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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키진 칼럼] 봄날의 사랑과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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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라운드는 지구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일러스트=정광필]


“지구와 연애하는 것 같아요”

네 홀쯤 남겨놓았을 때 먼 봉우리를 바라보던 후배가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코스 왼편은 깊은 삼나무 숲이었다. 키 큰 아름드리 삼나무들이 침엽수 특유의 엄숙한 표정으로 열병식 대오처럼 정연히 늘어서 있었다. 오른편은 연녹색 새 잎이 막 푸르게 돋아나고 있는 활엽수 교목들이 무성한 언덕이었다. 나무숲 군데군데에 벚꽃이 파스텔화처럼 무리 지어 피어있어서 골프장이라기 보다는 꽃놀이 정원처럼 화사해 보였다. 티 그라운드 뒤편도 벚꽃 병풍이었다. 모범생처럼 신중한 삼나무 숲의 깊은 암녹색과 웅성웅성 재잘거리며 새 잎이 움트는 연녹색, 먼 봉우리 위 파란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어우러진 풍경의 한가운데로, 얕은 바람에 벚꽃 잎들이 함박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넌 골프를 사랑하는 것 뿐이야” 내가 후배에게 대꾸했다.

해발 1,800여 미터 장엄한 산맥의 400미터쯤 낮은 허리춤에 들어선 골프장이었다. 큰 산에 자리한 코스여서 매 홀마다의 경관이 웅장했다. 60만평 넓은 땅에 27홀을 앉혀서, 각 홀은 멀찍이 저마다의 숲에 안겨 있고 각각의 숲들은 깊었다. 홀마다 티 그라운드 맞은편에 다른 모양의 봉우리들이 나타나서 자기 쪽으로 치라고 말을 걸어왔다.

라운드 중에 코스 안에 들어온 야생 사슴과 만나기도 했다. 사슴은 경계심이 별로 없는 듯 우리가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오래 바라보다가 느리게 숲으로 사라졌다. 그 숲으로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곰이 나온다고도 했다. 페어웨이에서 바라보이는 언덕의 숲에는 잘 지어진 동화 속 별장 같은 건물이 이따금 보였다. 나중에 골프장 직원에게 물으니 그건 개인 온천별장이라고 했다. 매 홀마다 다른 표정의 숲과 꽃 무리가 있고 다른 모양의 능선과 봉우리가 펼쳐져서, 골프라기보다는 트레킹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홀에서는 100여미터 골짜기를 넘겨서 내리막 티샷을 했다. 높이가 30미터 정도 낮은 곳의 넓다란 페어웨이로 내려치는 코스였는데, 티 그라운드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관이 사뭇 장쾌했다. 그때 페어웨이에는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가 새까맣게 무리 지어 앉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호연지기가 어떠니 하며 그 까마귀 무리의 한가운데를 향해 일생일대의 호쾌한 티샷을 했고, 결과는 하나같이 시원치 않았다.

27홀 라운드가 끝나고 우리는 온천욕을 했다. 클럽하우스 사우나의 물이 천연 용출 알칼리 유황온천수였다. 자연 용출되는 물의 온도가 너무 뜨거워서 43~44도 정도까지 식혀 욕조로 무한정 흘려 넣는다고 했다. 미끈미끈한 촉감의 온천수에 아늑하게 몸을 담그고 바라보는 커다란 창 너머로 아직 눈이 남아있는 산 정상의 모습이 저녁 노을을 받아 신령스럽게 보였다.

후배가 말했다.

“골프장과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넌 일본을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몰라”

내가 이죽댔다.

일본 후쿠시마 현 깊은 산에 자리한 골프장이었다. 후쿠시마 현은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와 비슷한 곳이다. 산이 깊고 공기도 맑으며 사람들도 무뚝뚝하달 만큼 지방색이 짙다. 일본의 경제가 한창일 때, 그 깊은 곳에 최고 수준의 회원제 명문을 꿈꾸며 골프장을 멋지게 지었는데 경제의 거품이 꺼지며 하루아침에 부도가 났다고 했다. 그것을 한국의 한 자산가가 헐값에 사서 한국인 골프 여행객들을 불러 들였다. 그러자 곧 일본 손님들의 발길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했다.

“한국 분들은 목소리가 크시잖아요, 클럽하우스 레스토랑에서 김치 냄새가 나면 일본 손님들은 질색을 하는데 한국 손님들은 그걸 싸 갖고 와서 식당에서 펼쳐놓고 시끄럽게 드세요. 못하게 해도 소용이 없어요…”

한국인 담당 직원이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혀를 끌끌 맞장구를 쳤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우리 일행은 밖으로 나왔다. 골프장으로 올라오는 골짜기 입구에 <아사히 맥주>의 후쿠시마 공장이 있었다. 그곳에 물맛 좋은 청정 천연 암반수가 나오는 자리가 있어서 맥주 공장이 들어섰다고 했다. 그 공장은 직원용 카페테리아를 제법 운치 있게 만들어 놓고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하고 있었다. 갓 뽑아낸 생맥주가 주 메뉴였다. ‘세상에서 가장 싱싱한 생맥주와 안주 3,000엔 무제한’ 이었으니 당연히 그 지역 명소였다.

