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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셀틱 팬들의 열차 원정 - 이준석의 킥 더 무비<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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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개봉작 영화 <티켓>의 포스터.

편안한 시골 같은 영화


도시에 살다가 시골에 가면 우리는 그 한없는 여유로움과 낙천성에 당황하곤 합니다. 저도 외할머니 댁에 가면 그런 걸 느끼곤 합니다. 외할머니 댁은 경상북도 안강입니다. 경주 옆에 있는 시골이지요. 제가 꼬마일 때만 해도 전형적인 시골이었던 안강. 하지만 지금은 웬만한 지방 소도시처럼 아스팔트도 깔리고 아파트도 세워졌습니다. 그래도 그 곳의 사람들은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지요.

분과 초를 다투는 도시에 살다가 안강에 가면 처음은 당황스럽습니다. 기차역에 내려서 빨리 외할머니 댁에 가려고 해도 시골역의 검표원은 느릿느릿 걸어옵니다. 표를 내고 나면 날 언제 봤는지 “어디 가는기요?”라고 질문을 해 당혹스럽게 합니다. 역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기다리다가 하도 안 오기에 지나가는 아주머니한테 물어보면 “조금만 더 기다려보소!”라는 말이 돌아옵니다. 택시를 기다리다 지쳐서 걷습니다. 걷다가 마침 택시를 발견합니다. 택시를 탔는데 기사 아저씨는 여전히 차 밖에서 다른 아저씨랑 왁자지껄 수다를 떱니다. 외할머니 댁 앞에 내려서 선물이나 사 드릴까 하고 슈퍼를 가면 역시나 주인은 없습니다. 한창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서 다른 가게로 가려는데 앞의 자전거 가게 할아버지가 저보고 그냥 물건 들고 돈 놔두고 가랍니다.

도시의 확실하고 빠른 서비스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처음엔 이런 분위기가 낯설기만 합니다. 하지만 며칠 살다 보면 시골의 여유로움도 나름 좋습니다. 서두른다고, 애태운다고 될 게 안 되지 않고, 안 될 게 되지도 않습니다. 시간은 사람을 급하게 만들고, 급해진 사람은 타인을 믿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못 믿으면서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집니다.

이번 영화는 이탈리아, 영국, 이란의 감독들이 모여서 만든 옴니버스 영화 <티켓(Tickets)>입니다. 배경은 로마로 향하는 기차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축구 이야기가 나오냐고요? 네, 물론 나옵니다. 세 개의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는 마지막 이야기가 바로 축구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바로 이러한 각박한 세상, 한 템포 쉬어가고 사람을 믿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메시지를 담담하게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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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스리그를 앞둔 셀틱 팬들. 기차를 타고 적지 로마로 향하다

이 영화는 로마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1등석에는 백발의 교수가 나옵니다. 그는 학회에서 만나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어느 여성을 잊지 못합니다. 2등석에는 어느 고집불통의 아줌마와 그를 도와주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리고 3등석에서 우리는 축구팬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 셀틱(Celtic FC)의 팬들이지요. 기성용과 차두리가 뛰었던 것으로도 유명하고, 글래스고 레인저스(Rangers)와의 올드 펌(Old firm) 라이벌전으로도 유명한 팀입니다. 그 팀의 어린 팬 세 명이 들뜬 마음으로 응원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머나먼 이국의 도시, 이탈리아 로마를 향합니다. 바로 AS 로마와 셀틱의 유럽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보기 위해서이지요.

이 세 명의 셀틱 팬은 기차 안에서 베컴의 유니폼을 입은 어느 알바니아 꼬마를 만납니다. 같은 축구팬으로서 샌드위치도 나눠주고 호의를 베풀었건만 꼬마는 그들의 기차표를 훔치는 배은망덕한 짓을 하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셀틱 팬들은 알바니아 꼬마를 경찰에 넘기려 하지만 꼬마의 가족들이 애걸복걸을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몇 년 만에 만나러 왔는데 돈이 없어서 기차표를 훔쳤으니 제발 도와달라고요. 하지만 기차표를 알바니아 가족에게 주면 거꾸로 셀틱 팬들이 무임승차로 경찰에 넘겨지고, 그들은 그토록 원하던 축구를 못 보게 됩니다. 셀틱 팬들은 갈등하고 싸웁니다. 하지만 이 착한 팬들은 결국 기차표를 불쌍한 알바니아 가족에게 주지요. 그리고 자신들은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됩니다. 체포되면서도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만큼 멋진 축구팬이 어디 있어요? 우리는 축구를 포기하면서까지 저 불쌍한 가족들을 도왔단 말이에요!”

하지만 축구의 신은 그들, 셀틱 팬들을 버리지 않았나 봅니다. 셀틱 팬들은 경찰이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냅다 줄행랑을 칩니다. 경찰이 가만있을 리 없죠. 그들이 거의 잡히기 직전의 순간, 대합실에 있던 상대팀 AS 로마의 서포터들이 셀틱 팬을 도와줍니다.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경찰들의 앞을 가로막죠. 도망치는 데 성공한 셀틱 팬들은 잔뜩 신이 나서 로마 팬들에게 답례를 합니다. 셀틱의 응원가를 신나게 부르는 그들에게, 로마 팬들도 지지 않고 ‘로마! 로마!’를 외칩니다. 그러면서 모두가 행복한 결말에 이르죠. 추격을 포기한 이탈리아 경찰들만 빼고요.

축구도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

2002년 월드컵, 한국과 폴란드의 경기가 끝난 후, 국내의 어느 신문 사설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축구를 잘하는 나라들 모두가 부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언제나 낭만과 열정이 넘친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포츠는 결국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요.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축구는 돈과 언론과 승부와 부정부패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초반, 고향을 떠나 공장에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 맥주 한 잔 걸치고, 술집 뒤의 공터에서 공을 차면서 시작된 근대 축구. 그 소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천문학적인 몸값을 받는 축구스타들, 어마어마한 광고료를 챙기는 방송사들, 축구를 통해 사업을 하려는 다국적 기업들이 축구를 대표하는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영화 <티켓>에서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을 보기 위해 이역만리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순수한 젊은이들이 나옵니다. 불쌍한 알바니아 가족을 도와주려고 티켓을 포기한 후 그들은 자신들이 범죄자가 될 것이라며 절망에 빠지고 갈등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팀 서포터의 도움을 받아 도망에 성공합니다. 물론 의도야 어쨌든 법을 어긴 건 사실이죠. 하지만 감독의 연출 의도를 따져볼 때, 이 영화는 범법행위를 옹호한다기보다는 자신을 희생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일반 서민들의 순수함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게다가 곤경에 처한 상대팀 서포터를 도와주는 AS 로마의 서포터들의 모습이나 그들을 향해 답례로 셀틱의 응원가를 크게 부르는 스코틀랜드 젊은이들의 모습들은 오늘날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승패에 집착하는 축구장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없는 뭉클한 무언가를 느끼게 해 줍니다. 경기를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는 축구팬의 모습에서 순수한 축구의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무 걱정 말게, 친구들. 살다 보면 다 잘 될 거야”라고 누군가 말하는 것 같군요.

우루과이의 유명한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Hughes Galeano)는 그의 저서 『축구, 그 빛과 그림자(El futbol a soly sombra)』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패배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 축구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 버렸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점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요? 승리하든 패배하든, 셀틱을 응원하든 로마를 응원하든 축구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기쁘고, 경기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축구팬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축구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돈과 미디어에 의해 산업화되어 버린 축구. 그러나 축구가 사람들의 순수한 행복과 낭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한 번쯤은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 영화 <티켓>을 보면서 말이죠.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로,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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