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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섭의 링사이드 산책] 세계챔프 김태식을 꺾은 ‘기인’ 고기봉을 아십니까? (미완)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실록 대하소설 <산하>의 마지막 부분에 ‘태양이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이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적혀 있죠. 이 내용처럼 과거 김기수 챔프의 탄생(1966년)과 1970년대 홍수환, 유제두, 염동균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철권들이 이젠 아득한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되어지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되돌아 보면 우리나라 프로복싱의 최절정기는 1970년대 중후반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체급별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서바이얼게임 같은 살벌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복서들이 1980년대 진입과 맞물려 김철호가 챔프 탄생으로 서곡을 울린 후 연이어 김태식과 김환진, 장정구, 유명우 등이 줄을 이었죠. 이어 1989년엔 유명우와 백인철, 이열우, 김용강, 김봉준 최점환 등 세계 챔피언을 무려 6명이나 보유한 복싱강국으로 우뚝 섰으니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상전벽해 같은 현실이지만 되돌아보면 무지개빛 영롱한 색깔로 채색된 듯 화려한 파노라마가 스쳐갑니다. 그 시절 최경량급인 라이트플라이급과 플라이급의 국내 랭커들의 수준은 가히 세계 수준에 육박할 정도였죠. 후에 세계 챔프에 등극하는 김태식(1956년생, 동해)이라는 경량급 최고의 강타자도 1977년 9월 프로 데뷔전에서 고기봉이란 복서에게 3회 KO패를 당할 정도로 한국 경량급의 선수층은 상당히 두터웠죠. 오늘은 바로 김태식을 꺽은 고기봉을 중심으로 생태계 원리처럼 물고 물렸던 1970년대 그 시절로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려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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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가 꿈이었던 시절의 고기봉.


복서와 스케이터 겸업


고기봉은 1952년 경기도 파주 태생으로 유년시절부터 임진강을 터전삼아 살아온 전형적인 스트리트 파이터였다고 합니다.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선천적으로 탁월한 운동신경을 갖춰 여름에는 임진강가에서 수영을 즐겼는데 ‘임진강의 물개’로 불릴 정도로 실력이 빼어났다고 합니다. 또 겨울이면 얼어붙은 임진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면서 여흥을 즐겼는데 이 또한 국가대표이었다고 합니다.

고기봉은 수영과 스케이팅으로 단련된 기본실력 때문인지 남산공전 재학시절 김준호 선생이 운영하는 동신체육관에서 복싱을 익히면서 1971년 제5회 전국신인선수권대회에 처녀출전해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여담이지만 1981년엔 고기봉의 친동생인 고연봉(63년생, 원진체)도 전국신인선수권대회 플라이급에서 우승하며 형제복서의 위용을 뽑냈죠. 당시 동신체육관에는 홍수환, 염동균, 고생근, 김학영 등 역대급 선수들이 포진되어 있어 고기봉은 이들과 수시로 스파링을 하면서 실력을 쌓았죠.

고기봉은 이들 중 염동균(50년생, 옥천) 선배가 가장 강한 복서라고 평했죠. 당시 염동균의 양 훅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고 합니다. 홍수환(50년생)은 테크닉은 좋았지만 터프함이 떨어졌고, 고생근(51년생, 서울)은 원투펀치는 날카로웠지만 경기운영이 단조롭다고 평했죠. 김학영(52년생, 서울)은 사우스포로 카운터 펀치가 인상적이었지만 스테미너가 부족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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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봉(왼쪽)은 첫 출전한 1971년 전국 신인선수권에서 라이트플라이급 우승을 거머쥐었다.


강타자 고기봉


고기봉의 스파링을 지켜본 세계 챔프 박찬희(57년생, 대구)는 “고기봉 선배는 안정된 기본기와 함께 묵직한 파워도 겸비한 복서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칭찬에 후한 편이 아닌 박찬희의 평가이기에 주목할 만합니다. 김준호 선생의 아들이자 트레이너였던 김택경 사범은 고기봉의 스트레이트는 도끼로 장작을 찍는 듯한 강타였다고 회고했습니다. 통산 25승<4KO>10패8무를 기록하며 한국 챔피언을 지낸 김막동(50년생, 서울)이라는 중견 복서도 고기봉과의 스파링에서 녹다운을 당할 정도로 고기봉의 펀치력은 위력적이었다고 합니다.

고기봉은 1972년 대통령배 선발전 결승에서 문명안(천호상전)과 붙기로 했지만 준결승전에서 다친 손 부상으로 인해 경기를 접어야 했던 아픔도 겪었습니다. 이듬해인 1973년 3월 군 입대와 함께 36개월을 복무하고, 1976년 재대한 고기봉은 스케이팅 1급 자격증을 취득한 후 리라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도자로 변신했고, 틈틈히 복싱 트레이닝을 하면서 12월 프로복서로 데뷔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고기봉은 주업이 스케이팅 강사였고, 프로복서라는 직업은 일종의 아르바이트였던 셈이죠.