우리는 수십 년 만에 있는 힘을 다해 마셨다. 섬세한 품질의 맥주를 마실 때 술잔에 안쪽에 생긴다는 선명한 ‘엔젤 링’의 숫자를 세어가며 일본 맥주의 품격과 일본이라는 나라의 장인정신을 시끄럽게 칭송했다. 대학 다닐 때 인사동 뒷골목의 빈대떡 집에서 마시던 밀주(密酒) 생각이 났다.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던 날 우리는 그 집에서 밤새도록 마셨다. 통행금지와 밀주가 없는 나라, ‘금지’라는 망령이 없는 나라, 강물처럼 술과 정의가 흐르는 나라를 노래 불렀었다. 그 젊은 날 이후로 그날 가장 많이 마셨다. 강물처럼 한없이 나오는 맥주가 그날의 우리에겐 정의였다. ‘술 안 먹는 놈은 나쁜 놈’이라며 애들처럼 낄낄댔다. 일본 손님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음날 우리는 쓰린 속을 달래며 27홀 골프를 쳤다. 일행 중 한 명인 대기업 사외이사이던 친구는 36홀 플레이를 하고 싶다며 툴툴댔지만 골프장 규칙에 그건 금지라고 했다. 그 친구는 동남아에서는 36홀이 되는데 여기선 왜 안되냐며 한국인 담당 직원에게 뭐라 따졌는데 일본인 총지배인이 다가와 규칙을 말하자 당장 코가 쑥 들어간 표정으로 ‘하이 하이!’ 하고는, 일본은 역시 규율 잡힌 나라라고 칭송했다.

“지구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착취하는 것 같다”

내가 후배에게 말했다. 골프 실력도 엉성한 데다가 숙취가 다 가셔지지 않아서 스윙은 엉망이었고 애꿎은 골프장 잔디만 어지럽게 뜯어내고 있었다.

“전 지금 일본에 응징하는 거예요” 후배가 느물대며 맞받았다. 그는 학생 때 시를 쓰는 문학도였었다. 당연히 학생운동을 했었고 군대에 다녀와 마음잡고 고시 공부를 해서 이십여 년째 착실한 변호사로 살고 있었다. 술에 취하면 그는 때때로 과거의 문학청년으로 돌아가 자신이 변절자가 아닌가 혼잣말을 했다. 골프를 칠 때에도 골프장에서 즐거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문득 낯설게 보인다며 이따금 여린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 전날도 아사히 맥주 공장 카페테리아의 화장실에서 비틀대며 나란히 서서 오줌을 누면서 혀가 꼬인 소리로 말했었다.

“형, 오늘 정말 좋다! 근데…… 그냥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27홀 라운드 내내 우리는 일본 골프장을 ‘착취’하고 ‘응징’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 ‘적어도 이 골프장만큼은 일본을 미워할 수 없다’고 했고, 나는 ‘온천도 미워하지 말자’고 했다. 다들 한마디씩, 벚꽃도 미워하지 말자. 사슴도 까마귀도, 삼나무도 미워하지 말자, 아니 너무나 좋다고 했다. 생맥주는 특히 미워할 수 없다며 후배가 결연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페어웨이에서 바라보이는 건너 언덕 숲 속의 개인용 온천별장을 바라보며, 우리는 ‘내년에 이곳에 다시 와서 꼭 찾아가 보자’고 결의하기도 했다.

다음날 골프장을 떠날 때 스무 명 남짓한 골프장 직원들이 클럽하우스 앞에 나와서 모여 공손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가 탄 미니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가지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흐드러지게 핀 벚꽃 무리 같았다.

이듬해 봄 후쿠시마에 동일본 대지진이 덮쳐 들었다. 그 골프장은 바다와 거리가 제법 멀어서 직접적인 피해를 크게 받지는 않았으나 그때 벚꽃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던 골프장 식구 가운데는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이도 있었고, 골프장을 찾는 손님이 크게 줄어서 그 페어웨이 자리에 정부 지원을 받는 태양광 발전 시설을 지어 업종을 전환했다고 한다.

그때의 일행이 한 조가 되어, 우리는 서울 근교 골프장에서 몇 번 어울렸다. 그때마다 후쿠시마의 아름답던 그 봄날 골프장을 함께 추억하고 그곳에 닥친 재앙에 마음 아파하고, 우리가 그때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서 땅이 흔들렸다느니 일본 땅을 너무 착취하고 응징했다느니 하는 철없는 농담도 했다.

‘지구와 연애하는 느낌’에 대해서도 물론 이야기 한다.

그때 다들 ‘지구와 연애하는 느낌’ 비슷한 것을 어렴풋이 받았던 것 같다. 나도 그 후로는 라운드를 할 때마다 그 느낌을 떠올리려 애써 보기도 한다. 산줄기를 깎아내어 만든 골프 코스에서 희희낙락 즐기며, 땅을 이리저리 후벼 파내면서 지구 사랑을 생각하는 것이다.

잘 치지도 못하는 골프를 왜 좋아하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여러 변명 가운데 한 가지이다.

글 류석무(바록스(BAROX) CEO) 이 글은 와키진(www.waacgolf.com)에 연재된 내용입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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