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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작업복 입고 식사대접한다’ - WBA 밴텀급 챔피언 박찬영의 라이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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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을 획득한 후 라커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박찬영 챔프.


화순땅이 낳은 명복서

오늘 링사이드 산책의 주인공은 한국의 14대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인 박찬영(63년생, 화순, 동아체)입니다. 그는 헤비급, 웰터급과 함께 황금의 체급으로 불리던 밴텀급(WBA) 챔피언으로 1980년 11월 프로에 대뷔해 91년 9월 은퇴할 때까지 38전 31승(14KO) 2무 5패를 남긴 테크니션이었죠.

박찬영은 1963년 전남 화순 태생으로 6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 서울로 상경해 생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3월 박찬희가 미구엘 칸토(멕시코)를 상대로 세계챔피언 벨트를 따내는 것을 봤고, 그 길로 노량진에 있는 동아체육관을 찾아갑니다. 김윤구(54년생, 청도) 사범에게 체계적으로 기본기를 배운 박찬영은 8년 후 세계 정상에 올라 한국복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죠.

참고로 전남 화순도 담양처럼 스타급 복서들이 많이 배출된 고장입니다. 국내 최초로 동체급 양대 기구(플라이급-WBA, WBC)를 석권한 치타 김용강(65년생) 챔프를 비롯해, 황철순(55년생, 경남 고성)을 5차례나 제압한 1975년 킹스컵(밴텀급) 은메달리스트인 국가대표 박인규(56년생),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플라이급) 금메달리스트인 이창환(69년) 등 걸출한 복서들이 탄생했죠. 참고로 역사적으로는 시대를 앞서간 개혁자로,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고시에 합격하고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개혁의 강공 드라이브를 걸었던 정암 조광조가 화순군 능주면에서 37살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능주면은 1989년 미스코리아 선(善) 고현정(71년생, 화순)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또한 김삿갓(본명 김병연)이 전국을 떠돌다 지친 몸으로 말년에 화순에 들렸는데 지역의 명소인 적벽의 풍광에 매료되어 화순군 동북면에 정착해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고장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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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장정구 챔프, 현병훈 KPBF회장, 박찬영 챔프.


주먹에 얽힌 비화

본론으로 돌아가 박찬영은 1980년 2월 서울신인대회에 첫 출전해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해 11월 프로복서의 등용문인 MBC 신인왕전에 출전해 4연승을 거두며 결승에 진출했지만 이경수에게 판정으로 패하며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물죠. 박찬영은 이후 중견 복서인 김삼용(서울체), 전찬중(상원체) 등과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어느덧 10전을 싸웠지만 KO승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주변에선 펀치력이 없는 선수라고 평가절하한 면이 있었지만 여기엔 숨은 비화가 있죠. 박찬영은 데뷔 초 어느날 친구와 술좌석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화가 뻗쳐 올라 그만 맨 주먹으로 시멘트 벽을 강타하면서 정권이 함몰되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그후 트라우마 때문에 링을 떠날 때까지 오른손을 맘껏 휘두르지 못했다고 후에 회고했죠. 아무튼 이때 동아김현치 회장은 박찬영에게 모험을 건 승부수를 띄웁니다.

인상적인 두 번의 원정 패배

1982년 3월 당시 밴텀급 국내 6위이자 10전 7승(1KO) 2무 1패의 일천한 커리어의 박찬영에게 대뜸 두 번이나 세계챔피언에 오른 화려한 관록의 오쿠마 쇼지(51년생생)와 적지인 일본 동경에서 세계랭킹전을 주선한 것입니다. 당시 오쿠마 쇼지는 박찬희(57년생, 대구)를 꺽고 차지한 WBC 플라이급 타이틀을 4차 방어전에서 안토니오 아벨라(멕시코)에게 7회 실신 KO패 당한 상태로 독을 품고 재기전을 준비한 상태였죠. 이 경기서 박찬영은 예상을 뒤업고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지독한 텃세에 고개를 숙입니다. 3명의 심판이 공히 1포인트 우세로 오쿠마의 손을 들어줬죠. 오쿠마는 한국 복서와 총 9전 전승(3KO)을 기록했죠.

정확히 1년후인 1983년 3월 박찬영은 이번엔 태국으로 원정을 가 그 유명한 태국의 복싱영웅 카오사이 갤럭시(59년생)와 한판 승부를 벌입니다. 갤럭시는 후에 WBA 주니어 밴텀급 세계 챔피언에 등극하며 무려 19차 방어에 성공(16차례 KO방어)했던 탈(脫) 아시아권 복서입니다. 1982년부터 1991년까지 한국 복서와 13차례 격돌해 전승에 11KO를 기록한 한국킬러이기도 했죠. 1983년 당시 카오사이는 만 24살의 전성기에 19전 18승(17KO) 1패를 기록 중이었고, 특히 12연속 KO행진 퍼레이드를 벌일 때였습니다.

박찬영은 이 대결에서도 4회 한 차례 다운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파이팅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비록 홈 텃세에 의해 또 다시 패배를 당헸지만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갤럭시와 이토록 초접전을 벌인 한국복서는 박찬영이 유일했다는 사실이죠. 이 경기를 주선한 이영원(37생년, 작고) 프로모터가 그렇게 회고한 바 있습니다. 갤럭시는 통산 50전 49승(43KO) 1패를 기록했는데 이 선수와 맞붙어 단 한 차례도 다운당하지 않고 마지막 종소리를 들은 유일한 선수가 필자의 친구이기도 한 필승체육관의 엄재성(63년생, 곡성)입니다. 이 친구는 당시 13전 9승(1KO) 4패을 기록 중이었는데 나중에 세계 챔피언에 등극하는 장태일과 맞대결해 판정승을 거두는 등 만만찮은 기량을 지닌 복서였죠. 하지만 우박처럼 쏟아지는 카오사이의 맹공에 경기 후 한쪽 눈을 실명하면서 링을 떠난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가 1984년 3월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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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무구루마의 안면을 강타하는 박찬영(왼쪽).


