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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WBA 페더급 챔피언 박영균과 담양 출신 스타복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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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정동환 심판, 박영균 챔프, 박성춘 회장.


인트로 - 박성춘 서울복싱명맹 회장

지난 2월 어느날 서울 신인대회를 참관하기 위해 오랜만에 경기장인 한체대를 찾았습니다. 작년에 서울복싱연맹 회장으로 취임한 박성춘(68년생, 한체대) 후배를 늦게나마 축하할 겸 참석했죠. 박성춘 회장은 순천금당고 시절 ‘제2의 허영모’로 불릴 정도로 탁월한 기량을 보인 유망주로 고3 때인 1986년 전국무대를 평정했고, 제2회 재팬컵에서 라이트플라이급 금메달을 땄죠. 또 한체대에 입학한 1987년에는 김명복배 결승에서 제10회 킹스컵 금메달리스트인 이범엽(62년생, 동아대)을 꺾고 정상에 올랐고, 그해 7월 벌어진 88서울올림픽 3차 선발전에서는 국가대표 강타자이자 한미국가대항전 2연패에 빛나는 김오곤(67년생, 당시 상무)을 2회에 RSC로 제압하는 등 짧지만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습니다. 후에 지도자로 변신해 서울체고에서 근무하던 박성춘은 1996, 1997년에 채승석과 김지훈, 강대원, 권오근 등 초고교급 선수들을 아테네식으로 조련해 전국을 평정했습니다. 명지도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모처럼 해후한 박성춘 회장과 담소를 나누던 중 WBA 페더급 챔피언 박영균(67년생, 담양)과 1989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이며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동메달리스트인 정동환(69년생, 담양, 현 서울연맹 심판위원)이 동시에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을 인사 시키는 과정에서 두 복서가 담양고 2년 선후배 사이라는 사실을 필자는 처음 알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담양 출신의 복서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하나둘씩 스쳐 지나가더군요.

아마복싱 사상 최고의 퀄리티를 지닌 복서로 평가받는 김동길(61년생)을 비롯해,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은메달(라이트 헤비급)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국가대표에 전국체전 10연패의 위업을 쌓은 고영삼(70년생), 그리고 1987년 세계청소년선수권 은메달리스트이자 WBC 슈퍼플라이급 세계챔피언으로 5차 방어에 성공한 조인주(69년생), 투타임 동양 주니어밴텀급 챔피언이자 IBF 주니어밴텀급 챔피언인 장태일(63년생)도 모두 담양 출신의 보석 같은 선수들이었죠. IBF 플라이급 챔피언 최창호(63년생, 극동체)는 외가가 담양이었습니다.

전남 담양군은 고산 윤선도와 가사문학의 쌍벽을 이루던 송강 정철이 머물던 곳입니다. 정철은 18년간의 담양 유배생활을 통해 담양의 풍광에 취해 이 고장에서 사미인곡과 성산별곡이라는 국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탄생시켰죠. 또한 담양 출신의 정치인으로는 88 서울 올림픽 때 대한체육회장과 IOC 위원을 지낸 여남 조상호 회장이 기억납니다. 또 당대 최고의 판소리 명창으로 ‘국창’으로 불리던 서편제의 대가 박동실의 고향이기도 하죠. 참고로 명창 박동실의 외손자가 1985년 33세에 요절한, <하얀 나비>를 부른 가수 김정호(52년생 광주)입니다. 외조부의 영향 때문인지, 그의 노래에는 한(恨)이 서려있는 듯 애절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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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세계챔피언들. 왼쪽부터 이경연, 장태일, 박영균, 정선용.


담양의 간판복서 박영균

본론으로 들어가서 한국프로복싱 사상 최초로 페더급 세계타이틀을 정복하고, 8차 방어에 성공한 박영균은 담양을 대표하는 복서입니다. 현재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는 삼성체육관(관장 신정훈, 73년생)에서 늦깎이 트레이너 수업을 받고 있죠. 후에 체육관 운영을 염두에 두고 있는 박영균 챔프는 이 곳에서 지도자로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는데, 6살이나 어린 후배인 신정훈 관장에게 체육관 내에서는 깍듯이 관장님이란 존칭을 쓸 정도로 겸손하고 예의가 바릅니다.

박영균은 야구의 이승엽과 축구의 박지성에 비견될 정도로 인품이 좋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박영균이 가장 좋아하는 복싱 선배가 같은 수경사 출신이자 고향 선배인 장태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하늘 같은 고참이지만 말보다는 행동으로 박영균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심어줬다고 합니다. 장태일은 세계챔피언 출신의 유제두 관장이 배출한 세계챔피언으로 현역시절 정병관, 오장균, 권순천, 안내기, 유옥균 등과의 라이벌전에서 승리하는 등 통산 26승(11KO)1무4패를 기록한 장신의 사우스포였고. 큰 거 한방은 없지만 콘택트 능력이 뛰어난 복서였죠.

1987년 5월 권순천을 꺾고 IBF 주니어밴텀급 세계 정상에 오른 박영균은 1차 방어전에서 인도네시아 원정길에 나섰다가 에디 피칼 선수에게 1-2 판정으로 패해 벨트를 풀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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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체고 강사 시절의 김동길(오른쪽).


