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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전설의 아마복싱 지도자’ 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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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마복싱에서 '전설의 지도자'로 통하는 김승미 고문(오른쪽)이 서울시복싱연맹의 김종철 기술위원(왼쪽)과 현천일 심판장과 포즈를 취했다.


한국 아마복싱은 국내에서 치러진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에서 최고점을 찍은 후 대한아마추복싱연맹(현 대한복싱협회)의 김승연 회장 퇴임과 맞물리며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김광선과 오광수, 김동길 ,문성길, 김기택, 이해정, 박시헌, 신준섭 등 주력선수들이 대거 퇴진하면서 세대교체의 큰 변화를 겪었죠. 이런 암담한 현실 속에서 1989년부터 ‘독(毒)이 든 성배(聖杯)’와 같은 대표팀 감독직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미들급 국가대표 출신의 김승미(1945년 고흥생, 명지대)였습니다.

복싱판 히딩크

누가 말했던가요, 영웅은 난세에 나타난다고. 김승미 감독(현 대한복싱협회 고문)은 메이저급 주력선수들이 대거 이탈하자 마이너리거 2군 선수들을 추슬러 부활에 성공합니다. 많은 복싱인들은 그를 “아직도 신(臣)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선으로 향한 이순신 장군처럼 한국복싱을 재점화시킨 인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는 히딩크 감독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4강 신화를 창출했죠. 최고점을 찍은 후 히딩크 감독의 퇴임과 맞물려 공수의 핵(核)인 홍명보와 황선홍 등 주력선수들이 대표팀을 떠났고, 한국 축구는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뒤를 이은 코엘류와 본프레레와 아드보카트. 핌 베어백 등 외국인 감독들이 5년 동안 재임했으나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한국복싱의 부활을 이끈 김승미 감독의 용병술과 지도력도 히딩크와 마찬가지로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김승미 감독은 1989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국제대회에서 4체급에 출전해 양석진과 이창환, 조인주 등이 3체급을 석권하며 국제무대에서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첫 발을 잘 내딛은 거죠. 특히 양석진(레프트 플라이급)은 대회 최우수선수상을 획득하는 겹경사를 이뤘습니다. 탄력을 받은 김 감독은 그해 7월 벌어진 제14회 북경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12체급에 선수들을 출전시켜 무려 8체급에서 금메달(조동범 한광형 황경섭 이훈 유창현 정동환 박세종 채성배)을 수확하며 종합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조동범은 남북대결에서 89년 모스크바 세계선수권 라이트 플라이급 동메달리스트인 김덕남을 꺾어 화제가 됐습니다.

김승미 이펙트는 한 해에 3번이나 발휘됐습니다. 이어 열린 제2회 서울컵 국제대회에서 플라이급의 이창환(서울시립대)이 한 차례 패한 적이 있는 ‘동양의 진주’ 비차이 카드포(태국)를 제압하고 우승하는 등 5체급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종합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카드포는 북한의 복싱영웅 최철수(92년 바로셀로나 플라이급 금메달)를 꺾은 세계적인 복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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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리스트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김승미 감독(오른쪽 두 번째). 선수들은 왼쪽부터 조인주 이창환 양석진.


계속되는 우승신화

이렇게 명장 반열에 오른 김승미 감독의 지도력은 사실 88 서울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치러진 제1회 서울컵 대회에서 이미 검증된 바 있었습니다. 상비군 감독을 맡아 라이트플라이급의 오영호(군산대)가 1985년 월드컵 금메달리스트인 오광수(한체대)를 걲고 기적같은 우승을 거둔 데 이어 밴텀급의 서정수(홍익대)가 허영모를 꺽은 아르테미에프(소련)마저 제압하고 정상에 올랐죠. 당연히 1989년의 쾌거는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

이어진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에서도 양석진(68년 동아대)이 후에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에 등극하는 차차이 사사쿨(태국)을, 이창환(서울시청)은 카드포를 다시 꺽으며 정상에 올랐죠. 여기에 이재권(동아대)과 채성배(호남대), 백현만(경희대)까지 우승 대열에 합류하며 5체급을 석권하며 명불허전을 입증했습니다. 백현만을 제외한 4명의 선수는 김승미 감독이 상비군 감독 시절(85~88년)부터 5년 후를 내다 보며 초석(礎石)을 다져온 선수였기에 더욱 의미가 깊었습니다.

