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스포츠 타타라타] 사장님 프로와 매니저 프로
이미지중앙

영화 <파운더>의 포스터.


# 지난해 개봉한 <파운더(The Founder)>라는 영화가 있다. 한국어로 ‘설립자’라는 뜻인데, 오늘날 미국을 상징하는 ‘맥도널드’의 탄생을 소재로 삼았다. 52세의 한물간 세일즈맨 레이(마이클 키튼)라는 사람이 주문 후 30초만에 햄버거가 나오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스템을 개발한 맥도널드 형제의 가게를 접한 후 크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일으키는 과정을 담았다. 맥도널드는 맥도널드 형제가 개발했지만, 크게 성공시킨 것은 별볼일 없는 믹서기 판매업자 레이였던 것이다.

# 레이와 같은 성공적인 변신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고성규 씨는 서울대 약대를 나와 토익만점을 기록하는 등 영어전문가가 됐고, 이후 약국을 하다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어과외교사를 거쳐 청와대 행정관이 됐다. 은둔형인 까닭에 정치권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여자프로농구 감독이었던 A씨는 현재 지입차로 버스운전을 하며 만족스러운 삶고 있다. 소설 <주홍글씨>로 유명한 나다니엘 호손도 직장을 잃은 후 소설가로 대성했다. <제2의 인생을 위한 선택>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오카자키 타로는 안정된 직장에 머물지 않고, 24세의 이른 나이에 통신판매업을 시작해 2년 만에 월 2억 엔의 매출고를 올렸다.

# 이렇듯 삶에 있어서 직업적 변신은 불쑥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운동선수들도 다르지 않다. 청춘을 바친 운동에서 은퇴하면 ‘직업세계’와 맞닥뜨려야 한다. 범위를 골프로 한정하면 은퇴한 프로는 주로 레슨이나 해설 등 기술을 팔면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최근 인상적인 두 프로골퍼를 접했다. 새로운 영역에서 열정적으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한국을 대표하는 남자골퍼였던 강욱순(51)과 KLPGA 출신의 남민지(31) 매니저다. 전자는 기업가, 후자는 후배들을 돕는 매니저의 길을 택했다.

이미지중앙

'안산의 사장님' 시화호가 넓게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강욱순골프아케데미 in 안산'을 연 강욱순.


# “사장님, 어제 일에 대한 보고는 조금 있다가 하겠습니다.” 지난 1일 강욱순골프아카데미 in 안산’에서 만난 강욱순은 프로가 아닌 ‘사장’으로 불렸다. 그는 지난 3월 17일 이곳을 개장했다. 2008년 안산시의 민자개발투자사업 아이디어 공모에 기획서를 냈고, 10개 전문기업과 경쟁해서 사업권을 따낸 것이다. 투자금만 300억 원. 부지면적 2만4,000평에 건축 연면적 3,500평,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다. 개인 로커는 2,000개에 달한다. 파3 9홀을 비롯해 실외골프연습장, 수영장, 족구장, 테니스장, 배드민턴장, 풋살장이 있고, 사우나 시설까지 완비돼 있다. 땅은 안산시가 제공하고, 강욱순 사장은 15년간 운영을 한 후 기부체납을 한다. 레슨프로를 제외한 직원만 40명이 넘는다. “저는 이제 사업가입니다. 제가 프로일 때는 5만 원짜리 점심도 곧잘 먹었는데, 이제는 직원들과 5,000원짜리 밥을 먹습니다(웃음).” 호칭만 사장이 아니라 마인드까지 기업인이 된 듯싶었다.

# 강욱순 사장은 “투자금은 100%를 다 내가 댄 셈이다. 개인 돈이 20%, 타인 투자금 80% 정도다. 사실 ‘영원한 프로’가 되고 싶었다. 프로가 좋았다. 그런데 대회에 나가보니 이제 프로가 아니었다. 실력이 되지 않았다. 실력이 되지 않으면 프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사업을 택했다. 삼성에서 근무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라고 말했다. 1984년 골프에 입문, 국내 12승에 아시안투어 6승(1996, 1998년 아시안투어 상금왕) 등 화려한 캐리어를 자랑하는 강욱순 사장은 2003년 미국 PGA투어 퀄리파잉스쿨에서 50cm 짧은 퍼트를 놓쳐 PGA 투어 진출이 무산된 것으로 유명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아픔이 안산 아카데미를 구상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PGA 2부 투어를 뛰면서 미국의 골프아카데미 시스템을 두루 경험했고, 이때 한국에도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아카데미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미지중앙

프로 출신의 남민지 매니저(왼쪽)와 지난 4월 프로 첫 승을 달성한 이정은 프로.


# 남민지는 2006년 6월 KLPGA에 입회해 첫 해인 2007년 상금 26위에 오르는 등 2011년까지 1부투어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2011년 드라이버 입스가 오면서 시드를 잃었고, 2012~2013년 2부 투어를 뛴 후 은퇴를 결심했다.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화술도 뛰어나 선수보다는 레슨에서 더 성공할 것이라는 주위의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2011년부터 러시앤캐시의 후원을 받으면서 오너인 최윤 아프로서비스그룹 회장과 가까워졌고, 최 회장의 배려로 경희대 골프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먼저 최 회장에게 부탁, 2014년 1월부터 러시앤캐시 스포츠단(현 OK저축은행스포츠단)에서 스포츠마케팅을 담당하는 대리가 됐다. 2년 가까이 스포츠단에서 골프 관련 업무를 진행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

# 남민지 '대리'는 2015년말 최 회장과 의논해 퇴사를 결정했다. 큰 회사의 스포츠단이 아니라, 작더라도 현장을 누비는 선수 출신 매니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후 작은 스포츠기획사를 거쳐 지난 3월 골프마케팅 회사인 크라우닝에 입사했다. “가능하면 특정회사에 소속된 상태로 매니저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가족 같은 크라우닝의 분위기에 매료됐어요. 그래서 입사를 결정했고, 아주 즐겁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크라우닝에는 이정은, 지한솔, 박채윤, 이은정, 정혜원, 김가윤 등 10명의 선수가 있다. 남 매니저는 주로 드림투어(2부)에서 뛰는 선수들을 뒷바라지 한다. 운이 좋게도 입사 후 한 달 만인 지난 4월 9일 이정은이 KLPGA 국내 개막전(롯데렌터카 여자오픈)에서 첫 승을 달성했다.

# 남민지 매니저는 크라우닝 안팎에서 인기가 높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누구든 친절하게 대하고, 1부 투어 선수 출신으로 골프에 해박하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매니저로 일하지만, 크라우닝이 관련된 프로암 행사에는 가끔 ‘프로’로 찬조출연을 하기도 한다. 워낙 레슨을 잘해 프로암에서도 인기가 높다. 레슨을 업으로 삼고 있는 프로들이 “(남)민지가 강남에서 레슨을 하지 않아 참 고맙다”라고 말할 정도라고 한다. 남 매니저는 “돈을 벌려면 레슨을 하는 게 맞죠. 하지만 중학교 때부터 골프만 쳐왔는데, 또 스윙을 봐주는 것으로 남은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아요. 정이 많고, 사람냄새 풍기는 분위기를 좋아해요. 어린 선수들을 좋은 프로선수로 키우는 과정은 제게 감동적인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신념과 열정을 갖고 새로운 길에 도전하는 사업가 강욱순과 매니저 남민지에게 영화 <파운더> 속의 명대사가 필요할 듯싶다. ‘이 세상 무엇도 끈기를 대신할 순 없습니다. 재능은 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람들로 세상은 차고도 넘칩니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