김동길과 고영삼을 낳은 창평면

송강 정철이 귀양살이하며 사미인곡을 탄생시킨 창평면은 아시안게임 2연패(82뉴델리, 86서울)와 세계선수권(81년 뭔헨) 은메달리스트인 세계적인 복서 김동길의 출생지였습니다. 또 이 김동길의 하이테크한 복싱 예술에 심취해 복싱에 입문한 복서가 바로 창평면 출신의 고영삼입니다. 고영삼은 창평에서 초중고를 나왔죠. 담양에는 복싱 체육관이 없기에 대부분 선수들이 1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광주에 있는 광주체육관(관장 이재인)에서 복싱을 수학했는데, 박영균만큼은 광주 챔피언체육관 출신이라 합니다.

고영삼은 아마복싱계에서 절도있게 행동하는 복서로 정평이 나 있는데 1989년 호남대학에 입학해서 선배들인 채성배(헤비급), 박준호(웰터급), 진명돌(페더급) 등과 연합하며 호남대학이 전국무대를 평정하는데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고영삼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미들급) 선발전에서 김보안(상무)에게 준결승에서 아쉽게 패했습니다. 하지만 1년 선배인 정동환(담양고ㅡ한국체대)이 자신을 무너뜨린 김보안을 2회 RSC로 꺽고 우승하자 흐믓했다고 회고했죠. 정동환은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습니다. 당시 감독이었던 김승미 감독은 “정동환이야말로 확실한 금메달감이었는데 코칭스태프 간에 전략전술에 이견이 있어 패했다”면서 많이 아쉬웠다고 회고했죠. 정동환(69년생, 한체대)은 1987년 담양고 3학년 때 김명복배 금메달(미들급)을 획득하며 주목을 받았고, 한체대 2학년 때인 1989년엔 킹스컵과 아시아선수권, 한미 국가대항전 등을 힙쓸며 3관왕의 대업을 이룩했죠. 특히 한미 국가대항전에서는 상대를 KO로 제압해 신준섭(84년 LA올림픽 미들급 금메달)의 후계자로 집중조명을 받기도 했던 강타자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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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시절 '헤라클레스'로 불렸던 고영삼 씨.


고영삼은 그해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치러진 71회 전국체전 미들급 경기에서 전남대표로 출전해 광주대표인 정동환과의 대결에서 초접전 끝에 승리를 거두며 첫 전국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후 10년 연속 금메달을 싹쓸이하는 대기록을 달성했죠.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않는 대기록입니다. 이후 고영삼은 일취월장해 라이트헤비급에서 1993년 제15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과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를 거쳐 1997년 동아시아대회(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스타일은 카운터 전문의 사우스포였죠.

김기수, 박찬희, 문성길, 변정일, 김지원에 이어 아마추어 국가대표 출신으로 6번째 세계챔피언에 오른 조인주도 빼놓을 수 없는 담양 복싱의 자랑이죠. 조인주는 조용하고 말이 없는 복서였습니다. 하지만 속이 깊은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동국대 88학번으로 인성이 좋았던 조인주는 가끔씩 술 한잔을 하며 동료 선후배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는데 문제는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럴 때면 리라공고 시절 절친인 이창환(69년생, 화순)이 수시로 조인주에게 용돈을 조달하며 훈훈한 우정을 과시했죠. 당시 이창환은 서울시청에 근무하면서 월급을 받는 학생(서울시립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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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날로사(필리핀)를 꺾고 세계챔피언이 된 조인주(오른쪽).


조인주와 절친 이창환

대학을 졸업한 조인주는 풍산프로모션(대표 이거성)과 계약하며 프로행을 택했고, 한국복서 킬러이자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제리 페날로사(필리핀, 39승24KO승2패1무)라는 극강의 챔피언을 맞이해 언더독의 예상을 깨고 마방렬 관장(54년생, 강진)과 호흡을 맞추며 판정승으로 정상 등극에 성공했죠. 그후 일본에서 두 차례의 방어전을 치를 때 조인주는 절친 이창환과 동행했습니다. 조인주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창환이었기에 가능했죠. 이창환은 경기 때 마방렬 관장을 보좌하며 보조 세컨을 보면서 도우미 역활도 했습니다. 조인주는 대학시절 용돈을 조달해 주던 친구를 위해 파이트머니에서 상당액을 뽑아 친구에게 전달하는 미담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인구 5만의 담양이 3명의 세계챔피언을 비롯해 4명의 국가대표 간판급 복서를 배출했으니 복싱의 성지(聖地)라 부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구 270만의 경북의 경우 세계챔피언은 IBF 미니플라이급의 초대 챔피언인 이경연(65년 봉화)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물론 경북은 국내 최초로 세계선수권 2회 연속 메달리스트이자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신종훈(89년생, 인천시청)을 비롯해 1990년 서울컵 최우수복서에 1991년 세계선수권 밴텀급 은메달리스트(91년생)인 박덕규 등 좋은 복서들이 많이 탄생한 지역이지만 세계챔피언과는 인연이 적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작금의 현실은 지역 구분 없이 총체적으로 한국은 세계챔피언과 올림픽 금메달이 요원합니다. 동양챔피언도 간신히 한 체급을 보유하고 있죠. 마치 시냇가에서 낚시대를 펼쳐들고 고래사냥을 꿈꾸는 듯한 한국복싱의 척박한 인프라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비온 뒤 땅이 굳듯 복싱 저변확대에 총력을 기울인다면 세계챔피언과 올림픽 금메달이 탄생하는 그 날이 다시 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일선에서 보면 한국복싱의 저력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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