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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에 관심 없는 유럽 사람도 있다고요! - 이준석의 킥 더 무비<유럽에서의 하루>
유럽의 다양한 문화, 하지만 공통된 관심사인 축구

<유럽에서의 하루(One Day in Europe)>는 4개의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공통분모가 있지요. 바로 유럽의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여행객들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유럽 챔피언스리그 축구 결승전 날에 벌어진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근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축구에 죽고 산다는 유럽 대륙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축구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이네요. 하지만 주인공들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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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리던 날, 축구에 관심 없는 네 여행객의 이야기


영화는 가상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배경으로 진행됩니다. 모스크바에서 터키의 갈라타사라이(Galatasaray)와 스페인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Deportivo La Coruna) 간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립니다. 물론 요즘 같아서는 이들 팀보다는 다른 팀들이 결승전에 올라가겠지만 뭐 어떻습니까? 영화인데 말이죠.

온 유럽을 들끓게 하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날, 영화는 유럽의 네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우선은 결승전이 열리는 모스크바. 왠지 삭막한 도시지만 터키와 스페인에서 온 축구팬들로 도시는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축구에 별 관심이 없는 여성인 케이트(Kate)는 세련된 정장을 입고 사업차 이곳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택시 강도를 당하게 되죠. 낯선 모스크바 땅 한 가운데에서 짐을 모두 잃어버린 케이트. 하지만 이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러시아 여성인 엘레나(Elena)가 도와줘서 경찰서로 가게 됩니다. 모스크바의 경찰서는 이미 난동을 부린 터키와 스페인 축구팬들이 붙잡혀 와서 난리통입니다. 게다가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러시아 경찰들은 자기네 도시에서 열리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보느라 케이트의 사정을 들어줄 생각도 안 하지요. 과연 케이트는 말도 안 통하는 이역만리 러시아에서 어떻게 될까요?

두 번째 이야기는 결승전에 오른 갈라타사라이의 연고지인 터키 이스탄불에서 펼쳐집니다. 모스크바와 달리 따뜻한 지중해의 햇살이 도시를 비추고, 유럽보다는 이슬람 국가를 연상시키는 각종 이국적인 건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독일인 여행객인 로코(Rokko)는 여행자 보험금을 타기 위해 가짜로 강도 피해자 행세를 합니다. 갑자기 길거리에서 강도를 당한 척 하고는 주변에 지나던 택시를 잡습니다. 그리고 경찰서로 가자고 하죠.

하지만 터키 현지인 택시기사인 셀랄(Celal)은 경찰서로 가기는커녕, 자기 동네에서 일어난 강도 사건이니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발 벗고 나섭니다. 사실 로코는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만 써서 보험회사에 제출만 하면 끝이지요. 그런데 이런 로코의 사정도 모르는 셀랄은 오지랖을 발휘하며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닙니다. 현대화되었지만 각박한 서구와 달리 터키는 아직 시골스러운 인간미가 살아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강도를 당한 건 아닌 로코는 그런 셀랄의 행동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이스탄불 곳곳은 갈라타사라이의 결승전으로 혼잡 그 자체이죠. 결국 동네에서 있지도 않은 범인을 못 찾자 로코는 터키의 경찰서에 마침내 도착합니다. 하지만 터키 경찰들 역시 불친절한 태도로 로코가 보험사기를 치는 게 아닌지 의심할 뿐입니다. 과연 로코는 어떻게 될까요?

세 번째 이야기는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가 연고를 두고 있는 스페인 갈리시아(Galicia) 지방의 유명한 관광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펼쳐집니다. 유명한 유적지와 성당이 있는 이 도시에 헝가리 여행객 가보(Gabor)가 도착합니다. 중년의 학교 교사인 가보는 유럽 전역을 배낭여행 중이지요.

그런데 유적지 앞에서 사진을 부탁하다가 도리어 카메라를 도둑맞고 맙니다. 다급한 마음에 근처의 스페인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한 가보. 하지만 스페인 경찰은 천하태평입니다. 남유럽 특유의 유쾌함과 느긋함으로 사건은 해결 안 하고,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데포르티보의 결승전을 보며 술집에서 시간을 때우네요. 스페인 경찰관은 정작 경찰서에서 가보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며 역정을 내지요. 과연 가보는 어떻게 될까요?

마지막 이야기. 앞선 세 도시들에 비해 월등히 현대화된 독일의 수도 베를린입니다. 돈 많은 도시 베를린에서 한몫 잡아보려는 거리의 행위 예술가 라치다(Rachida)와 클라우드(Claude). 하지만 그들은 예상보다 턱없이 모자라는 돈을 벌 뿐입니다.

절망스러운 마음에 베를린의 터키인 거주지에 간 그들. 그 곳에는 독일에 온 터키인 노동자들이 갈라타사라이의 결승전을 보며 흥분하고 있습니다. 연고도 없는 외국에서 돈도 없고, 꿈도 잃어버린 그들. 과연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유럽에서는 결국 피해 갈 수 없는 축구

여러분은 ‘유럽’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나요? 서구, 현대화, 전통, 부유함, 세련미 등이 떠오르지 않을까요? 하지만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아시아의 이미지와 달리 우리 아시아에도 여러 다른 문화가 존재하고 있죠.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체로 보이는 유럽도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은 이 영화에서도 잘 나타나 있죠.

많이 개방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공산주의의 경직됨이 남아 있는 듯한 모스크바, EU 가입을 목표로 하고 스스로 유럽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유럽의 기독교 문화와는 판이한 이슬람 문화를 향유하는 이스탄불, 산업화된 모습은 별로 없고 낙천적이고 태평한 정서를 가진 스페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계적이고 도시화된 베를린까지. 이 영화 <유럽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다른 특성을 가진 네 도시를 여행하는 여행객을 통해 유럽 내에서도 벌어지는 문화 충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련된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일하는 커리어 우먼 케이트에게 모스크바 경찰의 경직성과 관료주의는 참으로 한심해 보입니다. 합리적이고 도시적인 독일인 로코에게 터키 경찰의 강압적인 심문과 인심 좋은 택시 기사의 오지랖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헝가리 교사 가보는 절도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다루는 스페인 경찰관이 답답하죠. 예술적 기질이 충만한 라치다와 클라우드는 유머 감각 없고 각박한 베를린의 분위기가 낯섭니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는 같은 유럽 내에서도 많은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또 그 문화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를 가진 이들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축구’죠. 전 유럽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리는 순간
만큼은 딱딱한 러시아의 경찰도, 이슬람을 믿는 터키인들도, 낙천적인 스페인 사람들도 모두 하나가 됩니다.

물론 유럽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축구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영화의 주인공인 여행객들은 별로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사업, 돈, 예술, 여행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축구에 열광하는 주변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마이너 취급을 받는 곳과는 정반대이지요. 이래서 유럽이 축구의 천국이라 불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불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결승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데 왜 다들 관심이 없지?” 그러자 축구에 별 관심이 없는 직장 동료들은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왜 모두가 축구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이 영화를 보니 유럽에서는 정반대로군요. 축구팬의 입장에서, 우리도 그렇게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축구를 좋아하던 저를 별종 취급하던 사람들과 입장이 바뀐다면 참 재미있겠네요. “왜 너는 축구에 관심이 없지?”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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