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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는 자랑스런 58년 개띠입니다” - 코오롱 한국오픈 60년사
*오는 1일 개막하는 코오롱 한국오픈은 60번째 대회입니다. 한 대회를 60년간 쉼없이 계속해온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이에 58년에 태어난 한국오픈의 1인칭 시점에서 60년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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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열린 제1회 한국오픈의 우승자 무어(윗줄 왼쪽 4번째)와 입상자들.


저, 코오롱 한국오픈은 58년 개띠입니다. 1958년 9월 11일 군자리(현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위치한 서울컨트리클럽에서 태어났죠(제1회 대회). 3개월 앞서 열린 한국프로골프선수권이 한국의 첫 골프대회지만, 프로와 아마추어 골퍼 모두에게 참가기회가 주어지는 내셔널타이틀, 한국오픈이야말로 한반도에 본격적인 골프의 시대를 열어젖혔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잠깐 저와 동갑내기인 58년생들을 살펴보죠. 6.25전쟁 후 베이비붐 세대의 정점에 있는 ‘58년 개띠’는 그 자체가 고유명사가 됐을 정도로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변을 보면 한국나이로 60인 제 친구들은 한국사회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듯합니다. 2016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100대 기업 임원 중 CEO급에 속하는 등기임원은 297명이었고, 이중 1958년생이 42명(14.1%)으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정치권을 봐도 그렇네요. 20대 국회에서는 ‘58년 개띠 전성시대’란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합니다.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 유승민 바른정당 대통령후보, 추미애, 김성식 의원 등이 모두 저랑 같은 나이죠. 소설(은희경의 <마이너리그>), 시집(서정홍의 <58년 개띠>), 그리고 창작무용과 다큐영화까지 나온 58년생들의 삶은 파란만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 코오롱 한국오픈도 한국골프역사와 함께 했고, 현재 한국 골프계의 중심에 있습니다. 1958년생 개띠인 제가 걸어온 길을 인생(人生)여정을 짚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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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한국오픈(1965년) 우승자 한장상 프로. 그는 무려 7번이나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유년기(1958~1969년) ‘다 같이 힘들었지만 확실한 뿌리를 내렸다’


한국의 58년생들은 대체로 쉽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죠. 보릿고개를 겪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눈부신 속도로 근대화를 향해 치닫는 그 초창기에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은 것이죠.

저도 비슷했습니다. 초창기엔 아직 한국에 골프 관련 단체조차 결성되지 않아 서울CC 주관으로 열렸죠. 심지어 한국선수들의 숫자가 적고, 기량도 떨어졌기에 주한미군이나 일본, 대만에서 온 선수들이 우승컵을 차지했습니다. 초대챔피언 무어에 이어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던 오빌 무디가 2, 3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5, 6회 대회에서는 상위 5위에 한국인이 아예 없었습니다.

제 유년기의 최대 수확은 1966년 한국골프협회(현 대한골프협회인 KGA의 전신)가 창립되면서 한국오픈이 내셔널타이틀 대회로서의 외형과 내실을 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사흘간 프로 골퍼와 최고의 아마추어가 함께 경기를 치러 한국 최고를 가리는 메이저 이벤트가 됐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갓난아이 때 돌잔치는 치렀고, 초등학교를 마쳤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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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대회(1987년) 우승자 이강선 프로(오른쪽)와 고 이동찬 회장.


청년기(1970~1989년) ‘위기 속에 만난 은인(이동찬)’


제 또래인 58년생들은 중학교 입학시험이 없어졌고, 고등학교도 평준화가 시행되면서 뺑뺑이 세대로 불렸습니다. 사상 처음으로 한 해 90만 명이 넘게 태어나는 까닭에 예비고사와 본고사 등 치열한 입시에 시달려야 했죠. 힘들기도 했지만 나라경제가 성장하면서 그래도 일자리는 쉽게 얻었죠.

저, 한국오픈도 비슷한 영광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1970년(13회 대회) 아시아·태평양골프연맹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순회하는 골프 투어인 '아시아골프서키트'를 창설하면서 저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대회로 발전했습니다. 어려웠던 시대, 학교에서 무슨 큰 상을 받은 것처럼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12년간 저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 규모의 골프대회로 위상을 높였습니다.

문제는 1982년 매경오픈이 창설과 함께 아시아골프서키트를 가져간 것이었죠. 1983년부터 저는 국내대회로만 치러지면서 성장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성장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요?이때 제 인생 최고의 은인을 만나게 됩니다. 1985년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이 대한골프협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한국오픈 시대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위기 속의 희망이었습니다. ‘1922년 개띠’였던 고 이동찬 회장은 마치 자식을 키우듯 한국골프와 저(한국오픈)을 곧추 세우는 데 애정을 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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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 34회 대회(1990, 1991년)에서 2연패를 달성한 미국의 스캇 호크.


