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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이것이 루저의 인생역전’ 보람상조탁구단의 오광헌 감독

* ‘스포츠 인문학’을 지향하는 이 칼럼은 보통 책이나, 인문학적 배경지식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 ‘오광헌 감독 편’은 이를 생략한다. ‘루저의 미학’으로 불릴 만큼 독특한 인생역정을 가진 오 감독이 나중에 꼭 책을 내고 싶다는 뜻을 인터뷰 도중 밝혔기 때문이다. ‘미래의 책’이 있다면 굳이 ‘과거의 책’에 연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네 주위를 돌아보면 잘난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 법이다. 2017년 설연휴. 오광헌 감독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직은 부족한 사람들을 격려했으면 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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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헌 보람할렐루야 탁구단 감독.


# 오광헌 감독(47)의 고향은 경기도 부천이었다. 탁구 명문 시온중-시온고를 나왔다. 하지만 운동은 시원치 않았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고2 때는 크게 방황하기도 했다. ‘사고’를 쳤을 때 어머니가 찾아와 “내 아들이 이런 사람이 아닌데”라며 뚝뚝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특기자로 지방대에 진학했다. 1990년 대학 2학년인 스무 살에 자신의 적성이 ‘가르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감하게 선수생활을 접고, 호수돈여자중학교에서 트레이너로 일찌감치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가르쳤던 선수가 ‘깎신’ 김경아, 권소정 등이다. 93년초 서울여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년이 지날 무렵 95년 봄 일본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 일본통으로 유명한 천영석 전 대한탁구협회장이 일본의 슈쿠토쿠 대학이 한국코치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아니지만 성실하기로 소문난 코치 오광헌을 추천했다. 이때부터 오광헌의 ‘일본에서 살아남기’가 시작됐다. 이 대학은 일본에서도 그리 유명한 대학이 아니다. 탁구도 수도권의 2부팀이었다. 여기에 지도자는 일본말도 못하는 한국의 무명 탁구인이었으니, 정말 여러모로 쥐뿔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임 5년 만인 2000년. 슈쿠토쿠 대학은 1부로 승격했고, 오광헌은 ‘감독’이 됐다. 그리고 1부에 올라오자마자 최고 권위의 전국대회에서 첫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2004년까지 내리 5연패. 90년이 넘는 일본대학탁구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오광헌 감독은 2013년까지 슈쿠토쿠 대학을 전국대회 11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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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탁구잡지의 커버스토리로 소개된 오광헌 감독의 이야기.


# 현실에서 기적이나 쾌거는 훅 찾아오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일본에서 오광헌은 정말이지 많은 것과 싸워야 했다. 앱도 없던 시절이었고, 변변치 못한 팀 사정으로 인해 통역도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선수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으면 전날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 노트에 적은 후 그걸 보여줬다. 스카우트는 더욱 힘들었다. 아예 ‘외국사람이지만, 좋은 탁구선수를 만드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는 말을 외운 후 돌아다녔다. 탁구용품 세일즈맨을 통해 중고선수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시간이 나면 해당 중고등학교로 가 지도자를 만났다. 사전에 입수한 정보에 따라 고등학교 감독이 양복차림을 좋아하면 정장을 입었고, 트레이닝복 차림에 선수들과 직접 탁구를 치는 것을 선호하면 그렇게 했다. 한 번은 한 고등학교에서 2박3일, 24시간 동안 탁구를 쳐주기도 했다.


# 사실 루저들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으로 버티는 것이 더 힘들다. “전화도 없는 8평 오피스텔에서 혼자 밥해먹고 살았지요. 한국으로 전화를 하려면 1시간 자전거를 타고 나가 공중전화를 썼어요. 한국의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몰래 운 적이 많았어요.” 오광헌 감독은 자신의 눈물나는 일본성공기에서 가장 힘든 것이 ‘외로움’이었다고 말했다. 맞다. 루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신의 힘을 다할 때 겪는 고독은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개신교신자인 오 감독은 종교에 의지했다. 신주쿠에 있는 동경중앙교회(이강헌 목사)를 다녔고, 스포츠선교단을 만들어 탁구봉사 등으로 외로움에 맞섰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시절을 버텼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탁구지도자서의 이 경험이 제게는 큰 도움이 됐어요. 선수들도 마찬가지거든요. 세상일이 그렇듯 운동도 잘 되지 않으면 정말 외롭죠. 지도자는 이걸 이해할 수 있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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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헌 감독(오른쪽)과 일본 여자탁구대표팀의 수장을 지낸 무라카미 야스카츠 감독(일본생명).


