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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연;뷰] ‘레드북’ 여자의 글쓰기,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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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김희윤 기자]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방’의 저자 버지니아 울프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는 여성의 권익이 바닥을 치던 시대에서 여자들의 창조성이 가난이나 억압으로 인해 얽매이지 않는 미래를 그려나갔다. 겨우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법은 남성 중심이었고, 문화는 남성성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여성의 열등함을 증명하는데 주력했다. 때문에 울프는 여성의 물질적·정신적 독립만이 그들을 구원하는 길이라 믿었다. 또한 동등한 성 평등을 이룩할 때 비로소 여성과 남성이라는 구분을 넘어서는 차원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레드북’은 울프의 고뇌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많다. ‘레드북’은 가부장적 사회의 끝을 달리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슬플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하는 안나가 ‘레드북’이라는 잡지를 출간한 후 일어나는 사회적 파장을 통해 완고한 시대적 통념에 맞서 나간다.

봉건시대에서는 당연했을 모든 행위들이 현시점에서 다시 도전받고 재평가된다. 그러나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고질병도 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에나 존재했을 사람들의 허위의식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 했던가. 인간은 자신의 방탕함을 외면하고선 타인에 대해 고상함을 강요한다. 눈꺼풀 자체가 왜곡돼있다.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를 거쳐 오늘날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100년도 더 된 이야기를 다룬 ‘레드북’의 유의미함은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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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안나는 소설을 쓴다. 불합리한 현실의 경계를 깨뜨리고자 소설을 쓰진 않는다. 단지 인간 본연의 행위 차원에서 ‘소설이 쓰고 싶어’ 소설쓰기에 매진한다. 그러나 안나는 여성의 글쓰기가 못마땅한 자들이 세운 문화적 장벽에 가로막히고 만다. 그럼에도 좌절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단지 마음이 이끄는 상상과 글쓰기로 자신만의 저항을 시작해나간다. 안나가 행한 ‘상상의 힘’은 비로소 현실이라는 천장을 뚫어버리기에 충분하다. 그 순간 ‘여자의 글쓰기’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환원된다.

사랑은 덤이다. 여성이 직접 찾아 나선 주체적인 사랑의 모습은 부모의 손을 벗어나 천방지축 달려 나가는 아이처럼 행복하기만 하다. 이제야 여성은 남성이 봉건사회에 둘러놓은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동등한 선상에 위치한다. 그들은 본래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아마저 종속된 시절 ‘돈’과 ‘자기만의 방’과 ‘사랑할 자유’를 원했을 뿐이다. 결국 여성은 본심을 따라 성벽을 깨부수고 꿈꾸는 현실을 직접 만들어냈다. 지극히 상식적인 역사의 첫 날이 밝았다. 그렇기에 ‘레드북’의 문제의식은 햇살처럼 선명한 메시지로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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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도 탁월하다. 안나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적절히 나눠가며 서사를 꾸려간다. 발칙한 대사와 명랑한 넘버, 봉건사회에 녹여낸 현대적 유머코드까지 전체적인 비율이 좋은 작품이다. 강렬한 색감을 입힌 다채로운 무대구성마저 주제의식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무엇보다 막강한 전달력과 가창력으로 캐릭터의 맛을 살리는 유리아의 호연이 위대한 안나를 가능케 한다. 21세기에도 자신만의 성역을 세워놓고 선입견의 늪을 헤매는 사람들을 향해 안나는 소리친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다 잘못된 건 아니라구요!”

뮤지컬 ‘레드북’은 오는 3월 30일까지 서울 세종M시어터에서 공연된다.
cultur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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