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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한 비경기인 경보심판이 주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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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비경기인이다. 하지만 경기인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고, 더 큰 과실을 앞두고 있다.


#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생긴 학교(1938년 개교)로 동명의 도시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졌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동문 교사가 많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이해가 되는 한 선생님의 넋두리가 기억난다. “여러분은 3년만 다녀도 동문이 됩니다. 하지만 나는 30년을 근무해도 여기 동문이 될 수 없습니다.” 잘 모르겠다. 당시 이 분이 교감, 교장 등 큰 승진에서 비동문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았는지. 확실한 것은 한국의 패거리 문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참 고질병이라는 사실이다. ‘00 출신’. 그 반대말인 ‘비00 출신’. 이런 말들이 너무 쉽게 쓰이고, 현실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 사람의 능력이 그 자리에 맞으면 그만일 텐데, 이놈의 ‘출신’은 여전히 막강하다. 고시 출신, 모교 출신, 특목고 출신, 공채 출신. 우리 지역 출신. 이런 큼직한 것 말고 지역이나 조직 단위로 작은 출신들은 참 많다. 서울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통과한 사람들끼리도 법대 출신, 비법대 출신 등으로 구분된다고 하니, 참 대단하다. 그리고 이 ‘출신’은 스포츠계에도 뚜렷하게 존재한다.

# 경기인(競技人)!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는 이 단어가 스포츠계에서는 살짝 토를 달아 정말이지 널리 쓰인다(언론까지도). ‘경기’는 알겠는데 ‘경기인’은 도대체 모르겠다. “저는 경기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능프로에 나오는 ‘태릉인’처럼 우스갯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반대말인 ‘비경기인 출신’은 널리 쓰인다. 비경기 출신 임원, 비경기인 출신 태릉선수촌장 등. 역추론 하면 경기인은 ‘선수’를 말하는 것 같다. 그냥 ‘선수 출신’, ‘비선수 출신’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경기인’이라고 할까? 선수는 뭔가 없어 보이고, 경기인은 좀 묵직해서일까? 좋다. 선수 출신과 비선수 출신이라고 하자. 그러면 ‘선수’의 기준은 무엇인가? 초중고, 대학, 실업(혹은 프로)까지. 어디까지 등록선수를 하면 영원히 ‘선수 출신’의 명예를 누릴 수 있을까?

# 삼성전자육상단의 조덕호 부장(50 사무국장)은 1993년 삼성전자에 입사했고, 육상단이 창단한 2000년 4월부터 프런트로 일하기 시작했으니 육상경력은 17년이 조금 넘었다. 세계육상선수권은 2001년 에드먼턴부터 2015년 베이징까지 8회 연속, 올림픽은 2000년 시드니부터 2016년 리우까지 5회 연속, 아시안게임은 4회 연속, 유명 마라톤대회는 이봉주가 우승한 2001년 보스턴을 비롯해 시카고, 런던, 베를린, 밀라노, 토리노 대회를 다녀왔다. 육상단 20년을 채울 가능성이 높은데, 이렇게 ‘육상밥’을 오래 먹어도 영원한 비경기인이다. 10년 전쯤에는 육상잡지에 한국육상의 문제점을 토로하는 글을 실었다가 ‘비경기인 주제에’라며 엄청나게 욕을 먹기도 했다.

# 조 부장은 자기계발에 욕심이 많다. 뮤지컬배우를 하고, 2011년 사회인야구 투수로 데뷔해 학창시절의 꿈은 야구선수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공대 출신이지만 스포츠가 좋아 경희대 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스포츠경영관리사, 생활스포츠지도사 자격증도 땄다. 그중 결정타는 ‘심판’이다. 삼성전자육상단이 마라톤에 이어 경보를 육성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경보에서 ‘심판에 의한 실격’이 경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됐고, 한국선수들이 국제심판과의 통로 단절로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심판이 되기로 결심했다. 남몰래 노력한 결과 2011년 4월 경보 국제심판 자격을 획득했다. 현재 한국에 2명밖에 없는 심판이다. 심판으로 2013년 동남아시안게임,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2015년 광주 유니버시아드 등 17번이나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이렇게 많이 알고, 심지어 심판으로 참여해도 그는 비경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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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심판 조덕호 씨. 그는 한국에 2명밖에 없는 경보 국제심판이고, 30년 만의 올림픽 심판을 꿈꾸고 있다.


# 얼마전 조덕호 ‘심판’을 만났다. 오는 19일 시작되는 타이베이(대만) 유니버시아드에 심판으로 나간다고 했다. 하계휴가는 이것으로 대체한다. 이 대회 육상경기에 참여하는 심판 중 유일한 한국인이다. “사실 지난 2월 대한육상경기연맹의 트랙 및 필드의 공인심판 자격을 취득했어요. 이제 경보심판을 넘어 육상심판이지요. 그리고 목표가 있습니다. 내년에 올림픽심판 시험에 도전해서 한국인으로는 30년 만에 경보 레벨3의 올림픽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최초는 88 서울올림픽의 전두안 씨). 제 인생의 목표 중 하나입니다.” 비경기인의 진지함은 제법 울림이 깊었다.

# 얼마전 기자가 속한 탁구동호회에서 작은 시비가 하나 발생했다. 코치가 2명인데, 그중 한 명이 선수 출신으로 바뀌면서 자기는 선수 출신이니 레슨비를 1만 원 더 받겠다고 해서 생긴 일이다. 동호회가 두 쪽으로 나눠 그 시비를 놓고 제법 다퉜다. 도대체 선수 출신과 비선수 출신은 왜 그렇게 중요할까? 가장 중요한 지도자 영역도 꼭 선수 출신이 아니어도 성공할 수 있다. 위의 예를 들면 비선수 출신이라도 지도력이 뛰어나면 레슨비를 더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냥 선수 출신이라고 무조건 특별대우를 누린다면 요즘의 세상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지도자는 그렇다고 쳐도 심판, 스포츠행정, 단체장 이런 것도 모두 선수 출신이 하는 게 정당한가? 혹시 이 구분을 통해 못난 선수 출신들이 뭔가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 선진국처럼 어려서부터 스포츠와 함께 하고, 죽을 때까지 최소한 하나 이상의 스포츠를 즐긴다면 모두가 선수(혹은 선수 출신)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이 글을 쓰는 기자도 20년이 넘도록 스포츠현장에서 밥을 먹고 살았지만 여전히 ‘비경기인’이다. 그래서 얼마전 생활체육 탁구선수로 통합체육회에 등록했다. 이에 하나마나 한 소리지만 꼭 하고 싶다. ‘저도 경기인입니다.’ 얼치기 경기인으로 조덕호 심판을 몹시 응원한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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