김태식과의 대전은 77년 9월에 붙있었는데요. 당시 김태식은 프로 데뷔전이었지만, 이미 아마추어 강자로 소문 나 있었습니다. 1976년 킹스컵 선발전 준결승(라이트 플라이급)에서 KO퍼레이드를 펼쳤지만 노련한 마수년(독립문체)의 예봉에 발목이 잡히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마수년은 “김태식의 펀치는 칼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고 말했죠.

고수봉은 김태식과 초반 치고받는 격렬한 타격전을 펼쳤습니다. 결국 3회 고기봉의 강타에 김태식이 쓰러지자 과거 고기봉이 속했던 동신체육관 스승이었던 김준호 선생이 타올을 던졌죠. 후에 김태식이 세계 정상에 등극하자 김태식에게 유일한 1패를 안긴 고기봉이 주목받았죠. 고기봉은 김태식을 이길 만한 실력을 갖춘 복서였죠. 하지만 김태식은 큰 경기에서만큼은 블록 버스터란 닉네임처럼 임팩트가 매우 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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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봉에게 뼈아픈 1패를 당했던 세계챔프 김태식(왼쪽)의 경기장면.


물고 물리는 1970년대 한국 경량급

이듬해인 1978년 5월 고기봉은 신갑철(57년생, 인천동양)과의 경기에서도 4회 실신 KO승을 거두죠. 신갑철은 1977년 11월 데뷔전인 신인왕전에서 김태식과 접전 끝에 판정으로 패했지만, 고기봉의 강타에 완벽하게 허물어져 버린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김태식에 비해 고기봉의 파워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 경기였습니다. 신갑철은 1977년 제8회 아시아선수권대회 선발전 플라이급 결승전에서도 동국대의 강타자 김정철(57년생, 파주, 프로전적 8승<7KO>3패)과도 접전 끝에 판정으로 패했던, 내구력이 강한 복서였기에 고기봉의 펀치력은 인정받았죠.

이 신갑철은 1978년 11월 한국 플라이급 간판복서인 김학영을 꺾으며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김학영은 29승<14KO>5패5무를 기록하고 있었고, 신갑철은 3승2패1무에 단 한 차례의 KO승도 없는 일천한 전적이었죠. 그런데 치열한 타격전 끝에 역전승을 거뒀으니 큰 화제가 됐습니다. 참고로 신갑철이 제압한 김학영은 홍수환이 인정한, 뛰어난 기량의 복서였고 10연승을 질주하던 황복수(54년생, 필승체)를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김학영에게 패한 12승(7KO)6패2무의 김영환(56년생, 필승체)도 김철호 전 챔프를 꺾었던 실력파란 겁니다.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당시 선수들은 전적만으로 실력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김학영에게 1978년 7월 7회 KO패를 당했던 하경주(54년, 천안)도 5승(2KO)5무14패를 기록했지만 국가대표 출신이자 두 체급 한국챔피언을 지낸 문명안(54년생, 한국화장품)과 역시 한국챔피언 출신인 김영환(56년생, 필승체)에게 승리를 거뒀고, 김철호와 대전에서도 한 차례 다운을 뺏는 등 우세한 경기를 벌이고도 무승부를 기록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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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고기봉-고연봉 형제와 지말오 심판.


고작 7전, 하지만 강렬했다

고기봉은 김영환의 플라이급 타이틀을 노리다가 1978년 7월 3회 KO패를 당하고, 곧바로 은퇴했습니다. 7전3승(3KO)1패3무. 고기봉은 경기 후 남자답게 완패했다고 인정할 만큼 인품이 좋았습니다. 만일 고기봉이 복싱에만 전념했다면 한국 경량급의 역사가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만한 펀치력과 기량을 갖춘 복서는 당시로서도 보기 드물었기 때문이죠.

현재 고기봉은 KPBF 심판부장으로 있습니다. 얼마전까지 잠실 롯데월드 스케이트 코치연합회 회장으로 13년을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안정된 생활을 하는 그를 보면 과거 세계 챔피언이면 어떻고 한국챔피언이면 어떻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문득 서산대사의 <해탈시>가 떠오릅니다.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외다
가진 것 많다 유세 떨지 말고
건강하다 큰소리 치지 말고
명예 얻었다 목에 힘주지 마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이다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이 세상
있고 없음을 편가르지 말고
얼기설기 어우러져 살다가세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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