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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업도시, 축구의 고향 - 이준석의 킥 더 무비<토요일이 올 때>

축구가 잉태되는 환경은?

문화는 환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습니다. 넓은 평야의 프랑스에서 시각적인 미술이 발달하고, 숲이 많은 독일에서 청각적인 음악이 발달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죠. 사방이 바다로 가로 막힌 섬나라 영국과 일본에서는 자신들끼리의 분쟁이나 다툼은 곧 ‘공멸’을 의미하기에 정치 체제와 인간관계 모두에서 독특한 조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영국의 의회주의와 유머, 일본의 막부정치와 ‘와[和]’ 문화가 그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축구 역시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축구가 흥행하는 지역들은 어떤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우리나라에서 축구가 특히 인기 있는 도시들을 한 번 살펴볼까요? 물론 여러분이 좋아하는 클럽 팀의 연고지가 한국 최고의 축구도시라고 주장하고 싶으시겠죠?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비교적 초창기부터 축구가 자리 잡았고 지금도 흥행을 이어가는 곳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포항, 광양, 울산으로 대표되는 공업도시들은 축구가 흥행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경제력을 갖춘 많은 공장 근로자들의 수에 비해 아무래도 문화 시설이 부족하고, 또 남성성을 진하게 풍기는 축구는 언제나 일터에서 사랑 받아 온 스포츠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크리스토퍼 바우젠바인의 저서 『축구란 무엇인가?』에도 나온 것처럼 일자리를 찾아 공업도시로 온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또 다른 고향, 혹은 정체성을 찾고자 합니다. 그 정체성 찾기의 하나가 바로 어느 축구팀의 팬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둘째가라면 서러운 축구도시들 중에는 유달리 공업도시들이 많습니다. 특히 잉글랜드가 그런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맨체스터나 리버풀은 산업혁명 당시 세계의 공장과도 같은 곳이었죠. 물론 요즘은 옛날과 달리 꼭 공업도시여야 축구의 인기가 높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역사적으로 공업도시들은 축구 문화의 잉태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영화도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유명한 축구 잡지와 동명인 영화 <토요일이 올 때(When Saturday Comes)>입니다.

평범한 공장 노동자가 일류 축구선수가 되기까지
이미지오른쪽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로 추정되는 잉글랜드 셰필드(Sheffield). 한편에서는 공장 굴뚝이 내뿜는 연기가 자욱하고, 한편에는 게딱지만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형적인 이 공업도시에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지미(Jimmy)는 맥주 공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내이지요. 일과 시간엔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저녁에는 동생 및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가끔씩 경마 도박이나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지미에게도 한 가지 낙이 있다면 동네 청년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축구에 재능을 보였던 지미. 어느 날 웬 사내가 지미를 찾아옵니다. 아마추어 리그인 넌 리그(non-league)에 속한 할랄 FC(Hallal FC)의 감독이지요. 할랄의 감독은 지미에게 자기 팀에서 뛰어 볼 것을 권유합니다. 신이 난 지미는 할랄 FC에서 맹활약하고, 마침내 지역 명문팀인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타고난 천성을 못 버린 지미는 셰필드 입단 테스트 전날, 신이 나서 과음을 하게 되고 결국 테스트에 가지 못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원래 직장인 맥주 공장에서는 상사를 때려눕히고 해고를 당합니다. 게다가 그의 방탕한 생활에 질려 약혼자마저도 결별을 선언합니다.

불행은 계속되죠. 어렸을 적부터 같이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보며 꿈을 키워온 동생이 탄광사고로 목숨을 잃습니다.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이룰 뻔하다가 하루아침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지미. 과연 그는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요?

공업도시, 펍(Pub), 노동자, 디비전 시스템(Division system)

사실 이 영화는 영화로서의 재미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줄거리도 평이한 편이고, 축구선수의 성공기는 이제 넘쳐나고 있으니까요. 축구 장면을 실감나게 재현했다고는 하지만 앞서 소개한 <골(Goal)>에 비하면 답답할 정도입니다. 이 영화가 개봉한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실제 경기 장면을 영화에 이용했다는 게 큰 이슈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시각으로는 그렇게 신선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로서의 완성도가 좀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의 축구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잉글랜드의 초창기 축구문화는 공업도시의 노동자들에 의해 탄생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이 영화에도 그런 면이 고스란히 나옵니다. 변변한 문화 시설 하나 없는 칙칙한 산업 도시. 퇴근한 노동자들은 동네 술집인 펍을 찾아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봅니다. 그들의 집에는 각종 축구선수들의 사진과 축구 잡지들이 걸려 있습니다.

미국의 HBO가 만든 명작 드라마 ‘로마(Rome)’에는 과거 로마제국 시절, 평범한 서민들의 삶이 나옵니다. 늘 불안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들의 집에는 여러 가지 수호신이 모셔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축구팀과 선수가 그런 역할을 떠맡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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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필드 유나이티드의 엠블럼.

게다가 셰필드의 사람들은 자기 고향팀을 응원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팀을 꾸려서 축구를 합니다. 아마추어 팀의 스카우트들은 이들 중에서 뛰어난 선수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다시 최상위의 프로팀 스카우트들이 주시합니다. 오늘날 잉글랜드 축구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디비전 시스템, 즉 상?하위 리그 시스템은 비단 팀들 간의 상하 이동뿐 아니라 선수와 인력의 이동까지도 포함한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이러한 거시적인 현상을 이루는 개개의 움직임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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