 오픈의 개최 날짜가 변경된 경우는 이때 한 번뿐이었다. 바든의 출전소식이 알려지자 미국의 언론에서는 “미국 선수들은 이제 2위를 위한 경쟁을 해야 한다”고 보도 하면서 바든의 우승을 기정사실화했다.

캐디 출신 20살 아마추어 프란시스 위멧

1913년 US오픈은 보스턴 근처의 ‘더 컨트리 클럽(The Country Club)’에서 개최되었는데 위멧은 11살부터 그 클럽의 캐디를 하며 골프를 배웠다. 더 컨트리 클럽 17번 홀의 길 건너에 살았던 위멧의 가정은 가난하여 감히 골프라는 스포츠를 상상할 수 없었지만, 소년 위멧의 골프 열정은 강했다.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위멧이 골프채를 잡는 것 조차 싫어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꿈을 지켜주고 싶어했다.

아마추어 골퍼로서 존재감이 없었던 위멧은 1913년 6월 매사추세츠 주 아마추어 선수권을 우승하면서 US 아마추어 선수권의 출전자격을 받았고, US오픈 직전에 열렸던 US 아마추어에서 16강에 올라간 것이 최고 성적일 뿐이었다. USGA의 왓슨 회장은 그를 눈 여겨 봐왔고, 흥행을 위해 그 지역 출신인 위멧을 특별 초대했다. 위멧은 출전자 명단에 자기 이름이 있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US 오픈이 9월로 연기되지 않았더라면 위멧의 출전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 컨트리 클럽의 멤버는 보스턴 근처의 최고 부자들이었는데 신분의 차별이 확실했던 그 당시에 자기들의 캐디가 US 오픈에 출전한다는 뉴스를 무시해 버렸다. 스무 살짜리 아마추어인 위멧의 출전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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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후 갤러리와 포즈를 취한 10살 꼬마캐디 에디 로리.


10살짜리 캐디 에디 로리(Eddie Lowery)

위멧의 캐디를 하기로 했던 12살 소년 잭 로리가 있었는데, 그만 선생이 발견하여 학교로 데려가 버렸다. 대신 에디 로리라는 10살짜리 동생이 대신 나타나서 자기가 캐디를 맡겠다고 졸라댔다. 사진처럼 자기 키만한 골프 백을 메고, 예선 2 라운드와 본선 4 라운드를 따라 올 수 있을지 의심이 되었지만, 값비싼 캐디를 고용할 돈이 없었던 위멧은 로리와 함께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위멧의 백 속에는 겨우 10개의 클럽뿐이라 다른 선수들의 백 무게에 비해 훨씬 가벼웠다.

훗날 캘리포니아로 간 로리는 백만장자가 되어 위멧 박물관과 재단에 거금을 기부했고, 평생 동안 위멧과의 우정을 이어갔다. 형편이 어려운 아마추어 골퍼들을 도와 주었고, 켄 벤추리나 하비 워드 같은 유명 아마추어 골퍼들의 대부가 되어 많은 일화들을 남기기도 했다. 위멧과 로리는 함께 캐디 명예의 전당에도 들어갔는데 로리는 그날 캐디를 함으로써 자기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1913년 US 오픈의 개막

당시에는 모든 출전선수가 2 라운드의 예선을 통과해야 했는데 해리 바든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선 결과 테드 레이가 148타로 1등, 바든 151타 그리고 위멧도 152타 5위로 통과했다.

본선 첫날 36홀이 끝나고 바든 147타 선두, 레이 149타에 위멧이 151타 7위으로 바짝 따라 붙었지만 아무도 위멧의 존재를 눈 여겨 보지 않았다. 예상대로 6위까지 모두 영국 출신이 차지했고, 관중들 속에는 노스클리프 회장과 영국 최고의 골프기자였던 버나드 다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교환하고 있었다.

