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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장 티켓 전쟁'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끝내주는 자리>
시즌권 문화
저도 언젠가는 유럽에 축구를 보러 갈 날이 오겠죠? 비록 저의 팀은 수원 블루윙즈지만 그래도 축구의 고향인 유럽에 가보는 것은 많은 축구팬들의 꿈입니다. 하지만 주변에 유럽 축구장을 가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티켓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명문팀의 경우에는 아무리 비싼 돈을 주더라도 티켓을 구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바로 시즌권(season ticket) 문화 때문이지요.

시즌권이란 한 경기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한 시즌의 경기를 자유롭게 볼 수 있는 티켓입니다. 그만큼 비싸겠지요. 유명 팀의 경우는 가장 저렴한 시즌권이 백만 원대에 달한다고 하네요. 그래도 유럽에서는 워낙 축구의 인기가 높다 보니까 시즌권 구매가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유럽은 프로축구가 시민구단이나 클럽의 형태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특정 개인이나 기업이 구단의 주인인 곳도 있지만 다수의 시민이나 팬들이 직접 축구단의 주주로 참여해 온 곳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자연스럽게 팬들이 구단의 주인 혹은 *소시오(socio)의 상징으로 시즌 티켓을 구매하는 문화를 정착시켰습니다.

유럽 축구의 문화가 워낙 오래 되다 보니 이러한 시즌권은 세대를 거쳐서 물려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즌권 구매를 원하는 사람이 정원을 넘어서다 보니 경쟁이 치열하죠. 구단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는 이미 시즌권을 가지고 있는 티켓 홀더(ticket holder)들에게 다음해 시즌권 구매의 우선순위가 돌아가곤 합니다. 새로 시즌권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있어도 기존의 티켓 홀더들이 구매를 포기한 분량만큼만 신규로 구매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구장에 들어갈 수 있는 표는 시즌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정 오는 팬들을 위한 자리도 있고 시즌권이 아닌 일반 티켓 구역도 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 역시 시즌권 구매자들에게 우선권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티켓 홀더 중에서도 그 동안의 경기 관람 회수나 구단 기여도 등에 따라 등급이 갈리기도 한다니 정말 축구 한 경기 보는 게 참으로 힘들군요.

사정이 이러하니 티켓 홀더도 아니고 경제적 사정도 여의치 않은 유럽의 축구팬들은 소외감을 느끼곤 합니다. 몇 년 전 미국의 글레이저 가문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한 이후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시즌권의 가격을 대폭 올리자 팬들이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죠.

갈수록 선수들의 몸값이 상승하고 스타디움 건설비가 증가하는 등 축구 클럽의 운영비가 많이 들어가면서 시즌권의 가격도 비싸지는 추세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젊은이들이 축구장을 기피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지면서 잉글랜드 축구계에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는 이런 시즌권 문화의 빛과 그림자를 다룬 영화입니다. 잉글랜드 영화 <끝내주는 자리(Purely Belter)> 이야기를 해 볼까요?

* 스페인어로 클럽의 멤버를 의미합니다. 축구에서는 시민구단의 주주, 혹은 시즌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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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와 끝내주는 자리의 포스터.

시즌권을 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불량소년들
잉글랜드 뉴캐슬(Newcastle), 16살의 제리(Gerry)와 슈얼(Sewell)은 단짝친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다. 둘은 어울려 다니며 도둑질을 하고 술, 담배를 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소위 문제아들이지요.

제리는 가정환경도 좋지 않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는 수시로 어머니를 폭행합니다. 어머니는 폐병을 앓고 있죠. 큰 누나는 미혼모이고, 둘째 누나는 가출한 지 오래입니다. 제리의 가족은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피해 이리저리 이사해 다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리와 슈얼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습니다. 바로 지역 연고 축구팀인 뉴캐슬 유나이티드(Newcastle Utd.)의 시즌권을 사는 것이지요. 돈이 없어 한 번도 축구장에 가보지 못한 두 소년. 그들은 따뜻한 밀크티를 마시며 뉴캐슬의 홈구장 세인트 제임스 파크(St. James Park)에서 축구를 보는 게 유일한 소망입니다.

하지만 티켓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최소한 1인당 500파운드(한화 약 90만 원)의 돈이 있어야 시즌권을 살 수 있습니다. 가난한 데다 변변한 기술조차 없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큰돈입니다.

어느 날 제리의 이웃 아줌마가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만일 제리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학교에 다닌다면 공짜 축구 티켓을 주겠다는 제안이지요. 제리는 눈을 딱 감고 학교에 다닙니다. 껄렁한 점퍼와 청바지 대신 단정한 교복을 입고 제법 학생인 척 해 봅니다. 하지만 책 하나도 제대로 못 읽어 망신을 당하고, 가족 소개 시간에 아버지를 신나게 욕하거나 훔친 책들을 학생들에게 파는 등 온갖 말썽을 일으킵니다. 이 모든 게 축구 경기를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축구에 문외한인 옆집 아줌마가 상으로 준 것은 뉴캐슬의 철전지 원수인 선더랜드(Sunderland AFC)의 홈경기 티켓입니다.