30대(1990~1999) ‘화려함의 시작’


제 동갑내기인 58년 개띠들은 30대로 접어들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일꾼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죠. 이들이 30대 초반이던 무렵 분당, 일산 등 수도권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상전벽해'가 이뤄졌습니다. 내 집장만의 기회였고, 집을 사서 부를 늘릴 수 있었습니다. 나라경제가 한층 발전하면서 단군 이래 최고의 풍요로운 시대를 30대에 누린 것이죠. 물론 1997년 사상 유례가 없는 IMF외환위기가 터지며 미증유의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잠시 성장통을 앓으며 주춤했던 저는 1990년(33회), 이동찬 회장의 코오롱그룹이 공동 주최사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재도약에 나섰습니다. 예전에 누렸던 아시아대회를 넘어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초청하는 방식으로 단숨에 세계적인 대회로 권위를 높였죠. 1990, 91년 미PGA 멤버인 미국의 스콧 호크를 초청했는데 그는 보란 듯이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며 한국골프계에 신선한 충격을 전했습니다. TV로만 보던 세계 정상의 선수를 한국코스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30대 청년이 한국을 넘어 해외출장을 다니며 본격적으로 견문을 넓히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저는 1995년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액수인 40만 달러의 총상금을 내놓으며 한국에서 가장 많은 상금이 걸린 대회가 됐습니다. 이어 1996년(39회)부터 코오롱은 아예 타이틀스폰서를 맡아 제 공식이름(대회 명칭)이 '엘로드배 한국오픈골프선수권'으로 되었고, 2년 뒤에는 '코오롱배 한국오픈골프선수권'으로 한층 묵직해졌습니다. 국내 굴지의 기업인 코오롱의 이름과 함께 하면서 한국오픈은 아시아PGA투어의 스페셜이벤트로 격상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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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세르히오 가르시아(왼쪽)와 최경주 프로.


중장년기(2000년대) ‘세계적인 오픈대회로 우뚝’


앞서 58년 개띠들이 현재 한국사회 곳곳에서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죠. 저, 한국오픈도 새로운 세기를 맞으면서 코오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오픈대회가 된 것이죠.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저는 당대 최고의 월드스타들을 품었습니다. 2001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닉 팔도, 폴 로리가 출전했고, 이듬해에는 '유럽골프의 샛별'로 부상하던 세르히오 가르시아가 출전해 한국골프 최저타 기록을 작성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골프사의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오픈의 무대가 된 우정힐스로 처음 자리를 옮긴 2003년에는 세기의 장타자 존 댈리와 로라 데이비스의 성대결이 펼쳐졌고, 2004년에는 미국골프협회(USGA) 방식의 대회운영 및 까다로운 코스세팅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2006년 레티프 구센과 버바 왓슨이 우정힐스를 찾았고, 제50회 대회인 2007년에는 세계 랭킹 1위였던 비제이 싱이 출전해 한국오픈 트로피를 가져갔습니다. 당시 총상금 10억 원에 우승상금 3억 원으로 저는 세계적인 대회로 손색이 없는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2006년 제 이름이 새겨진 우승컵을 품에 안은 양용은은 이를 바탕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HSBC챔피언스에 초청되었고, 여기서 타이거 우즈를 제치고 우승하면서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기회를 마련했죠. 2011년 출전한 리키 파울러는 저를 찾아 자신의 프로 첫 우승을 일군 자신감을 바탕으로 PGA투어에서 톱랭커로 우뚝 섰고, 북아일랜드의 로리 매킬로이는 3번 출전해서 그 때마다 우승을 넘보는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이밖에도 앤서니 김, 이안 폴터, 대니 리, 이시카와 료 등 세계적인 골퍼들이 저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제 저, 코오롱 한국오픈은 매년 가장 난이도 높은 코스 세팅을 선보이고,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를 골라내고, 세계적인 선수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전하는 세계적인 대회가 됐습니다. 이러한 위상을 세계 골프계가 인정해 2017년 대회부터는 우승자와 준우승자에게 디 오픈(The Open) 출전권이 주어지게 됐습니다. 저의 60년 인생 어떠세요? 오는 6월 1일부터 생일잔치가 펼쳐집니다. [글=헤럴드경제 스포츠팀 유병철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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