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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잊혀진 비운의 천재 복서, 곽동성

  • 2017-04-19 16:45|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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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성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

프로복싱 KPBF 심판위원인 지말오 수정자원 대표를 가끔씩 경기장에서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낍니다. 그는 제11회 프로복싱 전기 신인왕 출신이죠. 아마추어 시절이던 78년 세계선수권선발전 라이트플라이급 준결승에서 국가대표 홍진호(수경사)와 일합을 겨뤘던 유망주 지말오(원진체)가 프로 신인왕전에 출전한 81년에는 참가선수가 넘쳐 부득이하게 전기와 후기, 2차례로 치러졌습니다. 이듬해 2월 전후기 통합 신인왕전을 펼쳤으니 한해 3번의 신인왕전이 열리던 당시의 프로복싱 열기를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말오는 당시 전기 신인왕으로 후기 신인왕인 손오공(62년생, 임실, 필승체)과 통합 신인왕전을 벌여 8회 판정패를 당했습니다(당시 최우수복서는 고아 출신 복서로 유명한 12전승<8KO승>의 권철이었죠). 후에 지말오는 한국챔피언 출신의 편호철과 세계챔피언(IBF 주니어밴텀급)을 지낸 정종관(동아) 등을 꺾으며 상승무드를 탔지만 82년 4월 신희섭(후에 IBF 플라이급 챔피언 등극)에게 3회 스톱 당하며 사실상 복서 생활을 접었죠.

지말오는 친구이자 자신에게 쓰라린 1패를 안긴 손오공(본명 손정구)이 수년전 지병으로 타계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아마도 손오공이 유명우에게 치명적인 KO패를 당한 후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술로써 아픈 상처를 달랬던 것이 치명적이었다고 회고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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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말오(수정자원대표) KPBF심판위원.


손오공과 부처님 같은 유명우


잠시 손오공과 유명우의 대결을 보면 이렇습니다. 85년 9월 8일 문화체육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WBA 주니어플라이급 도전자결정전(당시 챔피언은 미국의 조이 올리버)으로 치러진 이 경기는 원진체육관으로 이적한 손오공이 20전19승(9KO)1패의 동급 4위였고, 대원체육관의 유명우는 17전승(3KO승)에 동급 8위였습니다. 경기 전 대다수 전문가와 팬 들은 파상공격을 앞세운 터프한 손오공이 우세할 것이라고 전망했죠. 하지만 당시 유명우의 트레이너인 김진길(40년생, 합천) 관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날카로운 양 훅을 내던지며 강하게 밀고들어오는 패스트스타터인 손오공에 비해 유명우는 얼굴 측면을 특유의 두터운 커버링으로 디펜스하며 서서히 압박하는 슬로우스타터 스타일였고, 결국 체력소모가 많은 손오공이 중후반을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두 선수가 상극(相剋)이고 최종 승자는 유명우라는 것이죠. 실제로 애국가 2절에 나오는 ‘철갑을 두른 듯’한 견고한 커버링은 유명우의 트레이드마크였습니다.

실제도 그랬습니다. 이야기 속 손오공의 현란한 여의봉이 부처님 손바닥에서 철저히 무용지물로 전락하듯 현실의 손오공도 유명우에게 완벽하게 허물어졌습니다(유명우의 이 커버링은 나중에 맹점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이오카나 조이 올리버 같은 장신의 선수가 송곳처럼 쑤시는 스트레이트성 펀치에는 취약했죠. 유명우는 이들과는 3차례 격돌해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초접전을 벌인 바 있습니다). 어쨌든 두 선수의 경기는 김진길 관장의 예상대로 유명우의 일방적인 퍼펙트승(7회 KO)으로 끝났습니다. 라이벌전 치고는 좀 싱거운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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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성(왼쪽)과 동료심판위원인 김완수 씨(군산중앙중교사).


복싱 때문에 3년간 가출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 링사이드산책의 주인공은 현재 군산 금강중학교 체육교사이자, 대한아마복싱협회 심판위원인 곽동성(58년생, 군산)입니다. 곽동성은 중3학년 때인 73년 죽마고우인 김상돈(한체대 1회 졸업생. 76년 전국체전 금메달)이 복싱에 입문한 것을 보고 관심을 가졌고, 74년 고교입학과 함께 복싱에 입문했지만 완고한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치자 인근 전주로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힘든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복싱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소년 곽동성은 76년 꿈에도 그리던 복싱에 입문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탁형권 관장이 운영하는 전주종합체육관에서 복싱을 수련한 곽동성은 부모님과 타협(?)한 끝에 77년 3년간의 외유를 끝내고 귀향합니다. 그가 3년의 가출을 마치고 77년 군산 제일고에 입학했을 때 친구 김상돈(웰터급)은 조용래(수경사), 유흥석(수원복싱), 황충재(영산포상고) 등 당대 최고의 복서들과 승패를 주고 받으며 당당하게 한체대에 입학했으니 두 친구의 운명은 크게 엇갈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 때부터 곽동성은 군산 복싱체육관에 등록을 하며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합니다. 여담이지만 바로 지근 거리에 시인 고은(33년생, 군산시 미룡동)이 젊었을 때 출가한 최초의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가 있었죠. 복서 곽동성과 시인 고은은 어려서 똑같이 집을 떠났는데 한 사람은 가출(家出), 또 한 사람은 출가(出家)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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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성에게 생애 첫 패배를 당한 세계선수권 은메달리스트 김동길(당시 한체대). [사진=대한체육회]


슈퍼고교생의 탄생

곽동성은 그해 제30회 전국학생신인대회에 밴텀급으로 출전해 결승에 올랐지만 동아체육관의 정태동에게 실력의 격차를 느끼며 완패했습니다. 이 시합을 패하고 충격을 받은 곽동성은 1년 동안 일체 시합에 출전하지 않고 기량향상에 매진했습니다. 링컨의 명언처럼 ‘도끼 찍는 시간보다 도끼날을 가는 시간’에 많은 투자를 한 것이죠.