그래도 축구 경기가 너무나 보고 싶어 뉴캐슬 팬임을 숨기고 선더랜드의 홈구장에 들어간 제리와 슈얼. 하지만 그 곳에는 리버풀과 경기임에도 “뉴캐슬을 싫어하는 사람, 모두 박수쳐!”라는 과격한 응원가를 부르는 선더랜드의 팬들이 가득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어색한 첫 축구 관람은 끝납니다.

제리와 슈얼은 어쨌든 시즌권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로 합니다. 닥치는 대로 고물을 모아 팔아보기도 하고, 백화점과 상점을 털러 다닙니다. 하지만 제리의 가족을 쫓아온 주정뱅이 아버지가 힘들게 모은 돈을 가져가 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경찰의 수배까지 받게 되지요.

자포자기한 제리와 슈얼은 뉴캐슬 유나이티드 선수들의 연습장으로 무조건 찾아갑니다. 그 곳에서 뉴캐슬의 스타 선수인 앨런 시어러(Alan Shearer)를 만나 시즌권을 한 장만 달라고 졸라보지만 터무니없는 요구에 시어러는 콧방귀만 뀝니다. 홧김에 제리와 슈얼은 시어러의 스포츠카를 훔치는 엽기적인 행각도 벌이죠. 시즌권이라는 작은 꿈조차 이룰 수 없는 이들은 절망합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은행을 털기로 한 이들 콤비. 하지만 너무나 어설픈 은행 강도 연기는 쉽게 들통 나고 결국 철창신세를 지게 됩니다. 그리고 법원으로부터 1년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게 됩니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끝내주는 자리’에 앉아 밀크티를 마시며 뉴캐슬 경기를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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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L의 유명 라이벌전, 타인-위어 더비중 한 장면.

티켓 전쟁에 녹아 있는 타인-위어 더비(Tyne-Wear derby)
대부분의 잉글랜드 축구 영화는 비슷한 분위기를 띄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물간 공업 도시, 성냥갑 같은 공영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가,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 없이 그저 현실에서 마초적인 인생을 즐기는 불량 청년들. 이 영화 역시 그런 전형적인 공식을 답습하고 있네요. 하지만 여느 영화와는 달리 나쁜 짓을 일삼는 주인공들임에도 시즌권을 얻기 위한 그들의 어설픈 노력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뜹니다.

게다가 영화 속에는 잉글랜드의 치열한 더비 현장이 펼쳐져 흥미롭습니다. 이처럼 승강제가 도입되고 축구 리그의 역사가 오래될수록 이런저런 이유와 사건으로 인해 앙숙인 팀들의 관계가 형성되고 이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경기에 영향을 미치게 되죠. 당연히 잉글랜드에도 수많은 더비가 존재합니다. 영화 <끝내주는 자리>에서도 유명한 더비가 하나 소개됩니다. 바로 뉴캐슬과 선더랜드 간의 ‘타인-위어 더비(Tyne-Wear derby)’죠.

뉴캐슬과 선더랜드는 수백 년 전부터 앙숙 관계이던 지역이라고 합니다. 석탄 채굴권 문제로 시작된 두 지역의 갈등은 청교도 혁명 당시 무력충돌로 번졌죠. 그리고 자연스레 이 두 팀은 축구장에서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타인-위어’는 이 두 도시가 속해 있는 주(州)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도 주인공들은 뉴캐슬 팬임에도 잘못 받은 축구표 때문에 선더랜드 경기를 보러 갑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험상궂은 선더랜드 팬들 사이에서 불안해하죠. 그들이 쓰는 뉴캐슬 사투리 때문에 툰(toon, 뉴캐슬을 의미합니다. 'town'의 뉴캐슬 사투리에서 비롯되었죠.)을 응원하는 조르디(Geordies. 뉴캐슬에 사는 뉴캐슬 서포터의 별명입니다.)라는 사실이 들통 나자 화난 선더랜드 팬들은 그들에게 꺼지라며 위협을 합니다. 게다가 뉴캐슬과의 경기도 아닌데 뉴캐슬을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는 선더랜드의 홈구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Stadium of Light)의 분위기는 제리와 슈얼에겐 지옥과도 같죠.

사실 더비는 축구에서 양날의 검입니다. 경기의 긴장도를 높여주고 흥미를 높여주지만 한편으로는 앙숙 관계인 양 팀 팬들 간의 물리적 충돌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유달리 전쟁을 닮은 스포츠인 축구. 경기 중에 적당한 선을 지킨다면 양 팀 간의 뜨거운 서포팅은 축구를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겠죠. 넘치는 더비의 에너지가 긍정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도록 많은 축구팬들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로,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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