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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2] (10) 토트넘 소녀 서포터들, ‘더블’을 노리다! - 도즈 글로리 글로리 데이즈
<헤럴드스포츠>가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2를 연재합니다. 앞서 연재된 시즌1이 기존에 출판된 단행본 '킥 더 무비'를 재구성한 것이라면 시즌2는 새로운 작품을 대상으로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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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 축구팬을 그린 영화


이제 K리그 축구장에서 여성 축구팬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교복을 입고 머플러를 두른 채 좋아하는 클럽을 응원하는 여학생 팬들의 수도 늘고 있습니다.

2012년 전북 현대의 홈 경기 때 축구팬들은 색다른 입장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통 양 팀 선수들이 일렬로 입장할 때, 선수들과 함께 손을 잡은 어린이들이 에스코트하는 장면이 많았었는데요, 전북의 홈경기 때는 특이하게도 교복을 입은 미모의 여고생들이 에스코트를 대신 했습니다. “그린 걸즈”라 불리는 프로그램이었죠. 입시 지옥에서 벗어난 여고생들은 녹색 잔디를 밟으며 특별한 추억을 쌓았습니다.

그렇다면 축구에 죽고 사는 유럽에도 이런 여학생 팬들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게다가 그 역사도 꽤 오래된 것 같네요. 이번 영화는 1960년대 잉글랜드 토트넘을 응원하던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도즈 글로리 글로리 데이즈>입니다.

발레는 싫어! 토트넘 축구가 좋아!

1983년경 어느 날, 런던 연고의 명문 축구팀 토트넘(Tottenham Hotspur FC)의 홈 경기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White Hart Lane)의 기자석에서는 수많은 기자들이 경기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노트북과 인터넷을 이용해 기사를 전송하는 오늘날과 달리, 1980년대 축구장에서는 기자석마다 유선 전화가 놓여져 있고, 기자들은 경기 내내 전화기를 붙잡고 신문사에 경기 내용을 알려줬죠.

온통 남자들밖에 없는 기자석에 유일한 여기자가 한 명 눈에 띕니다. 바로 줄리아(Julia Herrick)죠. 줄리아는 당시만 해도 드문 여자 축구 기자입니다. 그저 토트넘이 좋아 토트넘 담장 기자가 된 줄리아. 하지만 초보 기자다 보니 일은 서툴기만 합니다. 우왕좌왕하던 그녀는 경기가 끝난 후 신문사로 가던 중, 어느 신사의 차를 얻어 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자신을 태워준 신사가 자신의 어릴 적 영웅이던 대니 블랜치플라워(Danny Blanchflower, 이하 대니)인 것 아닙니까?

사실 줄리아는 13살이던 1960년, 아버지를 따라 간 축구장에서 토트넘의 주장인 대니에게 홀딱 반하게 됩니다. 또래 여학생과 달리 축구에 빠진 줄리아를 보며 어머니는 걱정을 하지요. 어머니 생각에 축구팬이란 공장 노동자이거나 혹은 거리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줄리아의 모습을 동료 여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줄리아의 학교에도 다른 여학생 토트넘 팬들은 있었습니다. 바로 토니(Toni), 텁(Tub), 제일버드(Jailbird)라 불리는 친구들이지요. 여학생임에도 껌을 질겅질겅 씹고, 온 몸에 멍이 들도록 패싸움을 하면서 길거리에서 축구 응원가를 부르며 몰려다니는 이들 토트넘 팬들에 줄리아는 흥미를 느낍니다.

결국 줄리아는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한 손에 축구장 잔디를, 다른 한 손에 스타디움의 나무 조각을 쥐고 토니네 서포터 모임에 입단합니다. 이후로 줄리아는 토니네 패거리와 함께 토트넘의 경기를 보러 다닙니다. 버스를 타고 원정을 가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 라디오로 FA컵 추첨식을 들으면서 열광하기도 하죠.

1960/61 시즌, 토트넘은 주장 대니의 활약 속에 연승 행진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그 어떤 잉글랜드 팀도 달성하지 못한 “더블(Double, 한 시즌에 두 개의 우승 트로피를 드는 것)”을 노리고 있었죠. 즉 풋볼 리그(오늘날의 프리미어 리그)와 FA컵 모두에서 우승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의 현실화가 눈 앞에 다가옵니다. 토트넘이 웸블리(Wembley) 경기장에서 열리는 FA컵 결승전에 진출한 것이지요. 줄리아는 선착순으로 경기장 안의 매표소에서 판매되는 결승전 표를 구하기 위해 결단을 내립니다. 티켓 판매 전날 밤 경기장에 몰래 잠입해서 아예 하룻밤을 새는 것이지요. 하지만 1인 1표의 원칙에 따라 줄리아 혼자서는 친구들의 티켓을 모두 살 수 없게 됩니다.

티켓은 못 구한 상황. 설상가상으로 줄리아의 어머니는 줄리아가 사내애들처럼 되는 걸 막기 위해 줄리아를 발레 학교에 보냅니다. 과연 줄리아와 친구들은 토트넘이 FA컵 결승에서 뛰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요?

토트넘의 위대했던 1961년과 레전드 대니

이 영화는 영광스러웠던 토트넘의 1960/61 시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 속 줄리아가 동경하던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백넘버 4번의 흰색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더블을 달성했습니다.

1960/61 시즌, 토트넘은 시즌 개막과 함께 무려 11연승을 달리게 됩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2위와의 승점을 8점으로 벌리며 마침내 정규 리그 우승을 거머쥐게 됩니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도 나오듯, FA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레스터 시티(Leicester City FC)를 2:0으로 격파하고 우승컵을 들어올립니다. 토트넘의 이 “더블” 기록은 1897년 아스톤 빌라(Aston Villa)의 더블 이후 최초의 것으로서, 20세기 들어서는 첫 더블이었죠.

토트넘의 더블을 이끈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원래 아일랜드 태생입니다. 그의 동생인 재키(Jackie)는 맨유에서 뛰었고, 그 유명한 뮌헨 항공 참사를 겪었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고 살아남았다고 하네요. 뮌헨 항공 참사는 <유나이티드>로 영화화 되었으니, 대니와 재키 형제는 둘 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영화화된 진기록을 갖게 되는군요.

영화 마지막 장면, 자신의 어릴 적 추억을 이야기한 청년 초보 기자 줄리아는 벅찬 마음으로 중년의 대니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날 웸블리 결승전 이후로 줄리아는 친구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죠. 복잡한 심정의 줄리아에게 대니는 훌륭한 기자가 될 것이라며 격려의 말을 던집니다.

토트넘의 영광스러웠던 60/61 시즌은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졌지만, 그 추억은 어린 여학생 팬들의 가슴 속에 심어져 한 명의 훌륭한 축구 기자를 탄생시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축구 클럽의 역사는 선수들만이 아닌, 그 기억을 공유하는 팬들과 같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클럽의 영광을 공유하는 팬들은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어 존재하죠. 꿈 많던 여학생들의 축구 이야기, <도즈 글로리 글로리 데이즈>였습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헤럴드스포츠>에서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1(2014년 08월 ~ 2015년 08월)을 연재했고 이어서 시즌2를 연재 중이다. 시즌1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를 재구성했고, 시즌2는 책에 수록되지 않은 새로운 작품들을 담았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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