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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의 나라, 미국을 향하여 - 이준석의 킥 더 무비<원스 인 어 라이프 타임>

거짓말 같았던 뉴욕 코스모스

<더 게임 오브 데어 라이브스(The Game of Their Lives)>에는 미국 대표팀의 기적적인 승리가 감동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표팀이 아닌, 프로축구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월드컵과 같은 단기 토너먼트에서 깜짝 성공을 거두는 다크호스들을 보곤 합니다. 1966 월드컵의 북한, 1990월드컵의 카메룬, 2007 아시안컵 우승의 이라크.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대표팀의 선전에 비해 그 나라 프로리그의 발전은 아직 요원하다는 것이겠죠. 이런 나라들을 축구 강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변은 이변으로 끝날 뿐 반복되는 경우가 적은 것도 뒷받침 해줄 프로리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도 사정이 이러니 미식축구와 야구의 나라 미국에서 1950년의 기적만 믿고 프로축구를 성공시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관적인 예측을 모두 빗나가게 한 팀이 있죠. 바로 뉴욕 코스모스 팀입니다.

미식축구와 농구, 야구팀의 인기를 넘어 미국 전역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프로축구팀. 하지만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팀. 그러나 다시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팀. 이런 거짓말 같은 사건을 다룬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원스 인 어 라이프타임(Once in a lifetime ? An extraordinary New-York Cosmos stor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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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불모지 미국에 탄생한 세계적 명문팀


1960년대 말, 축구 불모지 미국. 미국이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기적적으로 잉글랜드를 꺾은 지도 2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축구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는, 끊김 없고 연속적인 스포츠(축구)에 별 관심이 없어요. 미국의 스포츠에는 인위적인 중단과 시작이 있는데, 그 시간에 시청자와 관중은 맥주나 주전부리를 먹곤 하죠.”

“축구를 처음 본 미국인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의아해 할 거에요.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걸로만 보일 테니까요.”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전이 BBC를 통해 전 세계로 중계가 되고, 미국인들도 TV를 통해 이를 보게 됩니다. 축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때마침 굴지의 미디어 그룹인 워너(Warner communication) 사의 회장인 스티브 로스(Steve Ross)가 축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죠. 영화사와 레코드사, 그리고 게임 회사 아타리(Atari)까지 소유한 그는 전 세계의 인기 스포츠를 미국에 도입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 미국 축구 리그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입니다. 다섯 개의 팀으로 이루어진 북미 축구 리그(North American Soccer League, 이하 NASL)는 절대 프로라고 불릴 수준이 아닙니다. 가장 인기 있는 세인트루이스 팀의 경기에 고작 340명의 관중이 모였으니 말 다했죠.

스티브 로스는 미국에서 축구 열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뉴욕 연고의 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뉴욕 연고의 축구팀 이름은 야구팀과 똑같은 ‘뉴욕 메츠(New York Mets)’였습니다. 메츠(Mets)는 대도시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의 약자죠. 스티브 로스는 단순한 대도시 팀을 넘어 전 세계를 호령하는 팀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서 메트로폴리탄보다 상위 개념인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세계주의)을 떠올립니다. 여기서 이름을 따 ‘뉴욕 코스모스(New York Cosmos)’라는 팀이 탄생하죠.

이름은 그럴싸한데 뉴욕 코스모스의 현실은 초라합니다. 뉴욕 변두리의 랜달 섬(Randall’s island)에 있는 홈구장에는 깨진 유리 파편이 뒹굽니다. 주변에는 교도소와 핫도그 판매상밖에 없죠. 관중은 기껏해야 100여 명입니다. 관중들은 대체 ‘사커(Soccer)’가 뭔지 되물을 정도입니다.

스티브 로스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타 선수의 영입을 시도합니다. 평균 관중 수백 명의 미국 축구에 과연 어떤 스타가 오려 할까요? 하지만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집니다.

뉴욕 코스모스의 새로운 용병은 바로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축구 황제 펠레(Pele)였습니다. 당시 고국 브라질의 산토스에서 은퇴를 선언한 펠레에게 유벤투스와 레알 마드리드가 접근합니다. 하지만 뉴욕 코스모스는 이런 말로 펠레를 설득하죠.

“유벤투스에 가면 리그 우승컵을 얻겠지만, 미국으로 오면 나라를 가지게 된다.”

마침내 펠레는 2년 동안 470만 달러를 받기로 하고 뉴욕 코스모스에 입단합니다. 당시 메이저리그 홈런왕인 행크 아론(Hank Aaron)의 연봉이 20만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금액이죠.

기자 회견장에서 펠레는 마침내 축구가 미국에 상륙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습니다. 야구광이자 미국의 스포츠 칼럼니스트인 딕 영(Dick Young)은 펠레의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소리치죠. “축구는 외래 스포츠다. 미국에선 열리면 안 된다.” 그는 축구로 인해 프로야구가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경고를 합니다.

그의 걱정은 현실화됩니다. 반대로 코스모스에겐 엄청난 기회가 찾아오죠. 펠레가 뛰는 코스모스에는 구름 관중이 몰립니다. 축구의 존재조차 모르던 미국인들은 이제 펠레에 열광합니다. 랜달 섬의 낡은 경기장의 관중석이 부족하자 뉴욕 양키스 경기장에서 코스모스의 축구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펠레가 야구 경기를 보기 위해 야구장을 찾자 관중들이 펠레에게 열광하느라 경기를 진행할 수 없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마침내 펠레와 축구를 비난하던 야구 칼럼니스트 딕 영도 두 손을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축구는 정말 관중들이 좋아하고, 진정 세계적인 스포츠이다.”