# 열심히 살았더니, 일본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2009년 일본 여자탁구대표팀의 무라카미 야스카츠 감독(일본생명 감독)이 4명의 코치진에 오광헌을 발탁했다. 한국이 절대강자인 태권도나 양궁도 아니다. 일본탁구는 한때 세계정상이었고, 중국천하인 요즘도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하다. 탁구용품도 세계적이다. 이런 일본이 국가대표팀의 지도자로 무명의 한국인을 선발한 것은 충격이었다. 그만큼 오광헌 감독의 지도력이 빼어났던 것이다. “무라카미 감독님은 제게 은사죠. 저를 진정 아꼈어요. 매년 8개 이상 국제대회에 파견하며 경험을 쌓도록 배려해줬죠. 일본 울타리를 넘어 세계탁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오광헌 감독은 2013년부터는 여자 주니어대표팀의 감독도 겸했다. 이 과정에서 슈쿠토쿠 대학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이토 미마, 히라미 노(이상 17) 등 일본의 10대 돌풍 주역을 지도했다. 그리고 성적도 좋았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일본 여자탁구는 중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코치로 참가한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일본여자는 단체전 동메달을 땄고, 이어 열린 12월 남아공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는 단체 우승, 단식 3위, 복식과 혼복 2위 등 최고의 성적을 냈다. 심지어 2016년 4월에는 25년 전통의 미즈노스포츠 멘토지도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종목을 망라하고 일본 체육계 최고 지도자에게 주는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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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자탁구대표팀의 코치로 2016 리우 올림픽에 참가한 오광헌 감독. [사진=연합뉴스]


# 이쯤이면 오광헌 감독은 일본을 떠날 이유가 없다. “사실 무라카미 감독이 여자대표팀 감독을 제게 물려주려고 했어요. 감독을 하려면 자격증을 받아야 하는데, 무라카미 감독의 지시로 그것까지 이미 받아놨죠.” 그렇다. 일본에 남았다면 일본 여자탁구 국가대표 감독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2016년 3월 창단을 준비하던 보람상조의 콜을 받았고, 5월 최철홍 회장을 만나 12월 합류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마지막으로 중국을 꼭 꺾고 싶다”고 창단을 늦춰달라고 요청했는데 단체전 우승으로 약속을 지킨 후 21년 만에 한국에 온 것이다. 보람할렐루야 탁구단 감독. 쟁쟁한 국내 탁구인들이 그 자리를 노렸지만, 보람상조는 창단 일정까지 늦춰가며 한때 지독한 루저였던 오광헌 감독을 택한 것이다.

# 일본에서는 기적을 일으켰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오광헌 감독은 여전히 무명이다. 선수도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었고, 팀도 선수가 4명뿐인 작은 팀이다. 일본에서의 성공을 내려놓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나는 스타 출신이 아니에요. 나 같은 사람도 실업팀 감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새로운 팀을 창단하면 정상에 오르기까지 5년 정도가 걸리죠. 보람에서는 3년 만에 전국대회 단체전 우승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선수로도 지도자로도 태극마크를 달아본 적이 없어요. 좋은 선수를 길러 지도자로 태극마크를 달아보는 것이 꿈입니다.” 그를 만나본 사람은 안다. 그의 눈빛과 안색이 얼마나 진지하고, 선한지를. 지금 오광헌 감독은 보람할렐루야탁구단의 연습장 및 숙소가 위치한 천안에서 조용히 2번째 성공신화를 준비하고 있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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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보람할렐루야탁구단 창단식에서 오광헌 감독(왼쪽)이 최철홍 보람상조 회장과 함께 단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보람할렐루야탁구단]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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