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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질 사회] ① “재벌가만이 아니다”… ‘갑질 바이러스’ 퍼진 한국
대한민국 사회의 병폐 중 하나인 ‘갑질’이 국적기를 타고 세계로 날았다. 최근 대한항공 조현민 전 전무의 ‘물벼락 갑질’과 관련해 외신들이 이를 ‘갑질(Gapjil)’이란 단어 그대로 소개한 것. 1980년대 ‘재벌(Chaebol)’이란 말이 영어사전에 등재된 데 이어 ‘갑질’까지 오르게 생겼다. ‘갑질’은 권력의 상하관계로 발생하는 부당 행위를 일컫기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난해 한국언론진흥재단 뉴스빅데이터팀이 공개한 ‘뉴스빅데이터로 보는 신조어’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부터 5년간 보도된 ‘갑질’ 관련 기사는 2만5075건에 달하는데, 이때 갑질의 주체는 대기업과 재벌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반 직장은 물론, 가족과 친구 등 일상 관계에서도 자행되고 있다. ‘갑질’ 바이러스에 감염된 대한민국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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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논란'을 불러 일으킨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사진=YTN 방송화면)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손예지 기자] 이쯤 되면 ‘조현민이 쏘아 올린 공’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 조현민이 최근 대한항공 전무에서 물러났다. 지난달 12일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컵을 던지고 물을 뿌렸다는 의혹이 제기된 탓이다. 이에 따라 조 전 전무는 폭행 및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지난 1일 경찰 조사도 받았다. 이후 한진가 안방마님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운전기사·가사도우미·임직원 등에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다는 폭로가 연달아 터졌다. 이로 인해 앞서 2014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현아 칼호텔네트워크 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당시 대한항공 부사장), 2005년 벌어진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의 ‘70대 노인 폭행 사건’ 등이 다시 언급되면서 한진 일가는 국민의 적이 된 모양새다.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대한항공의 사명 변경, 국책 항공사 자격 박탈, 세습경영 철폐 등을 요구하는 글이 줄을 잇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신호탄이 됐다.

“항공사 재벌 2세의 갑질이 연일 뉴스에 오르고 있다. 스타트업계에서 상대방 얼굴에 물 뿌리는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벼락 갑질’ 폭로 후인 지난달 19일, 동영상 콘텐츠 제작업체 셀레브에서 일했다는 김모 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일부다. 김 씨는 이 글에서 임상훈 대표가 거듭된 폭행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부당한 초과 근무를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회식 자리에서는 전 직원에게 과음을 강제했으며 여직원을 룸살롱에 데리고 간 적도 있다고 덧붙여 충격을 안겼다. 이 글이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 퍼지며 논란이 커지자 임 대표는 “100% 개인의 부덕함과 잘못에서 출발한 일”이라고 사과하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대중은 분노했다. 특히 셀레브가 셀러브리티나 연예인의 인터뷰 영상을 제작하며 호응을 얻었던 스타트업 기업이라 그 배신감이 더욱 컸다. 아울러 이는 ‘갑질’이 비단 재벌가만의 문제가 아님을 시사했다.

■ 직장 상사·진상 고객… 갑들의 천국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세~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성인 2명 중 1명(54.3%)이 ‘갑질’을 당해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 응답자들은 ▲직장 상사(31.7%) ▲고용주(26.5%) ▲비스 이용자·손님(19.3%) 등을 ‘갑질’ 행사자로 지목됐다.

일반 직장인의 경우 ‘갑질 상사’로부터 겪는 문제가 가장 크다는 뜻이다. 지난 2월 그 심각성이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 있었다. 서울 아산병원에서 근무하던 한 간호사를 극단으로 내몬 ‘태움’ 문화다.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으로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태움’은 간호사들 사이에 관습처럼 굳어진 군기 문화다. 신입 간호사에게 훈련이란 명목하에 초과 근무, 업무 외 과제,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것을 말한다. 위 사건 피해자의 경우, 업무 3일째부터 ‘태움’에 시달리다 두 달 만에 체중이 7kg이나 줄었고 비극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해 직장인 권리 신장을 위해 설립된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 박점규 운영위원은 “간호업계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 상당한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교육을 빙자해 한 사람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은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호텔이나 면세점 등 고객을 대하는 서비스업의 경우 이 같은 ‘갑질’이 더욱 심하다고 설명했다. 현장에서 고객 대응 시 발생 가능한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훈련 단계에서 더욱 억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임의 ‘갑질’에 시달린 끝에 현장에 투입되면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진상 고객이다. 온라인 쇼핑몰 고객 센터에서 전화상담사로 약 1년간 근무했다는 심지연 씨(27.여)는 “하루에 수백 통의 전화를 받는데, 그중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달라며 우기는 고객과 뜻대로 되지 않으면 폭언하는 고객의 비중이 상당수”라며 “음란 전화를 거는 고객도 있었다. 진상의 유형이 다양하다 보니 관리 차원에서 ‘블랙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고객의 상담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전화가 오면 선임 상담원에게 넘기는 식이다. 결국, 진상 고객에 대응해야 하는 것은 감정노동자”라고 말했다.