펠레의 영입이 구름관중을 불러 모으자 NASL의 다른 구단들도 유럽의 스타들을 영입합니다. 영국의 고든 뱅크스(Gordon Banks), 조지 베스트(George Best) 같은 슈퍼스타가 대서양을 건너옵니다.

코스모스도 이에 뒤질 새라 이탈리아 라치오 팀의 득점왕 키날리아(Giorgio Chinaglia)를 데려옵니다. 자기중심적인 키날리아는 펠레와 종종 충돌합니다. 그래도 코스모스를 우승으로 이끌죠. 게다가 이제는 독일 대표팀의 간판스타 베켄바우어마저 코스모스의 유니폼을 입습니다.

1977년, 뉴욕 코스모스는 마침내 7만 5,000석 규모의 자이언츠 스타디움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전 좌석 매진이라는 신화를 이뤄내죠. 코스모스의 경기에는 6만 이상의 관중이 몰립니다. 다른 축구팀들도 흥행 돌풍을 이어갑니다. 많은 축구 전문가들은 미식축구와 야구의 나라가 조만간 유럽 축구를 추월할 거라고 예측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비극은 시작됩니다.

먼저 NASL의 지나친 팽창이 문제가 됩니다. 1978년, NASL에는 무려 24개의 팀이 난립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축구 경기의 질이 떨어지게 됩니다. 게다가 펠레나 베켄바워 같은 슈퍼스타를 경쟁적으로 영입하다 보니 각 구단들의 재무상태가 악화됩니다.

TV 중계도 NASL의 발목을 잡습니다. 프로 스포츠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TV 중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짧은 축구 역사로 인해 축구 중계 전문 인력이 부족해 미숙한 중계가 이어집니다. 이로 인해 시청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합니다. 게다가 다른 종목에 비해 광고 시간이 짧은 축구의 특성으로 인해 미국 방송사들은 축구 중계를 꺼리게 되죠. 광고를 위해 축구 경기 시간을 4쿼터로 나누려는 움직임은 FIFA에 의해 제지됩니다.

게다가 리그를 선도하던 뉴욕 코스모스 팀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미디어 왕국을 구축했던 스티브 로스의 회사는 1970년대 후반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타리 쇼크(Atari shock)로 불리는 게임 업계의 불황이 결정적이었죠. 결국 1982년부터 NASL의 팀 수는 줄기 시작합니다. 많은 팀들이 매각 시장에 나오게 됩니다.

1983년, 스티브 로스는 미국 축구의 마지막 희망을 살리려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1986년 월드컵은 멕시코가 개최하게 됩니다. 기울어가는 미국 축구에 마지막 결정타가 된 것이지요.

결국 1984년 코스모스 팀은 해체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NASL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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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가 뿌린 미국 축구의 씨앗

코스모스는 사라졌습니다. 잠시나마 훈풍을 맞았던 미국 축구도 다시 폐허로 돌아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NASL이 뿌린 씨앗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매를 맺게 됩니다.

미국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에 드디어 진출하게 됩니다. 1950년 브라질을 꺾은 지 40년 만의 쾌거죠. 게다가 미국 프로축구를 다시 부활시킨다는 전제 조건으로 1994년 월드컵의 미국 개최가 성사됩니다. 한때 뉴욕 코스모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자이언츠 스타디움(Giants Stadium)에서 이탈리아와 아일랜드의 경기를 시작으로 많은 월드컵 경기가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티브 로스는 미국 월드컵을 2년 앞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1996년, 마침내 미국에선 새로운 프로축구 리그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메이저리그 사커(MLS)죠. 미식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야구 등 4대 스포츠에 밀려 곧 사라질 거라고 평가절하 되던 MLS. 하지만 평균 관중과 팀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MLS는 과거 NASL의 실패를 거울삼아 과도한 연봉 경쟁을 억제하고 각 팀들이 전용구장 확보와 지역 연고 강화에 나서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각 팀마다 한 명씩의 스타선수를 영입할 수 있는 예외조항을 둬서 세계적인 스타들도 영입하고 있죠. 대표적인 사례인 데이비드 베컴(LA 갤럭시)이나 티에리 앙리(뉴욕 레드불스)는 과거 펠레가 그랬듯 미국 축구 리그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MLS는 미국 내 남미 이민자뿐 아니라 중산층의 백인들까지도 즐겨보는 스포츠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과거 대도시를 넘어 코스모폴리탄으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팀을 꿈꿨던 코스모스의 꿈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죠.

반가운 것은 뉴욕 코스모스를 다시 만날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입니다. 뉴욕 코스모스는 2016년 MLS 진입을 목표로 재창단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 코스모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레와 맨유의 전설 에릭 칸토나가 뉴욕 코스모스의 명예 회장직을 맡아 팀의 부활을 독려하고 있다네요.

2011년 8월 6일, 맨유의 전설적인 선수 폴 스콜스의 은퇴 경기는 맨유와 뉴욕 코스모스의 경기로 펼쳐졌습니다. 임시로 만든 팀이지만 뉴욕 코스모스의 유니폼을 다시 본 사람들은 과거 화려했던 코스모스의 역사를 떠올렸죠.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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