78, 79년 곽동성은 전혀 다른 복서로 환골탈태하며 학생무대(김명복배, 전국체전)을 평정했고, 심지어 성인무대에서도 걸출한 역대급 선수들을 꺾으며 일약 주목을 받습니다. 이현주(전남체고), 백승영(대전체고) 등을 꺾고 김명복배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청소년대표 출신의 박광천(62년생, 충북대, 현 청주농고 교사)을 비롯해 세계선수권 준우승자(81년, 뭔헨)이자 당대 최고의 복서인 국가대표 김동길(61년생, 전남체고-한체대), 그리고 킹스컵에서 플라이급과 밴텀급 두 체급을 석권한 79년 세계군인선수권(베네주엘라) 금메달리스트 김지원(58년생, 후에 IBF 주니어페더급 세계챔피언 등극), 48년 런던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한수안 선생의 아들, 한창덕(53년생, 중산체)까지 당시 최고의 복서들이 전광석화와 같은 곽동성의 라이트 카운터펀치에 고개를 떨구었죠.

곽동성의 경기 중 백미는 78년 제1회 세계선수권(유고 베오그라드) 파견 국가대표선발전(준결승)에서 국가대표 간판인 황철순(55년생, 고성)을 꺾은 겁니다. 한 차례 다운을 곁들이며 판정으로 승리해 신문 1면을 장식했죠. 당시 페더급 국가대표였던 전학수(54년생, 수경사)는 이 경기에 대해 “(황)철순이가 스피드만 앞섰을 뿐 전체적인 경기내용은 곽동성에게 완패했다”고 회고했죠. 제3자의 객관적인 관전평이었으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황철순은 치명적인 1패를 당함으로써 당시 유력하던 대한민국 체육대상을 야구선수 이선희(경리단)에게 넘기고 말았습니다.

79년 킹스컵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곽동성과 황철순은 밴텀급 결승에서 다시 맞붙었고 결과는 황철순의 3ㅡ2 아슬아슬한 판정승이었습니다. 하지만 판정시비가 일었고, 태릉선수촌에서 열린 숱한 재평가전 끝에 당시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현 대한복싱협회)이 최후에 곽동성의 손을 들어줬고 결국 곽동성은 79년 킹스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하게 됩니다.

이후 곽동성은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리며 진통을 겪었습니다. 동국대 김진영 감독, 한체대 박형춘 감독, 동아대 손영찬 감독까지 소매를 걷어부치며 고교랭킹 1위인 곽동성 잡기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곽동성의 스승인 김완수 관장(29년생, 홍성. 중앙대)은 이런 상황에서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유가 있었죠. 평소 호형호제하던 이리체육관 관장이자 원광대 조석인(36년생, 전북대) 감독과 어느 정도 얘기가 돼 있었던 것이죠. 곽동성이라는 뛰어난 복서를 굳이 타 시도로 유출하지 않고 원광대에 진학시키고, 훈련은 군산체육관에서 하는 걸로 의견조율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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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세계선수권선발전 준결승에서 황철순(한국화약)을 다운시키는 곽동성(오른쪽).


어처구니 없는 은퇴

80년 원광대에 입학한 곽동성은 유니폼 앞면에 원광대학 마크를 달고 뒷면엔 군산체육관 이름을 박고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광대 사범대 학장인 신길수 씨가 곽동성을 호출하더니 ‘원광대 선수가 지정된 체육관에서 운동하지 않고 멋대로 군산체육관에서 운동하는 모양인데, 그러려면 대학등록금은 내고 다니라’고 다그쳤습니다. 여기에 조석인 감독마저 육두문자를 쏟아내며 곽동성의 일탈행위를 지적하자 곽동성은 어쩔 수 없이 이리체육관에서 머물며 운동을 하는 둥 마는 둥 후배선수들을 지도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군산체육관에 들린 곽동성은 체육관 정면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던 자신의 경기사진이 뜯겨져 사라진 걸 목도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곽동성의 이리체육관 훈련에 대해 군산체육관장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사진을 소각시켜 버렸던 것이죠. 마치 한화 김성근 감독이 예전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고 멸시 받고, 한국에서는 ‘쪽바리’라고 무시당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곽동성에게 최선의 선택은 복싱을 떠나는 길 이외에는 답이 없었죠. 피눈물을 흘리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곽동성은 80년 제61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두 체급을 올려(아마도 운동량이 부족했겠죠) 라이트급으로 출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복싱과 결별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 만 22살이었습니다. 곽동성은 코앞의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물론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84년 LA 올림픽 등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주요대회를 목전에 두고 복받쳐 오르는 서러움을 삼키며 링을 떠나고 말았죠.

곽동성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신 자신이 얄궂은 운명의 주인공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얼마 전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조석인 감독이 타계했습니다, 그는 호불호가 분명하고 전남의 이재인 씨와 쌍벽을 이뤘던 아마복싱계의 거목이었죠. 문득 빅토르 위고의 어록이 생각납니다. ‘어제는 싸우는 것이고 오늘은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엔 모두가 죽는 것이다.’ 심각하게 고뇌하며 다퉜던 일들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부질없는 일이 되는 것은 바로 세월이 모든 것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신비로운 명약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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