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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진짜 이름이 ‘거성’인 복싱인 - 풍산프로모션 이거성 회장
며칠 전 현재 KBI 복싱협회의 부회장이자, 강남에서 누가 치과의원을 운영하는 도승진 원장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마침 강남 모처에 있는 이거성 회장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같이 동행할 수 있느냐?”고 묻길래 흔쾌히 승낙했죠. 강남 모처에 있는 이 회장의 사무실에서 두 시간여 동안 담소하면서 그간 복싱계에 몸 담으며 세찬 풍파를 겪은 애환과 챔피언 등극의 감회를 가감없이 들었습니다.

참고로 도승진(63년생) 원장은 과거 군산의 복싱체육관에서 동문 수학한 동료였지만 그 당시에는 가슴을 맞대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실미도의 특수부대처럼 주야로 엄청난 트레이닝에 전념하는 상태였기에 취미로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 도 원장과는 교류할 시간이 없었고, 대화를 해도 인사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노는 물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 다시 해후하고, 복싱을 사랑하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속정이 많이 쌓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더 이상 특수부대의 요원(?)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이었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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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I 도승진 부회장(왼쪽)과 풍산프로모션 이거성 회장.



알리를 흉내내던 복싱신동

이거성 회장은 1951년 익산생으로 본래 부친이 피혁공장을 운영한 까닭에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선천적으로 몸집은 크지 않았지만 씨름만큼은 천부적으로 소질이 있었답니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이리(익산의 옛지명)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웠는데 당시엔 무하마드 알리의 흉내를 참 많이 냈다며 겸연쩍게 웃기도 했습니다.

‘학생 이거성’은 1966년 이리 남성고에 입학하면서 주목받는 복서로 성장합니다. 특히 1967년 제48회 전국체전과 학생선수권대회 등에서 라이트플라이급으로 출전해 거푸 우승하면서 주가를 올렸고, 특히 학생선수권 대회에서는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습니다. 이거성은 이리체육관의 조석인 관장 문하에서 스탭 연습을 발바닥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맹훈련했습니다. 당시 이리 체육관은 스탭연습만 별도로 시험(?)을 볼 정도로 조석인 관장은 ‘스탭 즉 풋워크가 복싱의 중심’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었죠. 명장들은 대개 ‘평범한 진리’를 철학으로 갖고 있는 법입니다. 이거성의 리드미컬(rhythmical)한 스탭은 1972년 뮌헨 올림픽 플라이급에서 고교생 최초로 출전하는 유종만(현 한국체대 교수)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발군이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을 평정한 이거성은 더 이상 학생무대에는 의미를 두지 않고, 남성고 3학년 때인 대뜸 성인 무대의 최고봉인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선발전에 한 체급을 올려 플라이급으로 출전했습니다. 그리고 발레리나처럼 율동적인 스탭과 자로 잰듯한 레프트 카운터 일격으로 차곡차곡 득점에 성공하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급기야 최종선발전 4강에서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 플라이급 우승자인 손영찬(44년생, 전 부산 동아대 복싱감독) 씨를 예상을 뒤엎고 판정으로 꺾으면서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이거성은 만 17세 홍안의 소년이었고, 손영찬은 만 24세의 전성기를 누리는 잘나가는 복서로, 그 유명한 이후락 씨가 창설한 양지팀의 핵심멤버였습니다. 그리고 최종 결승에서 이거성은 서상영(전매청,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 라이트플라이급 은메달리스트)과 맞붙어 결코 밀리지 않는 일전을 벌였지만 아쉽게도 1-4로 판정패했습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했던 복싱대표팀의 선수, 감독, 심판 등 임원진이 총 10여 명이었지만 현재 생존해 계신 분은 플라이급에 서상영 씨가 유일합니다. 감독이었던 강준호, 국제심판이었던 주상점 박인양 김명곤 씨를 비롯하여 선수로 출전했던 지용주(라이트플라이급) 장규철(밴텀급) 김성은(페더급) 이창길(라이트급) 김사용(라이트웰터급) 박구일(웰터급) 씨 등은 1985년 불의의 사고로 지용주(48년생 원주)가 37세로 타계한 것을 스타트로 대개 50세를 전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좀 못된 표현이지만 그래서 복싱계에서는 ‘저주받은 멕시코 올림픽 멤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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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졸업식에서 김준호 트레이너, 이거성 '선수', 복싱해설자 오일룡 씨(왼쪽부터).