1991년 제3회 서울컵에서도 한국복싱이 다시 종합우승을 차지하자 입지를 다진 김승미 감독의 질주는 가속화됐습니다. 그해 제6회 호주 시드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페더급의 박덕규(원광대)가 은메달을, 헤비급의 채성배가 동메달을 획득하며 국위를 선양했습니다. 박덕규는 준결승에서 쿠바의 아놀드 메사를 꺽은 데 이어 결승에서 불가리아의 키르코르프에게 14-14 동점을 기록한후 토탈 57ㅡ58로 패했죠. 당시 심판장이 불가리아인이었기에 아쉬움이 짙었다고 김 감독은 회고했습니다. 아쉽게 동메달에 머문 헤비급의 채성배는 과거 백현만, 민병용은 물론 조범래, 하종호 등에게도 거푸 패했지만 김 감독과 호흡을 맞추며 복싱에 눈을 뜬 선수였습니다. 이렇게 김 감독의 쾌속행진은 계속됐습니다.

이어진 제15회 아시아선수권대회(태국)에서도 한국은 12체급에 출전해 7체급에서 금메달(조동범 박덕규 김재경 전진철 이승배 채성배 정승원)을 휩쓸었고,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도 라이트급의 홍성식(서원대)과 미들급의 이승배(용인대)가 보석 같은 동메달을 채굴했습니다. 특히 홍성식은 불과 1포인트 차로 패한 ‘골든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에게 패했는데 이 명승부는 아직도 팬들 사이에 회자될 정도입니다.

아쉬운 하차

아쉬운 것은 기적 같은 김승미 시대가 사실상 여기까지였다는 점입니다. 2년 선배이자 대표팀의 터줏대감인 김성은(43년생 경희대-한국화약)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다시 잡으면서 한국복싱은 심한 부침을 겪습니다. 1994년도 아시아선수권에서 금메달 1개(플라이급 전인덕)로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리더니 그해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 2개(염종길 이승배)에 그쳤습니다. 급기야 1995년과 1997년 벌어진 17, 18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각각 12체급씩 출전했으나 단 한 개의 금메달도 따지 못하는 치욕을 맛봤습니다.

또 제7, 8회 세계선수권대회(93년 핀란드, 95년 독일)에서도 역시 노메달에 머물면서 한국 아마복싱은 끝없는 추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김성은 감독이 이끈 한국대표팀은 결국 1998년 제13회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10체급에 출전했지만 단 1개의 금메달도 획득하지 못하는 참패를 당합니다. 이는 1954년 아시안게임에서 페더급 김금현이 금메달을 획득한 이래 한국이 44년 만에 노골드의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그 결과 김성은 감독도 대표팀에서 하차하고 말았죠. 전임 김승미 감독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 만일이 있다면 88 서울올림픽 감독으로 최절정기에 화려한 금자탑을 쌓고 퇴임한 김성은 감독이 대표팀 컴백의 러브콜을 받았을 때 고사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당신에게는 아름다운 퇴장이 되고, 한국복싱의 역사도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요? 누군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지지(知止)’라고 하더군요. ‘멈추는 것을 안다’라는 뜻이죠. 문득 혜민스님의 베스트셀러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란 저서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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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장정구(왼쪽)와 김승미 감독.


제자들이 인정하는 스승


다시 김승미 감독 이야기로 돌아가죠. 퇴임한 김 감독은 후에 김승연 회장의 추천으로 1994년 8월 중국 운남성의 복싱 지도자로 선임돼 국내 복싱계를 떠납니다. 그는 비록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 같은, 4년간의 짧은 대표팀 감독생이었지만 눈부신 성과를 냈습니다. 이를 인정받아 1989년 대한체육회장 공로상, 1990년 대통령훈장 기린장, 1992년 대통령훈장 백마장을 수상했죠.

현재 서울시체육회의 수석팀장으로 있는 이창환(1969년 화순생)은 “그분(김승미)은 영어에 능통했고, 국제감각이 있었죠. 선수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과 자신감을 심어주는 멘탈적인 면에서도 우수했습니다. 컴퓨터 채점의 허(虛)와 실(實)을 잘 파악해 세밀하게 연구하며 지도했던 뛰어난 스승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고창에서 교직에 몸 담고 있는 올림픽 메달리스트 홍성식은 “김승미 감독은 가슴이 따뜻한 분”이라고 평했습니다. 참고로 김승미 감독은 문성길 챔프와 함께 서울정도 600인에 선정되어 타임캡슐에 이름이 들어가는 자랑스런 복싱인입니다. 현역시절인 1960년대 중반에는 김충배, 김상만, 신춘교와 함께 명지대의 전국선수권 3연패를 이끈 미들급의 간판복서였으며 1970년 세계군인선수권대회 은메달리스트였습니다. 70을 훌쩍 넘겼지만 김승미 감독님이 남은 여생도 한국 복싱발전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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