36홀을 끝내야 하는 둘째 날 심한 비바람이 불었다. 세 번째 라운드가 끝났을 때 역시 바든과 레이가 225타로 공동 선두였고, 다른 미국 프로들은 모두 선두 경쟁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위멧이 225타로 공동 선두로 들어왔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위멧에게 쏠렸고 실낱 같은 희망을 걸게 되었지만 스무살 짜리 아마추어가 바든을 꺾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4라운드를 먼저 스타트한 레이가 79타를 쳐서 304타로 선두가 된 것을 보고 출발한 위멧은 얼마 후 바든도 304타로 끝난 것을 알게 되었다. 위멧은 이제 6홀을 남기고 2타 차로 뒤져 희망이 없어 보였고 클럽하우스에서는 노스클리프 회장이 영국의 우승을 축하하고 있었다. 위멧이 나머지 6홀에서 2언더를 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멧은 13번 홀에서 칩인 버디를 하여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오게 만들더니, 17번 홀에서 또 버디를 하여 드디어 동타가 되었다.

17번 홀 그린은 위멧이 자기 방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자란 곳인데 결정적인 순간에 위멧에게 버디를 선사한 것이다. 버디 퍼트를 성공시킬 때 미국 응원단이 지른 함성소리는 집에서 위멧의 선전을 기도하던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이제 아무도 위멧을 얕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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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연장전. 왼쪽부터 해리 바든, 프란시스 위멧, 테드 레이.


연장전 18홀

연장전이 열리는 다음 날에도 비가 내렸다. 아침 일찍 비가 오는 것을 보고 바든은 자기가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날씨와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위멧도 자기가 유리하다고 믿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수십 번을 돌아본 홈코스였기 때문이었다. USGA는 위멧에게 경험 많은 새 캐디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자기의 백을 잡고 울고 있는 로리를 교체할 수는 없었다.

위멧은 자신의 골프 영웅과 처음으로 함께 라운드하게 돼 떨렸지만 차분한 플레이를 펼쳤다. 연장 9홀이 끝난 후 바든, 레이, 위멧이 모두 38타로 동률이었다. 이에 위멧은 바든과 레이도 특별한 것이 없는 골프선수이고 자기가 싸워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10번 홀에서 파를 하여 1타차 선두가 된 위멧은 끝까지 리드를 지키며 US 오픈 우승컵을 지킬 수 있었다. US 오픈 사상 최초의 아마추어 챔피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위멧 72타, 바든 77타, 레이 78타. 환호하는 관중은 어린 캐디 로리를 위해 현장에서 100달러를 모금해서 선물했는데 관중 속에는 위멧의 아버지도 섞여있었다.

위멧이 남긴 역사적 의미

위멧의 우승은 영국의 침략을 막아내고 미국을 위해 우승컵을 지킨 것 이상의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부자와 엘리트 계층의 전유물로 간주되던 골프를 캐디 출신인 천민이나 평민들도 잘 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대회를 계기로 골프 대중화의 길이 열리면서 1912년 미국의 골프 인구가 35만 명이었는데 1922년까지 20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위멧은 골프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타임>지의 표지 모델이 되기도 했다. 1914년, 1931년에 US 아마추어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US 오픈과 US 아마추어를 모두 우승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1951년에는 세인트 앤드류스(St. Andrews)의 명예 캡틴이 되는 등 평생을 최고의 아마추어 골퍼로 살았다. 더 컨트리 클럽은 우승 후 40년이 되던 1953년이 되어서야 명예 회원 자격을 주었는데 “챔피언이 되어도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차별의 전통 때문이었다.

영화 트레일러 영상



영화 “The Greatest Game Ever Played”

위멧의 이야기는 <내 생애 최고의 경기(The Greatest Game Ever Played)>라는 라는 제목의 소설과 영화로도 유명하다. 필자의 미국 유학시절 학교에서 여러 번 보여 주었고 골프 채널에서도 반복적 방영해 주는 단골 프로그램인데 한국에서 학생들에게 해설해 주며 함께 감상했던 경험도 있었다.

위멧이 축하 관중 속에서 아버지와 조우하는 장면은 뭉클하다. 이 영화는 진지한 골퍼라면 꼭 한번 보아야 하는 명작이다. 한국에서 개봉되지 않았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쉽게 볼 수 있으므로 골프과정을 교육하는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꼭 보여주기를 바란다.

* 박노승 씨는 골프대디였고 미국 PGA 클래스A의 어프렌티스 과정을 거쳤다. 2015년 R&A가 주관한 룰 테스트 레벨 3에 합격한 국제 심판으로서 현재 대한골프협회(KGA)의 경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건국대 대학원의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역사와 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위대한 골퍼들의 스토리를 정리한 저서 “더멀리 더 가까이” (2013), “더 골퍼” (2016)를 발간한 골프역사가이기도 하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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