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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보승'이라는 체육인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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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나온 <만인보>의 완간 개정판.


# 얼마전 새삼 고은 시인(84)의 <만인보>라는 작품이 화제가 됐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거론되는 대시인의 작품에 ‘최순실 국정농단’의 중요한 증인인 고영태 씨(1998년 아시안게임 펜싱 금메달리스트)의 가슴 아픈 가족사가 실렸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1986년부터 2010년까지 총 30권으로 발간된 이 연작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5,600여 명에 달한다. 그들은 시인이 개인적으로 만난 실제 인물, 역사적 인물, 불교적 체험에서 만난 초월적 인물 등이다. 고은 시인의 본명은 고은태이고, 법명은 일초(一超)다. 20세에 입산해 승려가 된 경험이 있기에, 불교적 세계관이 짙은 <만인보>와 같은 작품이 나왔다고 한다.

# 법명이 보승(寶僧)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4살 때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아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됐다. “어차피 죽을 거 절에라도 한 번 보내자”라는 동네 어른들의 말을 따랐는데 정말 살아났다. 병역도 공군에서 군종병으로 만기전역했다. 이후 사업가로서 혈기왕성하게 보내던 40대 시절, 과로와 스트레스로 안면마비가 왔다. 다시 절에 들어갔고, 수행하면서 기력을 되찾았다(이때 법명을 받았다). 삶이 이렇게 불교적이니 ‘늘 하심(下心)하고 솔선수범하며 살자’는 인생관을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인적 네트워크는 폭이 넓으면서도 깊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업가(우성산업개발 대표)로 제법 성공했고,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을 연임했고, 우여곡절 끝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한국의 체육대통령격인 ‘제40대 대한체육회장’에 당선됐다.

# 보승은 이기흥 대한체육회장(62)이다. 감질나게 실명 대신 법명을 운운한 것은 최근 그의 행보 때문이다. 지난 16일 ‘통합’ 대한체육회는 첫 이사회를 열고 집행부 인사를 확정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지난해 10월 치열했던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노골적으로 이 후보를 공격한 인사가 몇몇 포함됐다. 속사정을 취재해 보니 주변의 반대가 강했지만 ‘보승’이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대한체육회가 진정으로 개혁에 성공하고, 체육인들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치졸한 인사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승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말씀한 중도(中道)란 중간이 아니라 ‘포용’이다. 지금까지 사람 중요한 줄 알면서 살아왔듯, 모두를 두루 아끼고 받들면서 불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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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의 법명은 '보승'이다. 이제 그는 한국체육에서 누구못지 않게 중요한 인물이 됐다. [사진=뉴시스]


#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해서 그렇지 지난해 11월 열린 이기흥 회장 취임식도 남달랐다. 단순한 회장 취임식을 넘어 ‘대한민국 체육인 통합의 밤’이라는 타이틀이 걸렸다. 당연히 대한체육회의 예산으로 치르는 행사지만, 이기흥 회장은 돌려받은 선거출마 기탁금(7,000만 원)을 사용했다. 돈이 궁한 체육계에서는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보승을 아는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 보승은 소리소문 없이 2004년 (재)청소년을 위한 나눔문화재단을 설립해 지금까지 매년 젊은이들에게 거액의 장학금을 쾌척하고 있다.

# 얘기가 나온 김에 ‘돈’ 얘기 하나 더. ‘최순실의 비서’였다는 말을 듣는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현재 구속)은 권력을 뒷배로 삼아 체육계에서 전횡을 일삼았다. 김 전 차관이 가장 싫어했던, 그러니까 현 정권의 체육계 블랙리스트 중 맨 위에 적혀 있던 이름이 이기흥이었다. 대한체육회장 입후보 자격부터 법원에 이의신청을 해 어렵게 얻을 정도였다. 선거과정에서 정부 측이 친정부 후보들을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보승의 한 지인은 최근 이렇게 말했다. “지났으니까 하는 말인데, 선거 전 정치권의 한 후배가 ‘이기흥은 절대 안 되니 그 사람 돕지 마라. 지금 A검사가 수사하고 있는데 결코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충고를 해왔다. 그런데 검찰도 놀랐다고 한다. 수십 회에 걸쳐 이기흥 및 관련자들의 통장을 조사했는데 나온 게 아무 것도 없었거든. 불투명한 지출이 몇 천만원 있었는데 알고보니 어디 연탄 사준 것이라나. 이 정도면 정말 보기 드물게 깨끗한 사람 아니겠어.” 세상사 참 묘한 것은 보승을 조사하던 A검사는 지금 검찰을 거쳐 특검에서 김종 전 차관을 수사 중이라고 한다.

# 사탕발림식으로, 그것도 종교적 분위기까지 동원해 이기흥 회장을 띄우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엄중한 경고를 하고 싶다. ‘전생에 독립운동을 했는지 몰라도 참 운이 좋다. 이길 수 없는 선거에서 이기고, 정부의 견제로 고생길이 훤했는데, 최순실 게이트로 그마저도 싹 사라졌다’는 말을 듣는 이때 보승이 ‘하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책임이 고스란히 그의 몫이 된다. 자칫 큰 실수를 했다가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며 쌓아온 공덕마저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다(사법처리를 받은 대한체육회장이 한둘이 아니다). 아니, 개인의 차원을 넘어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 대한민국 체육개혁의 적기를 날려버릴 수 있다. 그래서 이기흥이라는 본명 대신 보승이라는 법명에게 당부하고픈 것이다. 이제 시작이고, 정말 고생 좀 하시라고.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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