■ 근로자의 날, 직장 갑질 근절 움직임 곳곳에서

직장 내 ‘갑질’로 인한 피해 사례가 빈번해지는 만큼 개선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우선 정부는 “우리나라에 만연한 ‘갑질’ 문화 근절을 위해 오는 6월 말까지 종합대책을 수립하겠다”는 계획을 지난달 30일 밝혔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법령·제도개선 등을 통한 갑질의 사전 예방 ▲갑질 조기 적발 시스템 마련 ▲처벌 및 관리자 책임 강화 ▲피해 회복 지원과 관련해 단계별로 구체적인 대책을 수립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향후 2차 회의에서는 공공분야의 갑질 실태와 원인을 분석할 전망이다. 5월 한 달간 국민신문고 사이트 ‘국민생각함’ 코너를 통해 국민제안을 받고, 이를 실태를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 반영한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중앙행정기관·지방자치단체·산하 공공기관·일반 국민을 상대로 관련 설문조사도 시행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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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자를 대표하는 상담원의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사진=픽사베이)


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감정노동자에게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업무의 일시적 중단 또는 전환 등을 대통령령에 따라 조치토록 의무화했다. 감정노동자가 사업주에게 직접 보호 조치를 요구할 수 있고, 노동자의 요구를 이유로 사업자가 그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불리한 처우를 할 수 없는 보호 규정도 추가됐다. 특히 이마트·홈플러스·LG 유플러스 등 감정노동자의 업무 중요도가 높은 기업들은 현재 고객 대응 과정 중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서 직원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들을 각각 마련해 시행 중이다.

■ 수직 서열화된 한국 사회… 부모·선배도 갑

우리 사회는 수직 계열화된 서열 문화가 뿌리 깊이 박힌 상태다. 특히 ‘장유유서’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이에 따른 서열 문화가 강하다. 이에 따라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갑과 을을 나뉘게 된다. 선배-후배는 물론, 심지어 부모-자식 사이에서도 ‘갑질’이 빈번히 일어나는 이유다.

알바천국이 전국 20개 대학생 회원 1028명을 대상으로 한 ‘대학 군기 문화’ 관련 설문조사 결과, 절반 이상이 선배의 ‘갑질’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들이 겪은 갑질 유형으로는 ▲인사 강요(34%) ▲음주 강요(18.4%) ▲화장, 헤어스타일 등 복장제한 강요(10.7%), ▲메신저 이용과 관련한 제재(10.4%) ▲얼차려(10.2%) ▲성희롱(3.9%) ▲일방적 폭행(2.4%) 등이 꼽혔다.

지난 3월 홍익대학교 응원단 내에서 벌어진 ‘갑질’ 논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수습 단원이 SNS를 통해 한겨울 야외에서 얼차려를 받거나 쓰레기·담배·가래 등이 담긴 폭탄주를 강요받았다고 폭로해 충격을 안긴 것. 이에 앞서 지난 2월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무용원 4학년 학생들이 후배 15명을 집단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가해 학생들은 학교 징계위원회에 출석해 “(후배들이) 공용 탈의실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욕설을 해 훈계를 하려던 것”이라고 진술해 비난을 샀다. 특히 예체능 전공생들의 ‘선배 갑질’은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해서까지 계속되는 경향이 커 더욱 문제시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수도권 모 대학 신입생이 오리엔테이션(OT)에서 만취해 손가락 3개가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2016년에는 대전 모 대학교 신입생이 과음으로 숨졌고, 2015년에는 광주 모 대학 신입생이 술을 마시다 중태에 빠지기도 했다. 모두 OT에서 벌어진 일이다. 선배가 후배에게 술을 강요하는 잘못된 음주문화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문제는 이러한 대학 내 ‘갑질’이 ‘전통’이라는 말로 포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에 따른 대책으로 지난 2월부터 약 두 달간 ‘신학기 선후배 간 폭행 강요 집중 신고 기간’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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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부모-자식 간에도 빈번히 일어난다(사진=KBS2 방송화면)


가족이라고 안전할까. 부모-자식 관계는 한 개인이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갑을 관계이기도 하다. 부모는 육아와 양육이라나 명목하에 자식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혹은 버려두며 ‘갑질’한다. 자식은 자립할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부모의 보호 없이 살 수 없으므로 ‘을’이다. 극단적 예가 지난해 KBS2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이하 안녕하세요)’에서 소개된 엄마의 ‘갑질’ 사연이다. 고민의 주인공인 딸은 엄마가 자신의 물건을 동의 없이 버린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엄마는 “집안일은 내 관할이고, 내가 갑”이라며 딸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으로 빈축을 샀다.

이와 관련, 이지영 심리상담가는 “세상의 모든 갑을 관계 중 가장 ‘슈퍼 울트라 갑질’이 가능한 사람이 부모”라며 “자녀를 ‘정서적 배우자’나 ‘화풀이 대상자’로 삼는 것”을 예로 들었다. 부모의 정서적 ‘갑질’에 휘둘리며 자라난 자녀들에 대해 “사회 권력이 형성되는 곳에서 다시 가해자나 피해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며 ‘갑질의 대물림’을 지적했다. 이어 “부모의 ‘갑질’에 대한 민감성을 키우고 가정 내에서의 아이들에 대한 존중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갑질 사회①] “재벌가만이 아니다”… ‘갑질 바이러스’ 퍼진 한국
[갑질 사회②] “병이 병을 낳는다”…‘갑과 을’ 사이 더 악독해진 甲
[갑질 사회③] “당당히 맞서라”…사이다 캐릭터는 대리만족일 뿐?

cultur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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