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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키진 칼럼] 골프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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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가 아버지와 나를 잇은 유일한 매개체였다. [일러스트=김희영]


인생의 어떤 순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 지기도 한다.

모든 골퍼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골프로 풀어 낸 최고의 작품은 아마도 제임스 도드슨의 ‘마지막 라운드’일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아버지와 함께 했던 골프의 시간을 가슴 절절하게 그려냈다(국내에서는 99년도에 초판이 발행됐다). 그러나 과거 골프장이 수십 개에 불과했던 한국인 골퍼들에게 아버지와 골프라는 단어의 조합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엄격한 가부장제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86’세대 대부분에게 아버지는(예외는 있을 지라도) 껄끄러운 존재이기 쉽다. 대체로 아버지란 단어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필사적으로 인정받기 원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부족하고, 가족이지만 좁은 공간에 단 둘이 있는 시간은 불편한 관계라 표현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필자의 아버지는 다소 독특한 면이 있으셨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유머를 사랑하셨고 음주가무를 생활화 하셨다. 뿐만 아니라 개발독재시대인 70~80년대를 거치시는 동안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시대 정신을 당당히 거슬러 사셨다. 매 주말이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시며 유유자적 낚시를 즐기셨는데 지금도 기억나지만 꽤나 자주 와병을 핑계로 결근하시고 파라호나 송전 저수지로 2박 3일 낚시를 떠나셨다.“낚시를 다녀올 때마다 자식이 한 명씩 태어나더라”는 회고는 가족에게는 원망 어린 전설로 남아 있다. 물론 당신은 한번도 골프를 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해외에 나갈 기회가 있으실 때마다 페블비치와 세인트 앤드류스를 방문하셔서 당시만 해도 골프로 밥벌이 하던 아들의 기를 죽이셨던 분이기도 하다.

아버지와의 애틋한 추억? 글쎄 …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피차‘남자답게’대화가 없었다. 이유는 여러가지였겠지만 ‘가훈’을 수행하느라 아들도 아버지만큼 바빴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서 암이 발견됐을 때도 아들의 바쁜 스케줄은 지속됐는데 발전된 의술의 힘을 믿었기에 아들은 별 말도 없이 훌쩍 유학을 떠났다.

과연, 과학에 대한 믿음대로 아버지의 암은 잘 관리됐다. 그리고 서먹한 사이였던 부자는 이따금 전화로‘초 단위’대화만을 나눴을 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약해 지셨고 대화를 오래 끌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요새 어니 엘스가 왜 그렇게 못 치냐?”

“골프 중계 안 보시잖아요?”

“궁금해서 그런다.”

“…”

“타이거 우즈가 잭 니클로스 기록을 깰 수 있겠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

“신문 보세요. 거기 다 나와있겠죠.”

해외 생활 3년차에 지쳐갔던 아들은 황급히 수화기를 며느리에게 넘겼다. 그렇게 부자간의 대화는 이따금씩 이어졌지만 ‘곧’ 끊어졌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오후. 한국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로 시작됐고 그 다음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최대한 빨리 귀국했지만 이미 하루가 지났고 산발 머리 아들은 그저 조의를 표하는 분들에게 머리만 조아렸던 것 같다. 지금도 당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날 밤 새벽 3시.

극심한 피로로 충혈된 눈을 한 채 방명록이 놓여 있던 책상 앞에‘털썩’ 주저 앉았다. 무심코 열어 본 책상 서랍. 거기에는 평소 아버지가 쓰시던 수첩이 놓여있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눈에 익은 글씨체. 늘 따라하고 싶었지만 결코 흉내 낼 수 없었던 단아한 글씨들은 아버지의 일상을 보여 줬다. 큰 아버지의 기일, 어머니와의 약속, 소소한 하루하루의 기억들 ….

그리고 놀랍게도! 골프대회 중계 일정이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다.‘아니 아버지가 왜 이렇게 골프 경기를 열심히 보셨지?’혼란스러웠다. ‘스포츠를 사랑하셨지만 한번도 전해 드린 골프 대회 입장권을 사용하신 적이 없었는데 ….’ 꼼꼼히 기록된 출전선수와 주요 메모들을 읽어 가다가 … 문뜩, 깨달았다.‘아하, 아버지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으셨구나.’그렇다. 아버지는 몇 년째 해외로 떠도는 아들과 함께 할 화제 거리가 필요하셨던 것이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생각이 미치자 수첩 위의 문자들이 뿌옇게 흐려졌다.
당신의 마음을 무심히 지나쳤던 아들. 아들과 대화를 애타게 원하셨던 아버지.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대화의 끈’일 수도 있었던 골프. 그리고 이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스럽게 짙어지는 순간들.

골프는 누구에게는 단순히 운동일 뿐일 수 있다. 또 다른 누구가에게는 사교의 수단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골퍼에게는 아버지를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글 유상건(골프 칼럼니스트, 상명대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 이 글은 와키진(www.waacgolf.com)에 최근 실렸던 글입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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