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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알 마드리드와 대항해 시대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레알>(하)
(상)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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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알의 포스터.

# 세네갈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아프리카의 어느 시골. 하지만 여기에도 축구를 하는 꼬마들은 있습니다.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축구공을 차는 아이들. 아키아(Akia)는 그 중에서도 유달리 축구를 좋아합니다.

전기도 없는 판에 TV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 이곳에서 축구 소식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아키아의 아버지가 이틀 길을 걸어 도시에 가서 축구 경기를 보고, 다시 이틀 길을 걸어 마을에 돌아옵니다. 마을 어린이들은 아키아의 아버지가 들려주는 레알 마드리드 경기를 듣습니다. 문명의 이기가 없던 그 옛날, 아이들이 할아버지의 전래동화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장면이 재현됩니다.

“그러니까 얘들아. 지단이 상대방 선수의 공을 빼앗아 사이드에 있던 베컴에게 주었단다. 그리고 베컴은 휙~하고 공을 하늘 위로 올렸지. 그러자 어이쿠~ 마지막엔 호나우도가 뛰어올라 득점을 했지 뭐냐?”

모닥불 곁에 옹기종기 앉아 축구 전래동화를 듣는 아이들. 하지만 이런 평안한 날이 계속되진 않습니다. 축구에 정신을 뺏긴 아키아가 학교 공부에 소홀해지자 아버지는 결단을 내립니다. 공부는 그만두게 하고, 인근 도시에 보내 삼촌으로부터 장사를 배우게 한 것이지요. 침울한 표정으로 먼 길을 걸어 도시의 삼촌에게 도착한 아키아. 하지만 삼촌은 축구를 좋아하는 아키아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과연 뭘까요?

# 스페인
지방에 있다가 마드리드에 갓 상경한 비아스. 그는 초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마드리드란 도시, 뭔가 이상합니다. 어떤 날엔 사람들이 그저 싱글벙글 웃고 있다가도 또 어떤 날에는 모두가 침울하게 의욕 없는 표정을 짓고 있죠.

알고 보니 자기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입니다. 흰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남학생들은 물론이고, 새침한 여학생들과 점잖은 선생님들까지 모두요. 축구에 별 관심이 없는 비아스조차 그저 무시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던 거죠. 게다가 그가 사는 집도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Estadio Santiago Bernabeu) 코앞입니다.

그런데 비아스의 앞집에 사는 할머니만은 뭔가 다릅니다. 그 할머니는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디론가 외출을 하는 것이지요. 축구팬이 아닌 건가 싶어 조심스레 할머니에게 다가간 비아스. 하지만 웬걸요. 그 할머니도 왕년에는 매 경기 베르나베우를 찾던 마드리드의 열혈 팬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축구 경기를 피해 도망 다니는 걸까요? 비아스는 그 이유를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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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를 대표하는 범선 이미지. 출처=만땅님의 네이버블로그

레알 마드리드의 대항해 시대는 영원할 수 있을까?

"갈락티코"로 대변되던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적 스타 수집 정책은 최근 들어 주춤해진 양상입니다. 물론 그래도 레알 마드리드에는 여전히 톱스타들이 뛰고 있지만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보듯, 전 세계의 수많은 팬들이 자기 지역과 상관없이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축구의 국제화된 모습에 탄복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 속 한구석에서는 근본적인 물음이 하나 생깁니다. 그들의 대항해 시대는 계속될 수 있을까?

신대륙과 아프리카 항로의 발견으로 촉발되었던 대항해 시대. 이 대항해 시대의 선두에 서 있던 것이 스페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대형 범선을 띄워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구축했죠. 신대륙의 금은보화로 스페인 본국은 유럽 최고의 부자 나라가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대항해 시대는 끝나고, 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은 속속 독립을 하게 되죠.

물론, 그 옛날 총과 칼로 이루어졌던 식민지 수탈과, 오늘날의 유럽 축구를 비교하는 것은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축구는 평화로운 것이고, 외국의 팀을 응원하는 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취미 활동입니다. 외국 팀을 좋아한다고 식민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나라 팀만 응원하자는 생각은 오히려 글로벌 시대에 국수주의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나라들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본, 미국, 베네수엘라, 세네갈. 모두 떠오르는 신흥 축구 강국이라는 점이지요. 아직까지는 이들 나라를 축구 최강국이라고 부르긴 힘듭니다. 그래도 일본은 J리그의 부흥을 통해 우리와 아시아 정상을 다투고 있습니다. 미국도 MLS라 불리는 자국 리그가 무섭게 성장하고 있죠. 베네수엘라와 세네갈은 자국의 축구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월드컵에서 강팀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다크호스입니다.

자국 리그의 인기가 올라간다고 꼭 해외 리그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유럽 축구는 100년 이상의 지역 연고를 바탕으로 오늘의 충성팬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들 축구 신흥국의 리그가 탄탄한 기반을 쌓아간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질지 모르죠. 영화 속, 레알 마드리드에 열광하던 주인공들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길지 모릅니다.

전성기를 구사하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의 대항해 시대. 그러나 이 대항해 시대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축구 신흥국들의 리그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유럽 축구가 그렇듯, 신흥국 리그에도 충성팬들이 많아지고 그들의 눈높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과거 우리 나라를 방문했던 외국 유명팀들 중에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거만한 자세나 성의 없는 플레이로 비난을 받았던 경우가 꽤 있습니다. 이제 신흥국의 팬들은 그저 외국의 명문팀이라고 열광하지 않습니다. 마드리드에 살지 않는 해외의 팬들에게도 똑같은 존중과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이죠.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팬 한 사람, 한 사람은 축구 클럽의 소중한 고객들입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현재 갈락티코라는 무차별 스타 영입 정책보다는, 팀의 발란스에 기초한 선수 구성을 더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대항해 시대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유럽 명문팀에 대한 외국팬들의 동경심에만 치중하지 말고, 그들 한 명 한 명을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존중해 주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로,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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