경희대 시절의 외도

이후 이거성은 예비고사 원년인 1969년에 경희대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당시 경희대의 학장은 그 유명한 김명복(1912년 평북 정주) 박사였습니다. 김명복 선생은 임종의 순간에도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고 남은 재산을 운동선수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유언을 남긴 훌륭한 교육자였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가장 권위 있는 ‘김명복 박사배’입니다(참고로 김명복 박사는 참된 지도자 양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는데 그 분 밑에서 탄생하신 명복서가 156년 멜버른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이자 용인대 교수였던 송순천 그리고 최초의 세계 챔피언 김기수, 상원체육관 노병엽 관장, 한국체대 손형구 교수 등입니다.). 그렇지만 경희대에 입학한 후 이거성은 복싱에 권태감을 느끼고, 운동이 끝나면 경희대 체대생들과 밤의 세계로 진출하여 서울 명동 샤보이 호텔을 중심으로 종로 광화문 서울역 등에서 젊은 혈기를 맘껏 발산(?)했습니다. 당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주먹세계의 보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친구로 지냈는데 그 무렵 호남 출신들로 구성된 경희대 체대 출신들의 파워는 정말 막강했다고 합니다.

그랬던 탓일까요? 경희대를 다니는 동안 선수 이거성은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1학년때 아시아 주니어 대표(밴텀급)에 선발돼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코치는 대한민국 복싱 부문 체육대상을 받은 김완수(29년생 군산) 씨였으며, 국제심판은 작고한 유석규 씨 등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다

이거성은 1973년 육군팀에 입단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이듬해인 1974년 세계군인선수권 페더급에 출전, 당당히 금메달을 획득했고 대회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이 날이 7월 9일로 기억되는데 5일 전 홍수환의 세계챔프 등극과 맞물려서 한국 복싱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 다음해인 1975년 아시아선수권을 제패한 이거성은 미국에서 개최된 세계군인선수권마저 또 다시 우승하며 2연패를 달성합니다.

이거성은 1976년도 킹스컵 대회에서도 박찬희 박인규 박태식 김성철 등과 함께 당당히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결승까지 진출하는 등 경희대 시절과는 사뭇다른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때 박찬희는 태국의 복싱 영웅인 파야오 푼타라트(태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이자 후에 WBC 슈퍼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등극)를 꺽고 라이트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그가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던 대회였기에 개인적으로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어쨌든 ‘노력하지 않는 천재’였던 이거성이 군대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운동을 하면서 그 기량이 꽃을 피웠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야간활동’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운동에만 전념한 것이 그 화려함의 원동력이었던 것이죠.

이거성은 군제대 후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원진체육관의 김상기 회장(조흥은행 지점장)에게 발탁되어 1976년 8월 오카베 츠요시라는 선수를 상대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1라운드 KO승으로 화려한 데뷔였습니다. 오카베는 당시 일본챔피언이자 동양 1위였고 세계타이틀에도 도전한 경험이 있는 중견 복서였습니다. 이어 이거성은 5전째에 당시 세계 2위이던 소크라테스 바토토를 10라운드 판정으로 꺽으며 그의 기량이 세계 정상권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7전째. 필자도 이 경기를 TV로 시청했는데 상대는 카를로스 멘도사였는데 이 복서는 데뷔초에 그 유명한 로베르토 듀란과 경기를 벌여 판정으로 패했고, 또한 리르베르고 리야스코(전 WBC 슈퍼밴텀급챔피언)와 무승부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고메즈와 세계타이틀매치를 치러 10라운드까지 접전을 벌였던 강타자였습니다. 이 선수를 맞이하여 이거성은 5라운드 KO승을 거두면서 곧바로 매스컴에서 차기 세계챔피언 후보에 오를 도전자 영순위가 됐습니다. 이후 4연승을 거두며 11연승을 질주했지만 1979년 3월 윌프레드 고메즈 선수와 세계 타이틀 매치가 가시화 되는 와중에 전초전 형식으로 세계랭커였던 세가와 유키오와의 일본 원정경기에서 왼쪽 손목에 골절상을 입고, 7라운드에 경기를 포기하고 맙니다. 그리고 부상 때문에 짧지만 나름대로 강렬했던 임팩트를 남기고 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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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이거성 회장의 모습.



뼈 속까지 복싱인

이후 이거성은 지인의 초청으로 3개월간 미국에 머물렀고, 귀국 후 어느 날 고속도로를 운전하던 중 차가 갑자기 멈춰섰다고 합니다. 차에 기름이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주머니에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거성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때 ‘내가 배운것이 복싱인데 복싱으로 내 삶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거성은 바로 경희대 선배였던 우재풍 풍산공원 회장에게 도움을 청헸습니다. 이 분의 도움으로 이거성은 당시 88 서울올림픽 최종선발전에서 탈락하고 방황하던 민병용(경남대, 86아시안게임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2,000만 원에 스카우트했고,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양석진(동아대)에게 패하고 진퇴양난에 빠진 오광수(한국체대, 85년 서울 월드컵 LF 금메달)를 진로그룹 장봉용 씨에게 부탁을 하여 3,000만 원에 영입했습니다. 두 선수를 쌍돗대로 삼아 드디어 1990년 풍산프로모션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거성 회장은 오광수(5연승<3KO>)가 1993년 1월 리카르도 로페즈(멕시코, 31연승<20KO>)와 WBC 스트로급 타이틀매치를 벌여 9라운드 TKO패를 당할 때 8,000만 원의 적자를 보면서 아픔을 견뎌냈다고 술회했습니다. 조개가 후일 진주를 잉태하기 위해 살을 찢는 고통이 찾아왔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회장에게 물었습니다. “하필이면 미스터 퍼펙트라고 불리는 로페즈와 구태어 경기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라고. 이 회장은 한 체급 위인 라이트 플라이급에서도 움베르토 곤잘레스(멕시코)나 마이크 카바할(미국) 같은 강타자들이 많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당시 프로복싱계를 보면 이렇습니다. A급 선수 50명이 포진된 88프로모션이 4개의 방송국을 잡고 일사천리로 방송일정을 소화하던 ‘거대한 제국’이었다면 풍산프로모션은 소수의 엘리트 선수 4,5명을 가지고 로테이션으로 운영했던 중소기업이었니다. 이런 규모의 논리를 극복하고 후에 풍산프로모션은 조인주 지인진 등의 세계챔피언을 연달아 배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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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한국체대 교수 유종만(오른쪽)의 선수 시절 모습.



