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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팬심은 멀고, 사랑은 가깝다? - 이준석의 킥 더 무비<로미오와 줄리엣 결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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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결혼하다(O Casamento de Romeu e Julieta)의 포스터


‘로미오와 줄리엣’은 무척이나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입니다. 이탈리아 베로나(Verona)를 배경으로 서로 죽일 듯이 싫어하는 두 가문의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이지요. 축구팬인 제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 바로 이겁니다. 유럽이나 남미에서는 서로 싫어하는 축구팀의 팬과는 사돈도 안 맺는다고 하던데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축구 라이벌 가문 간의 결혼은 과연 어떨까? 그런 의문점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이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결혼하다>입니다.

축구 라이벌 팬 간의 사랑과 결혼
이 영화에서는 말 그대로 ‘로미오’라는 남자와 ‘줄리엣’이라는 여자가 주인공입니다. 둘 다 아주 극성 축구팬이지요. 상파울루에 사는 이들 남녀는 각기 다른 축구팀을 응원합니다. 로미오는 코린티안스(Corinthians Paulista) 팀의 극렬 서포터이자 서포터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줄리엣은 팔메이라스(Palmeiras) 팀의 서포터이고, 그녀의 아버지는 팔메이라스 후원회의 이사입니다.

그런데 이 두 팀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습니다. 사실 축구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우리 상식으로는 라이벌 축구팀 간의 악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를 겁니다. 하지만 굳이 영화라서가 아니라 유럽이나 브라질에서 서로 사이가 안 좋은 라이벌 팀의 팬들은 서로를 죽이기까지 할 정도라니 정말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딱’입니다.

이 두 라이벌 팀의 팬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우연한 기회로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로미오는 줄리엣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본인이 팔메이라스 팬이라고 거짓말을 하지요. 마침내 결혼승낙까지 받아낸 로미오. 하지만 팔메이라스가 유럽 챔피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경기를 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던 날에 일이 터집니다. 온통 팔메이라스 팬들로 가득 찬 비행기 안에서 로미오는 장인에게 본인이 코린티안스 팬임을 고백합니다. 장인은 노발대발하며 로미오에게 화를 내고, 비행기 안의 팔메이라스 팬들이 로미오를 잡기 위해 달려들면서 비행기 안은 난장판으로 바뀝니다.

과연 로미오는 적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줄리엣은 아버지의 반대를 딛고 코린티아스 팬과 결혼할 수 있을까요?

축구 하는 빈민, 축구 즐기는 중산층
하지만 이 영화는 유쾌한 사랑 영화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쓸쓸한 모습도 담고 있습니다. 영화 속 로미오는 안과 의사입니다. 줄리엣의 아버지는 변호사죠. 모두 백인인 이들은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축구를 열렬히 응원하죠. 하지만 정작 브라질의 축구선수들은 가난한 계층 출신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도 이런 점을 시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설적인 팔메이라스의 축구 스타가 우연히 로미오와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은퇴 후 이미 거지꼴의 노인이 된 지 오래입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유일한 백인 선수였던 카카(Kaka)가 주목받던 것도, 그가 다른 브라질 선수들과 달리 중산층 출신의 백인 선수였기 때문이지요. 비교적 인종차별이 적다고 알려진 브라질이지만 피부색과 재산에 의한 사회 갈등은 심각한 수준인가 봅니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결혼하다> 역시 안정적으로 축구를 즐길 수 있는 유복한 집안의 남녀 이야기입니다. 저는 영화가 단순히 사랑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브라질의 사회모순과 빈부갈등에서도 다룰 것을 내심 기대했습니다만, 그런 메시지는 끝끝내 나오지 않더군요. 이런 문제의식이 없이 선남선녀의 유쾌한 사랑 이야기로만 만족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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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삼바 축제의 한 장면.

개방적인 브라질의 성문화
이 영화에서는 브라질 사람들의 개방적인 면도 엿볼 수 있습니다. 로미오는 총각이 아니라 대학에 다니는 아들을 둔 유부남입니다. 아내와는 오래 전에 사별한 상태이지요. 반면 줄리엣은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인이자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온 엘리트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여자 측에서 별로 안 좋아할 조건일 텐데 이 영화에서는 남자에게 결혼 경력이 있고 다 큰 아들이 있다는 점이 전혀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는 듯합니다.

게다가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코린티안스 엠블럼이 새겨진 피임 기구를 건네는 장면이 나오고, 결혼도 하기 전에 어머니에게 로미오와의 잠자리에 대한 불만족을 털어 놓는 줄리엣의 모습도 보입니다. 브라질이 개방적인 나라인 것은 알고 있지만 음… 아무래도 우리 정서와는 좀 떨어진 것도 같네요.

삶 그 자체, 브라질의 축구문화
아무튼 이 영화를 보면 결혼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브라질의 축구 문화가 삶의 곳곳에 깊게 뿌리내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집안의 사람들이 아파트 마당에서 싸우자 이를 지켜보던 이웃들이 각자 코린티안스와 팔메이라스 팬들로 갈려서 베란다에서 자기 팀의 깃발을 흔들며 두 집안을 응원하는 장면은 꽤나 재미있습니다.

결혼식 장면에서 두 집안이 각자 팀의 응원가를 부르며 행진을 하고, 하객들이 팔메이라스와 코린티안스의 대형 현수막을 들어 올리는 장면도 인상 깊습니다. 현실의 결혼식에선 물론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지요. 아, 글쎄요? 그래도 브라질이니까 실제 결혼식에서 저럴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축구가 하나의 문화를 넘어서 삶의 중요한 가치가 되어 있는 브라질을 보니 축구팬으로서 괜히 부럽네요. 제 딸 대(代)에 가면 우리나라도 저런 일이 벌어질까요? 제 사돈하고 싸워도 좋으니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로,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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