원정에서 챔피언이 되다

아무튼 박찬영에게 두 차례의 원정경기 패배는 성장통으로 승화되어 정상급 복서로 환골탈태하는 기폭제가 됩니다. 이후 박찬영은 김지원과 두 차례 무승부를 기록한 세계랭커 넵탈리 알라막(필리핀)과 강타자 어니 카타루나(필리핀)를 꺽는 등 파죽지세로 10연승을 달리면서 세계랭킹 1위가 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1987년 5월 WBA 밴텀급 챔피언인 일본의 무구루마 다쿠야(62년생)의 지명도전자가 됐죠. 당시 박찬영은 28전 24승(6KO) 3패 1무였고 챔피언 무구루마는 27전 25승(19KO)1패1무였습니다. 박찬영은 6회 이후 일방적인 난타로 11회 KO승을 거두며 적지에서 세계 정상에 등극합니다.

당시 박찬영의 트레이너였던 김윤구 씨는 “워낙 성실하게 훈련하는 박찬영은 기량이나 체력 면에서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왔었다”고 회고했죠. 그러나 박찬영은 이 타이틀을 5개월 후 열린 1차 방어전에서 푸에르토리코의 ‘검은 자객’ 윌프레도 바스케스(62년생)에게 10회 KO패를 당하며 내주고 말았죠. 당시 30전 25승(21KO) 3패 1무 1NC의 강타자 바스케스는 WBC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미구엘 로라에게 완패했고, 김태식과 인상적인 일전을 벌인 안토니오 아벨라(멕시코)에게도 8회 KO패 당하는 등 슬럼프 기미가 보였다는 점입니다. 만만한 상대로 고른 것이었죠.

그런데 고양이인 줄 알고 선택했던 바스케스가 아뿔사 범의 새끼일 줄이야! 또 박찬영은 그만 체중조절에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평소 10kg 이상을 감량하던 박찬영은 경기를 불과 이틀 앞두고 적정체중을 맞췄지만 허기를 참지 못하고 그만 음식을 먹는 바람에 체중이 불었고, 결국 독약같은 이뇨제를 무려 10알이나 복용하면서 컨디션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결국 안방에서 바스케스에게 참패를 당했죠. 김윤구 트레이너는 “성실한 찬영이가 챔피언이 된 후 멘탈 면에서 초심을 잃지 않았나” 하고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죠. 후에 바스케스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명복서 반열에 우뚝 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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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자 바스케스와 방어전을 치르고 있는 박찬영 챔프(우측).


짧고 굵은 세계챔프, 얇고 긴 인생살이


박찬영은 한 체급을 올리며 감량의 고통에서 벗어나자 주먹에 불이 붙었고, 4연속 KO행진을 기록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이를 감지한 동아 김현치 회장은 1989년 12월 당시 WBC 슈퍼 밴텀급 챔피언인 다니엘 사라고사(57년생, 멕시코)를 불러들여 2체급 석권의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박찬영은 36전 30승(13KO) 2무 4패를 기록 중였고, 챔피언 사라고사는 44전 39승(22KO) 4패 1무였죠. 이 경기는 필자도 현장에서 참관했는데 박찬영의 불꽃 파이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왼손잡이인 사라고사의 예봉에 맞서 과감하게 라이트 카운터 펀치를 날렸습니다. 확실하게 경기를 지배했지만 1ㅡ2 판정에 고개를 숙이며 2체급 제패에 실패합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WBC회장이던 멕시코의 슐레이만이 참관했기에 홈링이었지만 판정에서 불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박찬영의 복싱 인생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죠. 박찬영은 후에 필자에게 “모친께서 태몽에 별이 한번 크게 치솟아 오르다가 떨어지는 꿈을 꿨기 때문에 한 번밖에 챔피언을 못할 운명이었다”며 미련과 아쉬움도 없다고 일갈했죠. 이후 박찬영은 일본에 스카우트되며 KO승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지만 지독한 향수병을 이겨내지 못해 곧바로 1991년 가을 귀국하면서 정든 링과 이별을 고했죠.

박찬영은 은퇴 후 열심히 사회생활을 한 모범적인 복싱인 중 한 명입니다. 한때는 열차 안에서 포터를 밀면서 판매원 생활을 한 것은 물론, 유통업을 거쳐 지금도 인천 학익동의 노점에서 아내와 함께 생필품을 팔면서 생활하고 있죠. 박찬영은 근면한 성품 덕분인지 현재 4채의 주택을 보유하며 월세를 받으면서 안정된 삶을 영유하고 있습니다. 복싱인들의 귀감이 될 만합니다.

그는 가끔 일과를 마치고 작업복 차림으로 필자의 체육관에 방문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저와 문성길 챔프에게 식사를 대접합니다. 그리곤 한마디 멘트를 던지곤 하죠. “양복 입고 돈 빌리는 것보다 작업복 입고 식사대접하는 것이 훨신 좋은 거 아닌가? 안 그런가!”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박찬영 챔프의 원숙한 중년의 채취가 느껴집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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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길 챔프와 박찬영 챔프(우측).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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