‘늦깎이 챔프’ 조인주와 지인진

조인주(69년생, 동국대)는 1987년 쿠바에서 개최된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1989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 그리고 1990년 서울컵대회에서 은메달에 이어 1992년도 프로에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불어닥친 프로복싱계의 한파와 맞물려 1998년 세계타이틀에 도전할 때까지 불과 12전(6KO)밖에 뛰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이런 난관을 딛고 1998년 8월 한국선수들을 상대로 14전 전승<12KO>을 기록한 '한국복서 킬러' 제리 페날로사(42전 39승<24KO> 2무 1패)와의 4차방어전 도전자로 선택돼 빠른 스피드와 카운터 펀치를 유효 적절하게 구사하여 판정승을 거뒀습니다. 바로 풍산프로모션 창단 8년 만에 첫 챔피언에 등극하는 감격이 나온 것입니다.

조인주가 이 타이틀을 5차까지 방어하면서 나름 풍산프로모션의 입지가 강화됐습니다. 조인주를 더 칭찬하고 싶은 것은 챔피언에 등극할 때 그의 나이가 30세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은퇴를 하고도 남을 나이였죠. 나이가 많은 제자를 챔피언으로 만들기 위해 이거성 회장은 경기 일주일 전에 호세 슐레이만 WBC회장을 리치칼튼 호텔로 초빙하여, 당시 실세였던 김홍일 의원이 영접하는 등 환대했습니다.

이어 지인진이 우여곡절 끝에 2004년 4월 11일 WBC 세계페더급 타이틀매치에서 영국의 마이클 브로디를 원정경기(맨체스터)에서 7라운드 KO승을 거두고 풍산프로모션의 두 번째 챔피언이 될 때 이거성 회장은 어느 누구도 모를 정도로 벅찬 환희와 감격을 느꼈다고 회고했습니다.

여기서 지인진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서울 당곡고 졸업반이던 1991년 11월 만 18세에 프로에 데뷔하여 2004년 32세에 세계 정상에 올라갈 때까지 무려 13년이라는 길고긴 인내의 시간을 참으면서 준비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전적이 32전이었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허기진 갈증을 참으면서 극적으로 폭포수 같은 시원한 물줄기를 '팡'하고 쏟아냈던 것이었습니다. 그후 지인진은 2006년 1월 고시모토 다카시에게 홈텃세에 밀려 억울하게 잃었던 타이틀을 그해 12월 17일 로들포 로페즈를 판정으로 꺽으며 투타임 세계챔피언이 됩니다. 이 날은 우리나라 복싱의 43번째 챔피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이후 지금까지 세계챔피언은 단 한명도 탄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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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다시 한 번 복싱프로모션 사업을 준비 중인 이거성 회장.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거성 회장은 돈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두 명의 선수에 의해 3차례나 세계챔피언의 팡파레가 울려 퍼질 때 도움을 주신 분들이 생각난다고 회고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대은 국제심판, 김기윤 회장, 그리고 함께 동고동락한 마방열 관장을 거론했습니다. 현재 이거성 회장은 천안시 병천면에 있는 (재)풍산공원묘원을 운영하는 대표로 있으며 다음 달 중순 서대문구 적십자 병원 사거리에 체육관을 오픈하여 제2의 풍산프로모션 신화를 재현하는 데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참고로 이 회장은 현재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유학 중인 22살된 늦둥이 막내딸이 있는데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사진을 꺼내어 바라본다고 말씀하시면서 훈훈한 부성애를 보여주었습니다.

‘세월은 젊음을 떠나 보낸다. 하지만 기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하프타임을 마치고 곧 후반전 휘슬이 울릴 이거성 회장의 인생. 아마도 그는 가슴속으로 힘차게 이렇게 외칠 것 같습니다. '브라보! 복싱 이스 마이 라이프'(Bravo! boxing is my life)라고. 아무쪼록 그동안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토대로 일취월장 번창하길 바랍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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